#90
부르크 백작저의 고용인들은 일제히 눈살을 찌푸렸다. 저 멀리 지평선에서부터 무언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것이 빛을 반사했기 때문이었다.
백마가 모는 그 마차는 마치 보석함에 바퀴를 달아둔 듯 호화롭고 화려했다. 그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차이엘드 공작 전하께서 부르크 백작저에……!”
“어서 안주인께 고하도록!”
“세상에…… 오래 일을 하니 차이엘드 공작도 뵙는군.”
카일의 재력과 권력은 귀족들은 물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고용인들은 인기 절정의 연극배우를 기다리는 양 기대에 찬 눈빛을 했다.
괴물 차이엘드 공작이 최근 사랑꾼이 되었다는 소문은 이미 수도 전역에 파다했다.
차이엘드라면 재력만큼이나 수려한 외모가 유명한 핏줄. 고용인들은 미리 코피를 닦을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부드럽게 정차한 마차의 문이 열리고 다이앤 백작의 시녀가 내렸다. 그러나 차이엘드 공작이 장미꽃을 흩날리며 마차에서 내리는 이벤트는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그는 오히려 초상이라도 난 듯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마저 퇴폐적인 매력이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즐거운 시간 보내셨습니까?”
약혼녀가 빙긋 웃으며 얼굴을 비출 때에야 그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아멜 또한 그의 반응이 평소와 조금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니, 이건 조금 다른 정도가 아니었다.
‘왜 카일이…… 가만히 있지?’
보통 그녀가 마차에 올라타면 10초 이내로 허리에 팔을 감아 오던 그였다. 머리카락을 쓸며 나른하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것이 보통의 일과.
그러나 오늘의 카일은 흡사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눈망울을 하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지?’
이때까지만 해도 아멜은 카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
트라이하 일정의 마지막 날. 클레어 차이엘드가 황궁에 도착하자 트라이하의 대신들은 긴장감을 느꼈다.
지난날들을 돌이켜본바, 차이엘드라는 성을 가진 누군가가 황궁에 다녀가면 항상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당당한 걸음으로 로비에 들어서는 클레어를 이녹이 맞았다. 몸에 밴 정중함은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존중받는 기분이 들게 했다.
“레이디 클레어, 오랜만입니다.”
“황실의 만찬에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러나 클레어는 다른 여인들처럼 볼을 붉히거나 괜한 웃음을 짓지 않았다. 그 흐트러짐 없는 태도에 당황하는 건 이녹의 몫이었다.
“부황께서 레이디 클레어가 입국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저녁을 함께하자 하셨습니다. 차후에는 입국에 즈음하여 전갈을 보내주셔도 좋겠습니다.”
“공무차 입국한 것이 아니기에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리하겠습니다.”
그녀가 예의상 입꼬리를 올렸다. 주변은 서릿발이 날리는 듯 공기가 차가웠다. 둘을 뒤따르던 시종들은 팽팽한 긴장감에 숨소리도 죽이고 있었다.
호화로운 식당에는 병환이 깊어진 레오시스 2세가 앉아 있었다. 본래 손님을 맞는다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관례이나 그조차 어려운 상태.
‘곧 있을 황권 교체에 대비하려고 부르셨군.’
공감 능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클레어는 남의 고통이나 죽음에 연민을 느끼거나 슬퍼할 줄 몰랐다. 눈물? 흘려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적당히 안타까운 얼굴을 지어 보이며 식사 겸 거래에 임했다. 트라이하의 연금술과 차이엘드의 선박 제조술 거래는 식사 동안 수월히 이뤄졌다.
후식이 나올 무렵 기침을 몇 번 한 황제가 입을 열었다.
“레이디 클레어. 내게도 자네 같은 딸이 있다면 안심하고 눈을 감았을 텐데.”
“…….”
클레어는 자못 놀랐다. 답지 않게 마땅한 반응을 보이지 못한 그녀는 눈동자를 작게 굴려 이녹을 바라봤다. 마찬가지로 수심이 드리운 얼굴.
딸을 갖고 싶어 하는 아버지나 가정은 많다. 하지만 트라이하의 황실에는 이미 공주가 있다 죽었지 않았던가. 그것도 정치질의 희생양으로.
이아나 드 트라이하. 그녀의 죽음은 클레어의 한 철 흥밋거리였다. 죽음의 명확한 이유를 공개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인 죽음.
‘다들 황태자나 황제가 딸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게 새삼 억울하기라도 한가.’
아니, 클레어가 아는 트라이하 황실은 단연코 그렇게 물렁하지 않았다. 어쨌든 제국을 경영해온 수뇌들이 아닌가.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과거의 일을, 그것도 타국의 국민에게 언급한다면 그 이유는 하나.
‘그 공주가 죽은 게 앞으로 일어날 일과 관련이 있나 본데.’
공주가 굶어 죽었든 까무러쳐 죽었든 그것은 클레어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일과 관련지어진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골방에 갇혀 자란 세월의 힘일까. 타인의 심리를 읽는 데에 능한 클레어는 곧 말을 골라 내뱉었다.
“이타르 전하께서 공주님과 특히 사이가 각별하셨다 알고 있습니다.”
“……그랬지. 그 아이는 동생을 지키기 위해 황제가 되고 싶어 했으니.”
그래서 죽인 게 아니었던가. 황제의 기침 섞인 한숨은 클레어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차이엘드의 정보부는 마라바스와 깊은 관련이 있는 3황자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정보부는 인도주의나 윤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상대의 약점이 될 만한 것은 탈탈 털어 쥐고 있는 게 정보부의 일이었다. 그러니 클레어는 최선을 다해 이타르의 약점을 틀어쥘 생각이었다.
“이아나의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네. 자네라면 그 애가 왜 죽었는지 대충 들은 것이 있겠지.”
“……유감입니다.”
“자네가 알고 있는 사인이 무엇이든 트라이하의 황실은 이미 한 번 이타르를 위해 명예를 저버렸네. 하지만 두 번의 배려는 없을 게야.”
“…….”
“그런 상황이 온다고 해도 트라이하와 차이엘드의 우정은 유지될 수 있겠나?”
클레어는 문득 죽은 차이엘드의 첫째 아들을 떠올렸다. 그가 동생에게 칼을 대 계승 전쟁의 시작을 알리던 날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이타르가 딴생각을 하는 걸 황실에서 알아챘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차이엘드는 우아하게 각축전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제 몫만 챙기면 될 일이니.
“상대를 몰락시키려 들지 않는 한 우정은 유지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클레어는 찜찜한 기분을 느꼈다. 황실이 3황자를 위해 한 번 명예를 저버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 가지 않았다.
황궁에서의 저녁식사라는 트라이하 출장의 마지막 일정을 마친 그녀는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트라이하 황궁에서 나올 때만 해도 그녀의 태도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하지만 황궁을 빠져나와 대로변에 막 진입했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무슨 일이지?”
차이엘드의 마차 행렬이 급격히 속도를 늦췄다. 맞은편에서 트라이하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이타르가 귀국한 건가.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는데.’
클레어는 그의 귀국이 차이엘드의 수작 때문이라곤 생각지도 못하고 귀국을 재촉했다.
***
“전하. 클레어 님의 마차가 정문을 통과했습니다.”
내가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카일과 나는 식사를 마치곤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고용인들이 일개미처럼 궤짝을 줄지어 옮기고 있었다.
역시 내 최애. 유능하기로는 카일에게 안 꿇린다. 짧은 출장에 성과가 이만큼이나 따라오다니.
“언니! 잘 다녀오셨어요?”
“아멜…… 이 시간까지 기다린 거야?”
……라고 하기엔 아직 오후 여덟 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는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애의 미소를 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여독이 있을 클레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코델리아 일을 짚고 넘어가는 게 먼저인지라 우리는 양해를 구했다.
카일이 중간에 서신을 보낸 덕에 클레어는 대충 상황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보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 누구이다, 아니다를 판단할 수는 없는 일.
“선대 차이엘드 공작이 내다 버린 책들은 모두 별궁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예전 고용인들의 초상화와 신상 정보를 정리해둔 파일도 본 적이 있습니다.”
“정확한 위치를 아십니까?”
“잘 보지 않는 책이라 그것까진 잘……”
“언니, 혹시 그분의 얼굴을 아세요?”
“얼굴은 본 적 있어. 늙은 모습도 대충 어떤 모습일지 예상이 가.”
코델리아의 신상 정보가 기록되어 있는 책을 찾는다면 가장 좋겠지만 당장은 불가능했다.
나는 우선 아버지와 클레어의 의견이 일치하는지를 보기 위해 종이와 펜을 집어 들고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생긴 분이세요.”
“…….”
클레어는 말이 없었다. 나는 슬쩍 속마음을 읽어냈다.
「이게 사람이야 농작물이야?」
「직접 말하면 상처받을 테니 입 밖으로 내진 말자.」
……언니. 이미 상처받았어요. 미술학원을 다닐 걸 그랬다.
당장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나와 같았는지 카일이 펜을 넘겨받았다. 그래. 차이엘드 같은 명문가는 분명 어릴 때부터 교양 미술 교육을 받았을 터.
카일은 거침없이 펜을 움직였고 곧 클레어에게 그림을 내밀었다.
「……이번엔 해산물인가.」
클레어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래, 우리 남주. 어렸을 때부터 가문의 수장은 아니었지. 누나는 다 이해한다.
결국 별궁의 수많은 책들 중 한 권을 찾아낼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내 눈에 한 줄기 빛처럼 바네사가 들어왔다.
“바네사, 이리 와서 그 노파 얼굴 좀 그려 봐요.”
“네? 제가요? 그림 같은 거 그려본 적 없는데……”
내가 끈질기게 부탁하자 바네사는 결국 펜을 들었다. 그리고 결과물을 클레어에게 내밀었는데 드디어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코델리아 웨일. 내가 아는 모습보다 훨씬 늙었지만 그녀가 맞아.”
역시. 여자주인공은 예체능에 능하다는 게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