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나와 클레어, 카일은 구석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 벽에 나란히 기댄 채 짐을 푸는 고용인들을 바라봤다.
마라바스가 코델리아를 이용하고 있다는 확신은 막연히 갖고 있었지만 그녀를 실제로 보았던 클레어까지 동의하니 막막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일드 집사장님께는 어떻게 말씀드리지?’
그간 트라이하의 연금술사들이 낸 보고서에 의하면 코델리아가 마라바스와 이타르에게 이용당한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대체 언제부터 마라바스에게 정신을 지배당한 것일까. 둘의 만남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가 궁금했다.
“언니. 코델리아와는 언제부터 아는 사이였어요?”
“아는 사이라고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네. 코델리아는 아마 나를 모를 거야. 하지만 당시 차이엘드의 고용인들 중 코델리아 웨일을 모르는 이는 드물었지.”
“하일드 집사장님의 부인이라서요?”
“아니. 코델리아는 능력이 출중했어. 지금은 여자 기사들이 많아 딱히 구분해서 부르지 않지만 그땐 여기사라고 하면 바로 코델리아를 칭하는 거였어.”
코델리아는 내 예상보다 더 대단하고 입체적인 인물인 듯했다. 클레어는 옛일을 회상하듯 눈동자를 느릿이 굴렸다.
“차이엘드 저택에서는 하일드보다 먼저 일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해.”
“하일드 님은 기사단장이셨으니 자연스레 둘은 서로를 알았겠네요? 업무도 비슷했을까요?”
“차이엘드에서 그녀의 임무는 특별히 정해져 있었어. 지하실에 있는 아레테의 결정들을 지키는 것. 결정들이야 항상 같은 곳에 보관하니 딱히 이동 반경이 넓지도 않았지.”
“아레테의 결정을 지킨다면…….”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일전에 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가고일 백작을 보러 공작저의 지하실을 방문했을 당시, 안내를 부탁한 하일드 집사장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아레테를 보관했다던 방 한 곳을 계속 바라보고 계시긴 했어. 코델리아는 그 문을 지켜온 건가.’
이제야 집사장님이 보였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애틋한 눈길로 미루어보건대 집사장님은 아직 부인을 사랑하고 계실 터.
말없이 홀연히 사라졌다던 그녀가 악역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아레테의 결정을 지키던 그 기사님은 어쩌다 차이엘드 공작저에서 쫓겨나신 거죠?”
내 질문에 클레어는 천천히 팔짱을 꼈다. 아무래도 예전 일이라 잠시 떠올려 봐야겠다는 짧은 설명과 함께.
***
전날 저녁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해가 완전히 떨어지자 기분 나쁜 안개로 바뀌었다. 안개는 이끼와 덩굴에 반쯤 뒤덮인 클레어의 별궁도 피해가지 않았다.
‘날씨가 괜찮군. 오랜만에 외출이나 할까.’
살이 얼마 남지 않은 빗으로 머리를 빗던 클레어가 창밖을 보고 한 생각이었다.
긴 흑발을 마저 빗은 그녀는 녹이 슨 청동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살폈다.
하녀 못지않은 칙칙한 색의 드레스와 굽이 다 닳은 구두를 신었지만 차이엘드 특유의 수려한 외모는 빛을 잃지 않았다.
외출 준비를 마치듯 치마를 탁탁 털어낸 그녀는 누군가가 버린 것을 주워온 망원경을 들고 창틀에 걸터앉았다.
클레어의 별궁 입구는 항상 누군가가 지키고 있었고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런 방법으로 바깥을 구경하는 일을 외출이라고 불렀다.
볕이 강하지 않은 날은 망원경의 렌즈가 상대에게 잘 보이지 않아 들킬 염려가 적었다. 무슨 수작이냐며 불려가 추궁을 당할 확률 또한 낮다.
‘어디 볼까.’
클레어는 한쪽 눈을 감고 망원경으로 본궁을 훑어봤다. 이젠 실루엣만 봐도 누가 누구인지, 무슨 일로 그곳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도 차이엘드의 아들들을 충분히 살핀 그녀는 망원경을 거두려다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여기사가 왜 저러지?’
코델리아 웨일. 주요 관찰 대상도 아닌 그녀가 이상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같은 구역을 빙빙 맴돌다 불현듯 하늘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무어라 중얼거리기까지.
‘매일 지하실만 지키다 보니 미쳤나 보군.’
처음 공작저를 떠나는 코델리아를 봤을 때 클레어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떠난 뒤 공작저는 조금씩 달라졌다.
계승 전쟁이 갑자기 빠르게 돌아갔다. 모두가 욕망에 미친 것처럼 행동했으며 형제들은 곧 태어날 막내아들을 음해하려 벌써부터 수를 쓰고 있었다.
본궁의 모두가 저주에 걸린 것처럼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전과 달라진 것이라곤 코델리아가 차이엘드 성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 충격에 하일드가 긴 휴가를 냈다는 것뿐.
‘설마 그 여자가 아레테의 결정이 뿜어내는 힘의 부작용을 홀로 막고 있던 건가.’
호화로운 차이엘드의 본궁에 살육의 그림자가 드리웠다는 것을 클레어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기다리면 별궁의 클레어가 아닌 클레어 차이엘드가 될 수 있다.
‘……나도 자유로울 수 있어.’
그녀가 옅은 미소를 머금고 본궁에 있는 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기록하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다.
***
클레어가 꽤 오랫동안 말이 없자 나는 슬쩍 그녀의 마음을 읽어냈다.
「굳이 이런 어두운 장면까지 다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나는 다시 한번 코델리아 웨일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정말 그녀가 성에서 내쫓기기라도 한 것일까.
“반대야. 코델리아가 다른 고용인들을 내쫓은 쪽에 가깝지. 그녀의 의도는 아니었다고 해도.”
“무슨 뜻이에요?”
“코델리아는 한 번도 병가를 낸 적이 없어. 술도 멀리하고 운동이 취미. 주치의들도 그녀라면 백 살까지 살다 가겠다는 농담을 던졌지. 그렇게 건강하던 사람이 어느 날 미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떠는 거야.”
클레어는 별궁에 갇혀 자랐는데도 어쩜 본궁의 사정을 이렇게 잘 알까.
“미친 사람처럼요?”
“응. 허공에 대고 영문 모를 대화들을 소곤거리지를 않나, 갑자기 뭐라도 보이는 사람처럼 걸음을 옮기지 않나. 어깨에 무언가가 들러붙었다며 제자리에서 쿵쿵 뛰는 일도 가끔 있었어.”
“언제부터요?”
“정확한 시점은 모르겠어. 하지만 자잘한 부상이나 고통을 호소한 적도 없는 코델리아가 일순간 정신을 놓자 보던 사람들이 공포에 사로잡힌 거지.”
이건 무슨 맥락에서 한 말인지 알겠다. 빵빵한 보수를 지급 받는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이 한 차례 대규모 물갈이를 겪은 이유도 이 때문이리라.
‘그나저나 설명이 어딘가 익숙한데. 한국에서 말하는 신병이랑 비슷한 느낌이야.’
연금술사들은 코델리아의 몸이 주술과 아레테를 잘 받아들이는 것이 긴 시간 아레테의 힘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랜 시간 아레테의 결정을 지켰다면 영향을 받았다고 한들 이상하지 않았다.
“코델리아가 돌아버린 게 아레테의 결정 때문이라는 소문이 공작저를 휩쓸자 아무도 공작저에 남아 있으려 하지 않더라고. 지금 있는 고용인들은 대부분 코델리아 사건 이후에 들어온 사람들이야.”
“꽤 무시무시한 장면이었나 봐요.”
“……그랬지. 한쪽 다리를 바닥으로 끌면서 산발을 하고 걷는데 누가 안 무서워하겠어?”
클레어의 묘사를 듣고 있자니 섬뜩해 소름이 돋았다. 나라도 도망갔겠어.
“아무튼 코델리아 웨일은 몇 시간 만에 공작저에서 사라졌어. 실종신고를 포함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했는데도 찾지 못했지.”
“아…….”
“웬만하면 미동도 안 하는 선대 차이엘드 공작도 찜찜했는지 이후부터는 아레테의 결정을 독점 매매하지 않더라고.”
코델리아의 특이 행동은 그야말로 파급력이 대단했다. 마라바스 쪽에 붙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또 한 번 파문이 일겠지.
카일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대체 아까 낮부터 왜 이런 눈으로 보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클레어. 다이앤 경이 빠른 시일 내로 만나 뵙길 청하니 시간을 정해 제게도 알려주십시오.”
클레어에겐 그렇게 말하고 나를 힐끗 보는데 시선이 어딘가 애처로웠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클레어에게 감사를 표하기로 했다.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언니. 출장 다녀오셔서 힘드실 텐데 들어가서 쉬세요.”
“아멜…… 그렇게 힘들진 않으니 걱정 안 해도 돼. 정 그러면 내일 같이 차라도 마실래?”
차이엘드의 업무 강도 기준을 모르겠다. 이만큼이나 많은 출정 성과를 올렸으면서 힘들지 않다니.
저 멀리에서 개미처럼 움직이는 고용인들은 클레어가 함께 가져온 궤짝들을 아직 반도 옮기지 못했다.
일주일 출장에 저만큼 많은 수확물이 딸려 왔다고 말하면 누가 믿어줄까. 해적선을 털었다고 해도 이 정도로 호화롭진 않을 것 같았다.
“저것들은 다 뭐예요?”
“트라이하에서 가져온 것들. 황궁에서 의외로 순순히 연금술 연구 성과를 공유해주더라고.”
「돈을 조금 많이 쓰긴 했지만.」
「우리 아멜은 그런 거 몰라도 돼.」
「……이 중에 마음에 들어 하는 게 있을까 모르겠네.」
클레어는 피곤할 텐데 쉬겠다는 말도 하지 않고 나를 궤짝들 사이로 데려갔다. 눈빛을 본 고용인들이 영차 기합을 넣고 나무 뚜껑들을 열었다.
“우와……”
“아멜, 마음에 들어? 저번에 네가 갖고 싶다고 말했다는 걸 들어서 공수해온 거야.”
“여러 개가 같이 있으니 더 영롱하네요.”
나는 홀린 듯 상자 안의 약병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별을 퍼담은 듯한 이 액체들은 모두 아레테를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영약이었다.
바네사에게 얼추 듣기론 구입이 망설여질 정도로 고가라던데, 이런 걸 몇 박스나 아무렇지 않게 사올 줄이야. 역시 차이엘드다.
“아멜, 이것도 좀 볼래? 영원의 백합이라는 브로치야.”
“너무 예뻐요…… 꼭 녹지 않는 얼음 속에 보석이 갇혀 있는 것 같아요. 이건 무슨 성능이 있길래 연구 자료로 가져오신 거예요?”
“응?”
클레어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연구 자료?”
“네. 트라이하의 로열 알케미스트들에게 사오신 거 아니에요?”
카일이 연금술사들에게 엄청난 예산을 배정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연구비로 이 많은 것들을 다 살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내가 궤짝들을 훑어보며 그 가격을 어림짐작하고 있을 때, 클레어는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풋 웃었다.
“아멜, 여기에 있는 것들은 전부 너한테 주는 출장 선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