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나는 클레어가 폭탄처럼 떨군 어마어마한 선물들을 보며 입을 벌렸다. 이 많은 선물들을 운반하는 데 든 돈만 해도 내 1년 소득이랑 맞먹을 텐데.
구경할 엄두를 못 내고 입만 작게 벌리니 클레어의 눈짓을 받은 고용인들이 아예 내게 선물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누나 님! 이 옷감은 트라이하 최고의 방직 장인이 1년에 단 열 필만 생산하는 물건입니다!”
“아니, 그런 귀한 물건을 제가 열 필 전부 가져도 되는지……”
어느샌가 나는 이름 모를 가구 장인이 만든 원목 의자에 앉아 최고급 캐시미어 담요를 덮은 채 하나하나 소개되는 선물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사치품들 다음으로는 트라이하의 로열 알케미스트들이 개발했다던 마도구들의 차례였다.
“누나 님! 이 펜은 머릿속의 문장을 그대로 글로 옮겨주는 자동 필기 깃털펜입니다!”
“와……”
21세기에 대한민국에도 없던 물건들이 여기에 다 있었다. 내 옆에 리본이 달린 상자들이 쌓여갈 때마다 클레어는 흡족한 얼굴을 했다.
애타는 일이라도 있는지 어딘가 전전긍긍하는 얼굴을 한 카일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아멜, 이게 내 마지막 선물이야.”
클레어가 아주 작은 상자를 내밀며 말한 건 대략 한 시간 후였다. 그녀가 직접 소개할 정도의 선물이라니 벌써 긴장되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리본을 풀었다. 그러자 찬란히 빛나는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목걸이는 여러 단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밤하늘에 뻗치는 번개에서 영감을 얻은 듯 큰 줄기에서 잔가지들이 뻗어 나오는 디자인이었다.
목선이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착용한 다음 햇빛이라도 받는다면 인간 샹들리에가 될 만한 물건.
그간 봐 왔던 행동으로 미루어볼 때 내게 이 목걸이를 손수 걸어준 다음 초상화 화가를 불러들이는 것이 클레어의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내 목에 화려한 목걸이를 걸어두는 대신 보석함 뚜껑을 다시 덮고 리본을 꽉 조이게 묶었다.
작은 상자가 다시 포장된 채 내 손에 얹혔다. 클레어는 내게만 들릴 정도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멜, 이 섬광의 뿌리는 네가 진짜 위급할 때 사용하도록 해.”
“사용이라면…….”
나는 클레어가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나저나 선물의 양이 너무 많았다. 차이엘드 공작저에 머무르며 나름 간이 커졌다고 자부했건만.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던 내게 여태까지 얌전히 지켜보기만 하고 있던 카일이 다가왔다. 그새 뭔가를 마셨는지 달콤하고 깔끔한 향이 났다.
“누나. 선물을 보관할 별궁을 하나 선물해도 되겠습니까.”
“음…… 그건 안 돼요. 마음만 받을게요.”
부담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내가 감당 못 할 수준이니. 늘 하던 대로 단호하게 거절한 다음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려는데 카일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소싯적 내가 다이앤 백작저로 도망갔을 때나 보였던 얼굴. 돈지랄을 막은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건만 왜 이렇게 충격을 받는 것일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 슬쩍 다가가 손을 잡았건만 왜인지 라디오 잡음 같은 소리만 들려왔다. 설마……
‘클레어가 가져온 아레테가 안 듣는 물약을 마신 것 같은데. 왜 그랬지?’
아무래도 내 약혼자께서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이타르는 발코니에 서서 술잔을 기울였다. 흐드러지게 핀 백합들이 바람에 한들거리며 향기를 사방에 풍겼다.
트라이하 황실을 상징하는 꽃은 장미였다. 때문에 오래 전부터 황실과 혈연 관계를 맺어온 고위급 귀족 가문들의 문장에는 모두 작든 크든 장미가 들어 있었다.
황태자로 책봉된 1황자와 그의 어머니 또한 갖은 색의 장미가 피어나는 정원에서 우아한 몸가짐과 미소로 차를 마시곤 했다.
하지만 이타르와 이아나의 친어머니는 고위급 귀족이 아니었다. 그녀의 가문에는 장미 대신 고아한 백합이 박혀 있었다.
‘……이아나.’
이타르는 백합 한 다발을 받고 환히 웃던 누이동생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이에게 가문을 상징하는 꽃을 받아 배로 행복하다고 했다.
닳을세라 꽃을 품어 안고 수없이 향기를 들이마시던 모습이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생생하다. 이타르는 무심결에 손을 뻗었다.
손끝에 감도는 것이라곤 서늘하고 차분한 밤공기뿐이었다. 아무것도 잡지 못한 손이 여동생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리우십니까.”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마라바스가 물었다. 이타르는 가만히 백합 정원을 눈에 담으며 말했다.
“그립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
“공주님께서는 이 백합 정원을 가장 좋아하셨지요.”
“그대는 황궁에서 쫓겨났으면서 공주에 대해 꽤 잘 아는군.”
“……공주님께서도 연금술에 관심이 많지 않으셨습니까. 제게도 가끔 연금술을 가르쳐달라 조르셨습니다.”
“코앞의 현상이 연금술인 줄도 모를 만큼 재능이 없었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타르는 픽 웃었다. 영약 제조에 실패해 머리카락 끝이 다 타버렸다며 투덜대던 누이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머지않아 그 아이의 앙갚음을 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자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조만간 아버지와 황태자도 눈치채겠지. 이미 알고 함정을 파 놓았을 수도 있고.”
“만일 거사가 실패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리의 목적은 정권을 얻는 것이 아니라 트라이하 황실을 무너뜨리는 것이니 실패할 리 없다.”
더군다나 차이엘드를 끌어들이는 일이다. 몸집이 거대한 트라이하와 차이엘드가 원한 관계로 얽힌다면 둘 중 하나의 승리나 패배라는 깔끔한 결말로 끝나지는 못하리라.
승리자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원망하고 패배자는 모든 것을 잃어 비통해할 싸움. 두 가문이 맞붙는다면 한차례 피바람이 부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차이엘드의 피앙세인 아멜리아 다이앤을 트리이하의 황자인 내가 건드린다면 파문이 일겠지.”
“그녀를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녀의 아레테는 유용하다. 네가 개발한 코델리아의 힘과 조합해 유용하게 사용한 다음 죽일 생각이다.”
“…….”
“그렇게 한다면 그 여인은 백합 훈장 수여식에서 보인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겠지. 차이엘드의 괴물은 분노의 화살을 트라이하 쪽으로 겨눌 테고.”
“괴물이라…….”
“괴물이 아닌 차이엘드 공작은 까다롭다. 그를 내 욕망대로 이용하려면 다시 괴물로 만드는 게 옳아.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을 빼앗는 게 가장 빠르겠군.”
“전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타르는 여전히 탐스러운 백합들을 눈에 담느라 한 발자국 뒤에서 답한 마라바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
차이엘드 공작의 집무실에 들어선 연금술사들은 일평생 본적도 없는 화려한 장식물들을 보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반면 하일드를 대신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차이엘드 소속의 고용인들은 초긴장 상태였다. 집무실에선 늘 무표정을 유지하던 주군이 왜인지 미세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선 차이엘드의 깊은 신뢰와 무한한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이것을 보시지요.”
연금술사들은 카일의 책상 위에 두툼한 보고서를 한 부 내려두었다. 그들이 오늘 이곳에 방문한 것은 코델리아에게 걸린 주술들을 드디어 해독했기 때문이었다.
“주술은 무척 세밀하고 어렵습니다. 보안 주술만 수십 개가 걸려 있어 지금 당장은 따라 하거나 주술을 해제할 수 없습니다만 시전자가 누구인지는 알아냈습니다.”
아멜에게 해를 끼치려던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냈다는 소식에 카일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미리 짐작한 대로 마라바스 라이델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전하. 고용하신 연금술사들 중 그와 한 연구실에 소속되어 일하던 자들이 여러 차례 확인했습니다.”
“그가 쓰는 주술의 형식이 상당히 특이한 것 같던데.”
“보통 연금술 주술은 광물을 매개로 사용하는데, 마라바스는 생물을 매개로도 주술을 능히 사용했습니다. 일전에 누나 님께 날려온 것도 미세한 모래에 마수를 가둔 가루들이었지요.”
모든 것이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증거가 나왔으니 여태껏 모르쇠 하던 트라이하 황실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리라.
카일은 수를 읽듯 가만히 손끝을 움직이며 생각에 잠겼다.
이타르와 마라바스가 코델리아를 이용해 대체 뭘 하려는지 대충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브루노와 레이디 클레어가 반역의 조짐에 대해 언급한 게 이것 때문이군.’
마침 반역을 일으키기 딱 좋은 날짜인 이아나 공주의 기일도 얼마 남지 않았다.
트라이하의 황태자 세력과 3황자 세력은 정권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카일은 이타르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았다.
이타르는 동생의 죽음과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처단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문투성이인 공주의 죽음에 대해 알고 싶어 하리라.
‘코델리아를 이용해 마라바스의 주술과 아레테를 증폭시킨다면 더 많은 이들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을 테니 반역은 수월하겠군.’
하지만 정신 지배는 공주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파악하기에 가장 적합한 아레테가 아니었다. 카일은 과거의 일을 들추는 데 가장 유용한 아레테를 잘 알고 있었다.
“……제 약혼녀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줄곧 건조한 표정을 하고 있던 그가 다급한 어조로 묻자 지척의 사람들이 모두 긴장했다.
“그것이…… 잠시 중앙 시장으로 외출을 나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중앙 시장?”
왜일까. 중앙 시장에서 멀지 않은 하일 타임스의 건물이 떠올랐다. 숱한 밤 핥아내며 의아해했던 잉크가 묻은 그녀의 손가락도.
이전처럼 그녀를 의심할 생각은 없었다. 흘리듯 말하긴 했어도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다만 오늘은 그간의 숱한 외출들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아내고 싶었다.
“그리 갈 테니 채비하십시오.”
카일은 그곳에서 어떤 말을 듣게 될지 전혀 예상치 못한 채 명했다.
***
하일 타임스의 사장 프링글스는 콧수염의 모양을 잡으며 실내의 화분에 물을 주는 중이었다. 이파리 위의 먼지를 정성스러운 손길로 닦아내는 지금, 그의 기분은 단연코 최상이었다.
‘앤 양이 먼저 도움을 청하다니. 그만큼 나를 신뢰한다는 것일까.’
방금 전, 프링글스는 오늘도 망토를 쓰고 온 앤 스미스에게 부탁받은 자료들을 내주고 돌아왔다. 그녀를 새로 지은 별채의 개인 사무 공간으로 안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옥을 넓힐 수 있던 것도, 꿈에 그리던 <트라이하 타임스>를 막 찍어내기 시작한 것도 모두 그녀의 덕이었다.
‘앤 양이 계속 우리 신문사에 머물러준다면 개인 집필실도 지어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이름과 성별뿐이었지만 프링글스는 거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앤 스미스라는 전설을 동경하며 마구잡이로 찾아온 상인들의 딸들과 하급 귀족의 영애들 덕에 하일 타임스 사옥 한편에는 작은 경제학 교실까지 생기지 않았던가.
‘내가 귀인을 만났어. 이제 예상치도 못한 누군가가 난입하지만 않는다면 하일 타임스는 순항할 테지.’
그가 입꼬리를 둥글게 말아 올리며 흐뭇하게 웃을 때였다. 아래층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관리인이 허겁지겁 문을 두드렸다.
“사, 사장님. 손님이십니다.”
“손님? 오늘 일정은 없는 걸로 아는데?”
“그것이…… 아, 아무튼 꼭 만나주십시오!”
프링글스는 후다닥 달아나는 직원의 뒷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웬 금화가 빵빵하게 들어차 있었다. 직원의 일 년 급료와 맞먹는 액수에 넋이 나가기를 잠시.
프링글스는 두르고 있던 검은 망토를 찬찬히 벗으며 걸어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키가 훤칠하고 몸이 탄탄한 청년은 기자 지망생 같지는 않았다.
“프링글스 샤르테 사장. 미리 알리지도 않고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
프링글스는 자연광 아래 완전히 드러난 손님의 얼굴을 보곤 입을 쩍 벌렸다. 같은 남자임에도 홀릴 듯한 조각 같은 얼굴보다도 망토 안쪽으로 드러나는 익숙한 문양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일 제국의 국민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방패 위의 앞발을 든 사자.
“내 아내가 될 사람이 이 건물에 있는 것 같아서.”
카일리안 차이엘드의 차가운 목소리가 프링글스를 얼어붙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