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프링글스의 눈동자가 눈에 띌 정도로 떨렸다. 다리 또한 후들거리긴 마찬가지. 차이엘드 공작을 마주한 사업가라면 누구나 이런 반응이었다.
“아, 아내 되실 분이라면…….”
“아멜리아 다이앤 백작. 신문사의 사장인 그대가 그녀를 모를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군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맹세코 저는 다이앤 백작을 실제로 뵌 적이 없습니다. 믿, 믿어주십시오.”
차이엘드 공작에게 단번에 압도당한 프링글스는 일면식도 없음을 재차 강조했다. 그녀라면 하일의 정치, 경제, 외교의 화제 인물이 아닌가. 연이 닿을 리가 없었다.
“제 생각엔 이곳에 있는 것 같은데.”
“맹세코 없습니다! 제가 차이엘드의 피앙세를 숨겨드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프링글스는 콧수염까지 들썩이며 다급히 항변했다. 카일은 바람을 타고 코끝을 간질이는 향을 맡곤 표정을 굳혔다. 이건 일전부터 외출을 마치고 온 아멜이 폴폴 풍기던 향이었다.
일전에 제게 향수를 선물해줄 당시에도 이 향이 났다. 눈앞의 남자가 풍기는 남성용 향수 냄새.
“…….”
문득 얼마 전 바네사가 펼친 신문의 뒷면에 있던 <바람피우기 좋은 날>이라는 소설의 광고가 떠올랐다.
기억은 그를 놀리기라도 하듯 신분 위장용 망토와 잦은 외출, 바네사가 수시로 태우던 편지봉투들을 차례로 보여주었다.
그 모든 것들이 퍼즐처럼 턱턱 들어맞았다. 카일은 지끈거림을 참기 위해 주먹을 꼭 쥐곤 눈앞의 남자를 훑어봤다.
통통한 곰인형을 그대로 사람으로 만든 듯 눈앞의 남자는 동그란 인상이 무척 귀여웠다. 단추 같은 눈이나 말려 올라간 수염도 찰떡같이 어울렸다.
‘귀여운 걸 좋아하시니까…….’
귀여움으로 승부하자면 완패. 하지만 누나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눈앞에서 말한 적은 침대 위에서밖에 없었지만.
‘설마……’
카일은 딛고 있는 바닥이 파사삭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 스치듯 ‘사랑해요’하고 말하던 것들이 죄다 내 몸을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겠지.
아니, 사실은 아멜이 물리적인 자극과 욕망에 약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점을 이용해 사랑받으려 운동량을 늘리고 숱한 밤 맨몸으로 덤비지 않았던가.
‘그럴 리 없어.’
곧 그의 약혼녀 한정으로 무한히 긍정적인 사고가 고개를 들었다. 사람은 몸과 마음으로 이뤄진 존재가 아니던가. 몸을 사랑한다는 건? 존재의 절반이나 사랑한다는 소리다.
“공작 전하. 저…… 일단 여인들이 모여 있는 별채로 안내해드릴까요?”
“…….”
카일은 심각한 얼굴로 긍정을 표했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심장이 터질 듯 쿵쿵 뛰었다.
***
프링글스 사장님이 모아다 준 자료를 꼼꼼히 정독한 나는 기지개를 켜며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커다란 창문으로 따사로운 볕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채광 좋고, 사무실 넓고…….’
1층에서 잠깐 마주한 소녀들의 수다에 의하면 별채에 단독 사무실이 있는 건 나뿐이라고 했다. 이번 일만 마무리하면 칼럼 일에서 손을 뗄 생각인데 이런 배려를 해주니 조금 죄송했다.
‘자료도 이렇게나 많이 구해다 주시고.’
내가 프링글스 사장님께 부탁드린 건 두 가지였다. 코델리아가 차이엘드 공작저를 떠났을 때, 그리고 이아나가 죽었을 때의 사건이나 반응들.
언론직에 오래 종사해오신 분이라 지인 기자들이 많았고 스크랩해둔 신문도 많았으니 이 정도 결과물이 나온 것이리라.
“마님. 뭐 건진 자료라도 있으세요?”
“딱히 새로운 사실을 알아낸 건 없어요. 코델리아와 하일드 집사장님이 처음엔 칠천지원수였다는 것 정도?”
“그런데 어떻게 결혼을 하셨대요?”
“하일드 님이 차이엘드 공작저에서 일하기로 결정되었을 때, 이미 공작저의 일원이었던 코델리아가 결투를 신청했나 봐요.”
“아, 하일드 집사장님이 깔끔하게 승리하셔서 그 모습에 반하신 건가?”
“아뇨. 집사장님의 완패였어요. 일주일 동안 골골 앓으시니 코델리아도 미안해서 돌봐주다가 사랑이 싹텄나 봐요.”
기자들은 어떻게 이런 정보들을 수집하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뭐, 아멜리아 금광 사건을 생각하면 기자들이 온갖 정보에 욕심을 낸다는 건 잘 알겠다.
‘문제는 이타르와 이아나인데.’
나는 잠시 덮어둔 서류철을 힐끗 바라봤다. 트라이하의 계승 전쟁 당시 자료들이 저 파일 안에 모두 들어 있었다.
1황자와 대립하던 3황자. 그리고 두 파벌로 갈라져 맹렬히 대치하던 귀족과 문무대신들. 때마침 죽은 공주와 무너진 이타르. 승기를 거머쥐고 계승자가 된 1황자 이녹.
‘모든 게 너무 착착 들어맞아서 오히려 이상해.’
이타르가 계승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에 누이동생을 자유롭게 다니도록 놔두었을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제 사람들과 같이 다니도록 했을 텐데.
그렇게 했음에도 동생이 갑자기 죽었다면 눈에 불을 켜고 그 이유를 찾으려 했을 것이다.
이타르의 지지세력도 만만찮으니 내가 이녹이라면 윤리적 결함을 만들지 않으려 더욱 필사적으로 암살 의혹을 부정했을 터.
하지만 이녹과 황제는 어떠한 반론도 제기하지 않고 이아나를 암살했다는 의혹을 받아들였다.
‘일부러 저항하지 않은 느낌이야. 왜 그랬을까?’
내가 모르는 또 다른 거대한 진실이 숨겨진 기분. 곧 있을 리엔과 베르드의 약혼식에 이녹이 트라이하의 대표로 참석한다니 사람을 붙여두는 게 좋겠다.
물론 가장 나를 찜찜하게 하는 것은 서류철에 몇 번 등장한 마라바스 라이델이라는 이름이었다.
“바네사. 마라바스가 왜 트라이하에서 하일로 넘어왔는지 알아요?”
“음…… 원래 로열 알케미스트였는데 모종의 이유로 해고당했다고 들었어요. 하일에서 처음 만났을 땐 거지나 다름없었죠. 갑자기 그건 왜요?”
“타이밍이 너무 절묘해요.”
자료들을 펼쳐 놓고 비교 분석한 결과 이아나가 죽은 시점과 마라바스가 로열 알케미스트 자리에서 잘린 시점이 일치했다.
마라바스는 세계제국을 건설하고 싶어 했고 이타르는 그의 능력이 필요했다. 긴밀한 공생관계라 둘을 찢어놓는 건 상당히 어려웠을 텐데 황제와 이녹은 결국 마라바스를 내쳤다.
‘단순히 이타르의 측근을 잘라버리려 한 것 같진 않아. 이타르가 그렇게 놔두지도 않았을 테고.’
마라바스가 제 발로 트라이하를 떠나게 된 계기가 공주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 머리 아파.”
“당 떨어지신 거예요. 아래에 카페테리아가 있던데 뭐라도 드시고 오시겠어요?”
“그럴까요?”
“먼저 가 계세요. 자료 정리해서 종이로 꽁꽁 포장한 다음 따라갈게요.”
그간 너무 부려먹은 것인지 바네사는 능숙하게 자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먼저 가서 주문하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아 계단을 내려왔다.
별채의 1층에는 직원과 방문객이 쉬었다 갈 수 있는 카페테리아가 있었는데, 망토를 뒤집어쓰고 내려가니 다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시원한 레모네이드 두 잔과 마들렌으로 부탁드릴게요.”
“네. 저쪽에 잠시 앉아 계시면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나는 잠시 앉아 오늘자 신문을 읽었다. 얼마 남지 않은 하일과 켈트만의 약혼식 기사가 거의 대부분이었고, 최근 누군가가 수도의 공동묘지를 파헤치고 있다는 오싹한 기사가 몇 개 있었다.
지루함을 느낄 무렵 카페테리아 직원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약혼식 날 불꽃놀이가 벌써 기대되네요.”
“황제 폐하는 소문처럼 기골이 우람한 미남이시겠지요?”
아무래도 누가 헛소문을 퍼트리나 보다.
카페테리아의 직원인 듯한 여인들은 약혼식과 관련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눈을 빛냈다. 머지않아 내 이름이 들렸다.
“아멜리아 다이앤 백작이 둘의 약혼을 추진한 공로로 백합 훈장을 받았다고 했죠?”
“네. 안 그래도 아까 영애들이 요즘 대세는 연하남이라고 하더라고요. 다 다이앤 백작을 보고 따라 하는 거죠.”
여기까지는 들을 만했다.
“연하의 남자는 애 키우는 것 같을 텐데. 뭐 하나 제대로 하긴 할까요?”
“매력은 역시 중후한 남자들이 최고죠. 어린 남자를 뭐에다 쓰겠어요?”
“연하남은 남자라고 하기엔 좀……”
“자제력도 없고, 시간관념도 없고.”
내 이름이 여러 번 나오니 그냥 넘어가긴 싫었다. 나는 고아한 몸가짐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한 마리 나비 같은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자고로 이런 상황에서 ‘아니거든요! 연하가 최고인데요!’ 하는 건 하수. 나는 하품을 하는 척 입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혹시 초콜렛이 있으면 추가로 주문할 수 있을까요? 어젯밤에 잠을 못 자서 영 피곤하네……”
열흘 밤낮을 지새운 것처럼 피곤에 쩔어 있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녀들이 흠칫 놀라 물었다.
“접시에 담아서 같이 내 드릴게요. 그런데 왜 잠을 못 주무셨어요? 무슨 일이라도?”
“나이 어린 남편이 있는데 자꾸 밤에…… 어휴. 연하남은 시간관념이 없다는 말이 사실인가 봐요.”
툭.
마른행주로 그릇의 물기를 훔치던 여인들이 일제히 내 쪽을 바라봤다. 더 말해보라는 듯 흥미 어린 눈길이었다.
“하지만 연하는 좀…… 일관성도 없지 않나요?”
“그렇긴 해요. 상체는 다정한데 하체는…… 일관성이 없어, 일관성이. 인내심도 종잇장 같아서 멈출 줄을 모르더라고요.”
주르륵―
찻물을 잔에 따르던 직원 하나가 찻잔이 넘치는 줄도 모르고 내게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연하는 아무것도 모를 것 같아요.”
“하…… 그런 면이 조금 있긴 하죠. 아무것도 몰라서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준다니까요. 제가 원하는 것밖에 모르니까.”
어디선가 탄내가 난다 했더니 오븐에 잠시 데우고 있던 마들렌이 숯덩이가 되고 있었다. 역시 까는 척하면서 자랑해야 제맛.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는데 레몬 반쪽을 짜내고 있던 직원이 조심스레 말했다.
“하지만 밤만 보고 결혼하는 건 좀……”
“어휴. 아니죠. 전 어린 남편이 다정하고 귀여워서 좋아해요. 얼마나 사랑스러운데요. 이것저것 새로운 것도 자꾸 해주려고 하고. 웃을 때마다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아……”
“혈기왕성한 것만 보고 결혼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죠.”
계속 그렇게 해대다간 죽을 텐데.
나는 허세 가득한 동작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설설 저으며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그건 그렇고, 죄송한데 카페인 듬뿍 들어간 커피도 추가할 수 있을까요? 오늘 밤을 위해서 미리 한 잔 마셔둬야 할 것 같아서.”
찡긋 뻔뻔하게 웃은 건 나인데 왜인지 사람들의 시선이 문 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귓전에 들려오는 낮게 깔린 목소리.
“누나. 두 잔 더 드셔야 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