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94화 (94/134)

#94

한편, 트라이하의 황궁에서 서신을 재차 확인하는 이녹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분노를 감추지 못하며 이를 으득 가는 아들에게 레오시스 2세가 말했다.

“이녹. 너무 노하지 말거라. 우리가 분노한다고 해서 좋아질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마라바스 라이델을 황궁에 숨겨줄 만한 자가 누구인지는 부황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공작의 요구는 마라바스와 노파를 찾아내 공국으로 인도하라는 것이잖느냐. 평정을 잃지 말거라.”

“하지만……!”

이녹은 책상 모서리를 으스러뜨릴 듯 세게 쥐었다. 황제와 황태자를 곤란하게 하는 서신은 차이엘드 공국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하일 제국의 황실 백합 훈장 수여식 당일 출몰한 마수들은 마라바스 라이델이라는 연금술사의 주술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는 분석 결과문.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마라바스는 현재 트라이하의 로열 알케미스트가 아니었으니.

하지만 마라바스 라이델이 현재 황궁의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객관적인 증거를 함께 제시하니 황궁은 할 말이 없었다.

이대로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한다면 주요 거래국인 차이엘드의 피앙세에게 수작을 부렸다고 인정하는 셈.

때문에 서신이 도착한 어제 저녁부터 황실은 쥐 한 마리를 잡기 위해 드넓은 황궁을 죄다 뒤엎는 중이었다.

“부황께서는 쉬고 계십시오. 저는 이타르에게 다시 한번 다녀와야겠습니다.”

“그 애를 너무 다그치지 말거라.”

이녹은 황제의 조언을 못 들은 척 이타르의 거처로 향했다. 그야말로 강도가 들었다고 해도 믿을 모습. 서랍과 옷장이 모두 열려 있었다.

“제 처소에는 어쩐 일로.”

“이타르. 지금이라도 마라바스가 어디에 있는지 불어라. 그리한다면 네 죄는 묻지 않으마.”

“그자와는 이아나가 죽은 후로부터 연이 없다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녹이 바드득 이를 갈았지만 이타르는 태연했다. 차이엘드의 정보부가 마도구를 이용해 입증한 것은 마라바스가 황궁에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황궁의 어디에 머물렀는지, 누구와 접촉했는지는 알 방법이 없는 상황. 때문에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마라바스와의 협력은 영원한 비밀로 남을 터였다.

“이타르. 네가 말하지 않으면 이 나라가 흔들린다. 차이엘드의 저력을 알지 않느냐. 동생의 기일이 다가와 돌아버리기라도 한 것이냐?”

“당신은 그 애의 죽음을 입에 담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만큼 공갈을 놓았으면 황태자답게 돌아가 거드름이나 빼십시오.”

“이타르. 적당히 해. 너는 세상에서 네가 제일 불행한 줄 아나?”

“적어도 당신보단 친동생을 잃은 내가 더 불행하겠지.”

두 사람의 시선이 팽팽히 맞붙으며 공기가 얼어붙을 때였다. 트라이하의 기사 하나가 후다닥 달려와 이녹에게 고개를 숙였다.

“전하. 마라바스 라이델을 발견했습니다. 정원의 관목들 사이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시신?”

이녹은 반사적으로 이타르를 바라봤다. 정말 마라바스와 관계가 없는 것인지 그는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고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노파는. 근처에서 공작이 말한 노파를 찾지 못했나?”

“예. 초상화와 닮은 노파는커녕 노인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알겠다. 곧 그리 가지.”

기사가 사라지자 두 형제 사이에 찬바람이 불었다. 이타르는 자신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녹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타르가 평소에는 하지 않는 종류의 행동인지라 이녹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괜한 의심 마시고 하일 제국 방문이나 준비하십시오. 외교가 중요한 때인 것 같으니.”

“……내가 없는 동안 허튼짓을 하겠다는 말로 들리는군.”

이녹은 다시 한번 그를 쏘아본 뒤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이타르는 의자에 느른히 기대앉을 수 있었다.

‘차이엘드 정보부가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군. 교외의 저택들을 대거 인수할 때부터 심상찮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연금술사들을 대거 포섭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이리도 공격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괴물 공작이 무언가를 지키려 들다니.

‘그녀의 마음이 제가 깔고 앉은 황금을 향한 줄도 모르고.’

계승을 거치는 것들은 모두 가련하다고 이타르는 생각했다.

***

하일 타임스 건물에 갑자기 나타난 카일이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는 헙 숨을 들이쉬었다. 지금 이 상황이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카일이 어떻게 여기에 있지? 아니, 망토를 썼는데 나인 건 어떻게 알았지? 다 들었나?’

일단 두 번째 물음의 답은 알겠다. 입구 쪽에서 또 다른 시선이 느껴진다 했더니 바네사가 고개만 빼꼼 내밀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슬쩍 보이는 주머니가 두툼했다. 네모진 것으로 봐서는 돈다발이나 금괴일 것이다. 대체 카일은 평소에 뭘 들고 다니는 것인가.

나와 대화 아닌 대화를 나누고 있던 카페테리아 점원들은 부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남편 자랑을 하시더니만…….”

“손님…… 어서 들어가 보세요.”

“커피는 네 잔 포장해드리면 될까요?”

그렇다. 카일은 망토의 모자를 벗은 상태라 얼굴이 드러났다. 나름 신분을 숨긴답시고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인 게 효과가 있는지 아무도 차이엘드 공작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곧고 높게 뻗은 콧대와 보고 있자면 사르르 녹을 듯한 눈웃음을 보며 ‘다 필요 없고 남자는 연하’ 하고 입을 틀어막을 뿐.

“어, 어떻게 왔어요?”

“누나가 보고 싶어서 걷다 보니 이리로 오게 되었습니다.”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것 좀 보게. 카일은 바네사에게 내가 주문한 것들을 적당히 처리하도록 시킨 다음 나를 번쩍 안아 어깨에 들쳐 멨다.

나는 필사적으로 버둥대며 내려달라고 했지만 귓등으로도 안 듣는 눈치였다. 표정도 묘하게 굳어 있어 꼬리가 절로 내려갔다.

활어처럼 팔딱거리던 나는 곧 입을 쩍 벌린 프링글스 사장님과 마주할 수 있었다. 바다가 둘로 갈라지는 모습이라도 본 듯 아연실색하는 모습.

손을 쭉 뻗어 잠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 그, 그렇다면 앤 스미스 양이…… 그 다이앤 백작?」

「세상에…… 범상치 않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프링글스 사장님은 카일이 나를 마차에 실을 때까지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어지간히 충격을 받으신 듯한데.

공작저로 돌아가는 내내 카일은 나를 꼭 껴안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상황이 조금 나을 테지만 마차에 타자마자 약혼반지를 뺏겼다.

나는 취급이 까다로운 짐짝이 된 기분으로 공작저까지 품에 안겨 있었다. 그의 방으로 향하는 복도에서야 바닥을 밟을 수 있었다.

“카, 카일. 우리 말로 할까요? 그동안 숨긴 건 미안해요.”

“말로 하는 대화는 내일 아침 즈음부터 천천히 해도 될 것 같은데.”

“아니, 뭐 그리 설레는 대사를…… 이게 아니지. 미안해요. 진심이에요.”

“아까 왜 그런 식으로 말씀하셨습니까.”

망했다. 내가 한 말들을 다 들었나 보다. 카일 입장에서는 기분이 충분히 나쁠 수도 있는 대화였다.

손을 착 붙이고 싹싹 빌려는데 카일이 나를 바닥에 내리곤 벽에 등을 대게 했다.

나보다 키가 훨씬 큰 탓에 카일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기가 죽은 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곤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카일, 미안해요. 화가 풀린다면 뭐든 할……”

“왜 남들 앞에서 자랑할 때만 남편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네?”

“제 앞에선 한 번도 그렇게 불러준 적 없으면서.”

고개를 휙 들자 발그레 달아오른 뺨과 귓가가 눈에 들어왔다. 진심으로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이라 내 가슴이 다 간질거렸다.

“누나가 말했던 어린 남편은 저를 말하는 게 맞습니까.”

“……다른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설마 어디서 또 이상한 책 제목 같은 걸 보고 와서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죠?”

“…….”

“제 사랑을 자꾸 의심하지 말……라고 하기엔 의심받을 만한 짓을 하긴 했죠. 미안해요. 하지만 카일이 눈앞에 있으면 다른 사람은 안 보여요. 오히려 불안한 건 저라고요.”

시선이 차츰 뜨거워졌다. 카일은 내가 푹 눌러쓰고 있던 망토를 순식간에 벗겨 바닥에 던져버리고 그대로 입 맞췄다.

배운 대로 착실히 실행에 옮기는 게 또 내 약혼자의 특장점 아니겠나. 카일은 공기를 한 입, 한 입 베어 무는 것처럼 다정하게 키스했다.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고 맞비빌 때면 그의 망토 깃을 꼭 휘어잡을 수밖에 없었다.

제일 미치겠는 건 숨이 가쁠 정도로 날 몰아세우다가 행복해 죽겠다는 듯 웃는 행동이었다. 카일은 나를 무릎에 앉혀 꽉 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은 아무도 속마음을 읽을 수 없으니 말로 해 줬으면 좋겠는데.”

“……제가 왜 하일 타임스에 갔는지는 안 물어볼 거예요?”

“아내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의심할 정도로 집착하진 않습니다. 의처증 환자도 아니고.”

“하일 타임스까지 따라와 놓고 그런 소리를 하면 누가 믿어요, 이 남자야.”

“앤 스미스는 믿을 것 같은데.”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스파이들이 정체를 들키면 이런 기분일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였는데, 카일은 픽 웃으며 손깍지를 꼈다.

“그녀가 차이엘드에 우호적인 줄로만 알았지 제 피앙세일 줄은 몰랐습니다.”

“……미안해요.”

“지금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뭔지 정확히 알고 계셨으면 좋겠는데.”

붉은 눈동자가 맞닿은 것처럼 나를 응시했다.

“곧 부부의 연을 맺을 제게 비밀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라고 대답해 주십시오. 누나의 남편이 될 제게 숨기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은 저뿐이라는 대답이 듣고 싶습니다.”

나는 카일의 양 뺨을 손으로 꼭 감쌌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원하는 모습조차 사랑스러워 이제는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이 남자의 끝이 파멸로 정해져 있다면 나도 함께 파멸하고 싶다. 나는 이 사람 없이 하루도 살지 못한다. 이젠 혼자 시간을 보낼 때조차도 카일이 필요했다.

“사랑해요, 정말로. 카일이 무슨 음험하고 불길한 짓을 한다고 해도 이젠 놔주기 싫어요.”

“…….”

“……이렇게 말할 거 예상하지 않았어요? 왜 그렇게 놀라요?”

여태까지 숨 쉬듯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면서 정작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니 낯간지러운가 보다. 아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인 것 같기도 했다.

카일은 제 다리 위에 앉아 있던 나를 안고 옆으로 몸을 뉘었다. 마주 보고 누워 있는 일이야 수백 번도 더 있었지만 지금은 기분이 조금 달랐다.

그가 몸을 일으켜 차츰 내 위를 점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다리가 움직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웃지 말아요. 계속 웃으면 가슴이 저려서 미칠 것 같단 말이에요.”

“예전 같았으면 도망가느라 바빴을 다리가 제 허리에 감기는 게 좋아서.”

카일은 내게 짧게 입 맞추곤 사심 가득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정말 제가 무슨 음험한 짓을 해도 사랑하는지 확인해보고 싶은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