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95화 (95/134)

#95

아멜은 몸을 움찔 떨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자정은 넘은 지 오래였으니 이대로라면 동이 틀 때까지 잠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베개를 그러쥐던 손을 아래로 내려 카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땀에 젖어 얼굴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이 마냥 섹시하게 느껴졌다.

“카일……”

평소대로라면 슬슬 잠을 자자는 뉘앙스의 말에 밥그릇을 빼앗긴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아쉬워했을 그였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깨달아버린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이전보다 더 위험한 짐승이었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손등으로 축축이 젖은 입술을 훑었다. 아멜은 그 관능적인 얼굴을 내려다보며 숨을 잠깐 멈추었다.

흥분에 젖어 불그스름해진 눈가가 가늘게 휘었다. 붉은 눈동자는 세상의 어떤 보석보다도 매혹적인 자태를 자랑했다.

“조금만 더.”

카일은 나른한 동작으로 아멜의 손마디마다 입을 맞추었다. 약혼녀에게 정성스레 봉사하는 것은 그의 기쁨이었다.

막강한 유혹에 전의를 상실한 아멜은 픽 웃으며 팔등으로 눈가를 가렸다. 지금 카일은 어떤 짓까지 용인할지 제 사랑을 시험하는 중이었다.

“잠 안 재워도 사랑하니까 걱정 말아요.”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그가 한참 아래에 있던 몸을 일으켜 이마에 꾹 입을 맞췄다. 이런 식의 대화가 벌써 몇 시간째인지.

카일은 아멜의 숨을 일부러 턱 끝까지 차게 해놓곤 달콤하게 눈을 맞춰왔다. 그녀가 그래도 사랑한다고 말하면 행복감에 젖어 피가 끓었다.

사랑을 확인받고, 시험하고, 다시 확인받는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

차이엘드의 충직한 집사 하일드 웨일은 요즘 업무 배제 상태였다. 이유는 그도 몰랐다.

분명 무언가를 잘못한 기억이 없는데 주군께서는 자꾸 정원을 돌보라, 편지를 분류하라, 하는 뜬금없는 명만을 내렸다.

마수를 풀어 누나 님에게 위협을 가한 노파를 하루빨리 잡아들여도 모자를 판에 자꾸 이상한 일만 시키니 일 중독 집사장의 인내력은 한계에 다다랐다.

오늘 주군의 명은 화사한 장미꽃 다발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정원사가 열 명도 넘게 고용되어 있건만 굳이 자신에게 이 일을 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나 님께 드릴 꽃다발이니 특별함이 필요하셨나 보군.’

스스로를 사랑꾼이라 자부하는 하일드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하곤 꽃을 갈무리했다.

한 마리 땡벌이 된 기분으로 탐스러운 꽃을 쫓아 걸음을 옮기던 그는 얼마 후, 별채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꿍얼거림을 포착했다.

“연금술사들을 떼거지로 고용해서 뭘 시키나 했더니만……”

“우리야 좋지, 뭐. 괜히 돈이 남아도는 집안이 아니잖나.”

잠깐 쉬는 시간을 갖고 있던 그들은 트라이하에서 고용해온 연금술사들이었다.

물론 차이엘드 스타일대로 종신계약이었으며 발로 뛰어 그 계약을 체결한 건 하일드 집사장이었기에 안면이 있었다.

연금술사들은 아름다운 꽃을 찾아 팔랑팔랑 정원을 거닐던 집사장을 다소 어이없단 눈으로 보다 인사를 건넸다.

“웬 꽃을 그렇게…… 공작 부부도 그렇고, 차이엘드는 참 사랑이 넘치는 것 같습니다.”

“허허, 그렇지요. 연구실은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들다마다요. 이 정도로 모든 것이 갖춰진 연구실은 처음 봅니다.”

“공작 전하께서 아낌없이 투자하셨으니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형식적으로 건넨 인사말이건만 연금술사들은 자부심 가득한 얼굴을 하곤 답했다.

“공작 전하께서 일전에 맡기신 마수를 푼 노파에 대해서라면 이미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뭐 그리 잔인한 방법을 쓰던지……”

“잔인한 방법?”

“예. 정신을 지배하기 쉽도록 주술을 써 일부러 육체를 노화시켰더군요.”

“나 원 참…… 연금술에 일생을 바쳤지만 그런 약은 수는 처음 봅니다. 공작 전하께서 넘겨주신 마수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라면 상당히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어찌 그런 잔인한 방법을……”

하일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마터면 손에 꼭 쥐고 있던 꽃다발을 놓칠 뻔했다.

“허면 노파는 마라바스에게 정신을 지배받고 있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어쩌다 희생양이 된 건지…… 마라바스가 트라이하에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그 정도 거리에선 아레테가 통하지 않을 텐데.”

“마라바스라는 연금술사의 실력이 뛰어나긴 한가 봅니다.”

하일드가 말하자 트라이하의 연금술사들은 일제히 부정을 표했다.

“이건 그가 대단하다기보다는 노파가 대단한 겁니다. 왜인지 아레테의 힘에 상당히 길들여져 있어요.”

“네, 맞아요. 오랫동안 강력한 아레테의 힘에 노출된 것처럼.”

연금술사들은 신기하다는 듯 저마다 한마디씩을 덧붙이곤 휴식시간이 끝났다며 자리를 떴다.

꽃다발을 마저 갈무리하려던 하일드는 어쩐지 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왜일까. 공작저의 지하실을 지키던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

아무리 규율이 느슨한 트라이하 제국이라고 한들 황궁의 고용인들 기강은 엄격하게 잡혀 있었다.

근무 중인 누군가가 술을 마신다는 것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 행위. 그러나 24시간 만취 상태여도 용서받을 수 있는 보직이 딱 하나 있었다.

“분명 어제 받은 귀한 걸 여기 놔뒀는데……”

황궁 깊숙한 곳의 영안실을 담당하고 있는 제레미는 오늘도 만취 상태로 술을 찾았다. 이곳저곳에서 들이미는 시체들을 관리하는 것은 도무지 맨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늘 값싼 술로만 취하던 그는 얼마 전 트라이하 황실의 문장이 찍힌 값비싼 술 한 병을 받았다.

일정이 잡히는 대로 부검할 시신 한 구를 특별 관리해달라는 상부의 부탁 겸 명령에 딸려온 것이었다.

“죽으면 다 똑같은 시체지, 천재 연금술사의 시체가 뭐 다른가……. 그나저나 내 술은 어디로 간 거야?”

제레미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싸매며 선반을 더듬거렸다. 곧 그의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걸 찾나?”

“히익!”

시체들뿐인 공간에 목소리라니. 영안실의 베테랑 제레미는 그대로 거품을 물고 기절해버렸다.

고요하고 싸늘한 영안실의 한가운데에 남색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 하나가 독주를 물처럼 들이켰다.

‘거슬리는군.’

마라바스 라이델은 제 몸에 걸려 있는 시신 구별용 명찰을 떼 태워 버리곤 술이 반쯤 남은 병을 그대로 바닥에 내려두었다.

시체들이 자리한 영안실은 맨정신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곳. 그러나 그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병력 충원하기 한번 어렵군. 귀찮아서 두 번은 못 하겠어.”

그가 손을 움직이자 거대한 마법진이 노파를 소환했다. 코델리아 웨일. 대규모 마법을 쓰거나 아레테를 사용할 때 무척 요긴한 도구.

“코델리아. 바다 건너까지 힘을 써야 하니 잘 부탁하지.”

“아…… 아아…….”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이도록. 곧 네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고향 땅을 다시 밟게 해줄 테니.”

마라바스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코델리아의 얼굴을 손으로 틀어쥐었다. 노파의 가느다란 신음이 머지않아 끊겼다.

잠시 후, 영안실 곳곳에 자리하던 시체들이 관절을 뒤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이녹이 하일 제국에 도착한 것은 약혼식 당일인 오늘이었다.

타국의 귀빈들이 일정을 넉넉하게 잡고 미리 도착해 제국을 관광하는 것을 생각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빡빡한 여정.

이는 황실 백합 훈장의 수여식 당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을 트라이하 측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었다.

카일이 이녹의 얼굴도 볼 겸, 베르드와 대화도 나눌 겸 입궁하자마자 나는 신문을 훑어봤다. 죄다 황제의 약혼식 얘기뿐이었다.

‘이타르가 오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지만 안심하긴 일러.’

코델리아를 이용한다면 정신 지배라는 마라바스의 아레테는 무한한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온갖 주술에도 능하다.

‘몸이 트라이하에 있어도 하일 제국에까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긴장해야 했다.

약혼식 참석을 위한 몸단장을 마친 나는 바네사와 단둘이 마차에 올랐다. 그녀에게 꼭 전해줘야 할 물건이 있었다.

“이거 받아요, 바네사. 아직 열어보진 말고.”

바네사는 세뱃돈을 받는 어린애처럼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내가 내미는 작은 상자를 받아들었다. 클레어가 일전에 사온 ‘섬광의 뿌리’가 안에 들어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하는 눈치였다.

“바네사.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신호를 줄게요. 그때 이 상자를 열면 돼요.”

“무슨 일이 안 생겨서 신호를 안 주시면요?”

“그럼 뭐…… 잘 보관했다가 제가 죽을 때쯤 퇴직금으로 가져가게 해줄게요. 그전에는 안 돼요.”

이 선물은 개봉 시점이 무척 중요한 물건이니. 나는 아쉬움을 드러내는 바네사를 위해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바네사, 공동묘지 도굴꾼 소문 들었어요?”

“에이. 제가 아무리 돈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죽은 사람 무덤은 안 파요. 나올 게 뭐가 있다고.”

왜 당연히 자기를 범인이라 의심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무기를 점검하던 바네사를 곁으로 불러 신문을 보여주었다.

“이거 보여요? 얼마 전부터 수도의 무덤들이 파헤쳐진 채로 발견되었다나 봐요.”

“타이밍이 묘하네요. 분명 마라바스는 트라이하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했는…… 잠깐.”

바네사는 소름이 돋는지 팔을 연신 문질렀다. 하긴, 나도 이 생각을 처음으로 떠올렸을 땐 오싹함에 카일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었다.

“마라바스는 죽은 자들을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잖아요. 이미 상식 밖의 힘을 사용하니 제 몸을 도구로 사용한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죠.”

“마님은 정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세요? 마라바스 놈이나 가능한 생각인 줄 알았는데.”

“그거 칭찬이에요, 욕이에요?”

마라바스와 한 세트로 묶이는 건 여러모로 유쾌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어째 원작보다 더 윤리의식이 없는 듯했으니.

“마라바스가 시체들을 조종해 급습할 확률이 높아요. 아닐 수도 있지만 만일의 가능성에 대비하는 게 좋겠죠.”

내 해피엔딩에 방해가 된다면 굳이 남의 사정까지 봐줄 생각이 없었다. 상대가 파멸 꿈나무인 이타르 일행이라면 더더욱.

마차가 여러모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될 약혼식 장소로 출발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