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96화 (96/134)

#96

예장을 한 베르드는 턱을 괴고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시작될 약혼식을 축복하듯 날씨는 쾌청했다. 바람도 하객들의 상기된 뺨을 식혀줄 정도로만 적당히 불었다.

그럼에도 뱃속에 나비가 퍼덕이는 듯 속이 좋지 않았다. 비단 트라이하의 황태자나 차이엘드 공작 같은 거물들이 방문했기 때문은 아니리라.

“리엔 공주…….”

베르드는 먼발치에 보이는 리엔을 보며 애먼 벽만 콩콩 쥐어박았다. 왜 영애들이 짝사랑하는 사내들을 보며 손수건을 물어뜯는지 알 것 같았다.

어쩜 저렇게 한 마리 늑대처럼 아름다운지. 회갈색 머리카락을 땋아 올리고 화사한 꽃으로 장식한 모습이 영락없는 대자연의 여신처럼 보였다.

누이동생들과 여장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유일한 취미이던 황태자가 상사병을 앓을 줄 누가 알았을까.

나디아는 낯선 오라버니의 모습에 속으로 혀를 츳츳 찼다.

“폐하. 어차피 곧 결혼을 약속할 사이이니 다가가 말이라도 걸어보시는 게 어떠신가요?”

“그래도 이상해 보이지 않겠지?”

“그야…….”

나디아는 뭘 해도 훔쳐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지금보다는 나으리라고 대답하려다 관두었다.

용기를 얻은 베르드는 한달음에 리엔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에 서니 좋은 향기까지 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는 은빛 머리카락을 멋들어지게 쓸어올렸다. 리엔은 그의 안부가 별로 궁금하지 않았으나 자선사업을 하는 마음으로 미소 지었다.

“공주가 웃는 것을 보니 미리 준비했던 대화 주제들이 생각나지 않는군.”

“긴장하셨나 봅니다. 양국이 동맹을 맺는 형식적인 절차이니 너무 개의치 마시옵소서.”

“그게 아니라…… 잠시 걷겠소?”

베르드는 너무도 단호한 리엔의 태도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보이지 않는 장벽이 둘 사이를 단단히 갈라놓은 느낌이었다.

만인의 주제라던 계절, 날씨, 건강 이야기를 차례로 하고 나니 말할 거리가 없었다. 그는 머리를 굴려 리엔의 관심사를 빠르게 떠올렸다.

“경사이니 다이앤 영애도 모습을 비추겠군.”

예상대로 다이앤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리엔의 눈이 반짝거렸다.

“이제는 다이앤 백작이지요. 사교계에서는 페르슈 다이앤 경과 구분하기 위해 작은 다이앤 백작이라고 불린답니다. 귀여운 별칭이지요?”

작은 다이앤 백작의 한 마디에 나라 경제가 요동치는 걸 알면 귀엽다는 소리는 못 할 텐데. 베르드는 작은 다이앤 백작의 뒤에서 흑막처럼 킬킬 웃는 차이엘드 공작을 상상하다 관두었다.

“폐하께서는 작은 다이앤 백작과 친분이 깊으신지요?”

“그럼. 다이앤 백작과 나는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긴밀한 관계이지.”

베르드의 인간관계쯤이야 진작 꿰고 있던 리엔이었다. 그녀는 둘이 접점을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어쨌든 하일은 차이엘드 공작의 앞마당이니 그와 관련된 모든 이들을 익혀 두는 게 마땅하다. 리엔은 싱긋 웃으며 물었다.

“폐하께선 언제 작은 다이앤 백작을 처음 보셨는지요?”

드디어 공통의 대화 주제를 찾은 기쁨에 베르드가 활짝 웃었다.

“공주도 알다시피 다이앤 백작가는 오랜 기간 궁정에 출입하지 못했지. 성인이 된 그녀를 처음 본 건 올해 추수 연회였고.”

“어머…… 두 분이 같이 춤이라도 추신 건가요?”

그랬다간 차이엘드 소속의 군대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제 눈으로 확인했으리라. 베르드는 고개를 설설 저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다이앤 백작이 차이엘드의 피앙세가 되었다니 잠깐 놀려주려 했지. 내가 황태자인 줄도 모르고 나를 올려 찼던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오싹해.”

“올려…… 찼다면…….”

리엔이 눈동자를 바삐 굴렸다. 저를 놀리려는 남자가 작정하고 따라온다면 보통 여성들이 올려 찰 곳은 하나.

‘어딜 걷어차인 거야? 설마…….’

전설의 ‘하일 제국 미래 걷어차기 킥’이 어디에 박혔는지 추리해낸 리엔이 거래 사기를 당한 듯 망연한 얼굴을 했다.

***

약혼식은 해가 중천에 있을 때 황실의 홀에서 거행되었다. 대관식 못지않게 고위 귀족들은 모두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 절차 또한 엄격했다.

이녹은 경건한 마음으로 하일과 켈트만의 혈연 동맹을 지켜보다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이곳은 하일이고 자신을 비롯한 일행들은 트라이하인이니 조금 쳐다볼 수도 있다고 넘기기에는 시선이 몹시 집요했다.

시선은 어느 한 방향에서가 아닌 사방에서 느껴졌다. 이녹은 곧 그 시선의 주인이 아멜리아 다이앤을 지키기 위한 차이엘드-다이앤 연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실시간 감시라니. 독 안에 든 쥐 신세군.’

객관적인 증거는 아직이었지만 직감으론 이타르가 백합 훈장 수여식 때 무언가 일을 벌인 듯하니 경계도 이해가 갔다.

이녹은 몹시 곤란했다. 식민지에서 금은보화와 향신료들을 실어나르려면 차이엘드의 협조가 필수였다.

그들은 일찍이 해상 무역을 손아귀에 틀어쥐었고 거점 도시로 쓰기 좋은 훌륭한 항구 도시들을 여럿 지배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분위기가 이래서야 협조는 고사하고 암살을 당하지나 않는다면 감사할 것 같았다.

‘이따 작은 다이앤 백작과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게 좋겠군. 그녀의 도움을 얻는다면 앞으로의 거래도 문제없을 테지.’

듣자 하니 차이엘드 공작은 그녀의 눈짓 한 번이면 금광맥을 모두 선물한다고 했다.

사랑에 빠진 연인에게 이복동생이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켜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도움을 구하는 것. 이것이 이녹의 하일 방문 목적 전부였다.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설령 딴맘을 먹었다고 해도 이런 삼엄한 경비에서 실행에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얼른 돌아가고 싶군. 부황께선 잘 계실까.’

하일로 출발하는 일행을 배웅하는 레오시스 2세의 안색은 어느 때보다 창백했다.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평온하고 자애로웠다.

빠른 귀국을 위해 값비싼 장거리 이동 아레테 스크롤을 챙겨왔음에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하필 오늘은 이아나의 기일.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았다.

***

곧 약혼식이 끝나고 성대한 연회가 시작되었다. 차이엘드의 경비들은 어느 때보다 신경을 곤두세운 채 아멜을 집중 경호했다.

어쩐지 과보호 받는 유치원생이 된 기분이었기에 아멜은 멋쩍게 웃었다. 카일과 다이앤 백작이 그녀의 양옆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대단한 경계심에 뭇 귀족들은 물론이고 오늘의 주인공인 리엔과 베르드도 입을 작게 벌렸다.

‘이대로 연회 내내 앉아서 보내는 건가.’

화려하게 장식된 황궁의 홀이나 감미로운 음악이 조금 아쉬웠으나 아멜은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두 분이 곁에 있어 주니 든든해요.”

아멜이 상큼하게 웃으며 말하자 두 남자는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곧 누군가가 다가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색을 했지만.

“그 유명한 차이엘드 공작과 두 다이앤 백작을 드디어 보는군요.”

차분히 가라앉은 금발과 악의 없는 푸른 눈동자. 목소리의 주인은 이녹이었다.

상대가 황태자이기에 어느 정도 예를 갖춰야 하는 상황. 카일은 아쉬움을 티 내지 않으며 태연하게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먼저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공작이 애지중지 아끼는 약혼녀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트라이하에서도 유명합니다.”

카일은 따끔한 장인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척했다. 이타르보다 온화한 성정이긴 하나 어쨌든 이녹도 백 퍼센트 신뢰하진 않았다.

아니, 카일리안 차이엘드에게 있어 덮어놓고 무조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약혼녀 딱 한 명뿐이었다.

최근 연금술과 관련하여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기에 이녹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일은 노련히 속내를 감춘 채 그와 안부를 주고받았다.

한편, 아멜은 처음 보는 황태자다운 황태자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베르드에게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무언가가 그에게는 있었다.

‘그래. 황태자면 이런 맛이 있어야지. 나라 걱정도 좀 하고 말이야.’

아멜은 베르드가 카일에게 경제적 부탁을 하러 왔다는 사실을 진작 눈치챘다. 자국에 필요한 것을 위해서라면 사과하고 굽히는 태도가 인상 깊었다.

‘팔찌 색깔도 안 변하고…… 안심하긴 이르지만 이녹은 이타르보다 낫네.’

손등에 키스를 받을 때도 그저 차이엘드 공작의 마음이 상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전부였다. 반역 같은 불길한 단어는 보이지도 않았다.

‘됐어. 이만하면 평화로운 약혼식…… 응?’

약혼식이 의외로 조용히 지나간다 생각할 무렵, 저 멀리에서 무언가가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방금 뭐였죠?”

아멜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지평선을 다시 바라봤으나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

오늘 하일드 집사장은 일일 기사였다. 한 사람이라도 더 경호에 보태는 게 낫지 않겠냐고 주군을 끈질기게 설득해 얻은 역할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하기로 재차 다짐하며 순찰을 돌았다. 연회장 안쪽은 젊고 강한 기사들이 단단히 지키고 있으니 제 역할은 시간이 되면 순찰을 도는 것이었다.

‘공작 전하께서 왜 자꾸 중심 업무에서 배제하시는지 모르겠군.’

어딘가 찜찜한 마음이었지만 주군의 결정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일드는 수하들을 거느리고 주변을 살피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이 느낌은……’

그는 이 느낌을 기억하고 있었다. 오래전 사랑하는 부인이 지키던 문 안쪽에서도 비슷한 공기가 풍겨왔다.

다른 공기와 달리 약간은 묵직하며 제멋대로 흐르는 기류. 아레테가 없는 하일드였지만 이 느낌만은 똑똑히 기억했다.

“따라오십시오.”

위험요소가 있다면 미리 파악해 없애는 게 나으리라. 하일드는 잘 정돈된 황궁의 정원과 수풀을 재빨리 가로질렀다.

아레테의 힘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그 때문일까? 가슴도 터질 듯 쿵쾅거렸다. 검을 빼들고 신중히 관목을 해치길 잠시.

카강-

그의 손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하들이 즉시 그를 엄호했으나 하일드의 눈에는 그루터기에 기대 앉은 노파만이 들어왔다.

“코델리아……?”

하일드 웨일은 무언가의 서막에서 너무도 익숙한 여인의 얼굴을 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