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베놈. 마라바스에게도 슬슬 준비하라 이르도록.”
이타르가 무릎 높이만 한 꼬마였을 시절부터 모셔왔던 베놈이었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주인의 목소리만 듣고도 때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늘은 입에 올리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운 이아나 공주의 기일이었다. 이타르와 그의 지지세력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날이기도 했다.
이타르는 이미 제 수족인 귀족들과 몇 시간 후에 시작될 반역의 동선을 최종 점검하는 중이었다.
마라바스는 서류상 죽은 것으로 된 반역의 비공식적인 참여자였기에 그에게 의견을 전달하는 건 항상 베놈의 역할이었다.
‘날 신뢰해주신다니 고맙긴 한데.’
베놈은 마라바스의 거처에 들어서자마자 미간을 구겼다. 피 냄새와 갖은 영약의 냄새가 방 안에 가득했다.
베놈은 트라이하 황궁을 스쳐 지나간 모든 사람들 중 가장 강력한 욕망과 추진력을 가진 것이 마라바스 라이델이라고 생각했다.
‘대체 이타르 님은 왜 이놈을 신뢰하시는 건지.’
사사로운 이유로 반역에 가담하는 주제에 윤리나 옳고 그름에 대해 판단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마라바스의 주술은 도가 넘었다.
영안실의 시체들을 강제로 움직여 화살받이로 쓴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유족들은 뒤집어질 것이다. 사람을 도구로 써 아레테를 증폭시키는 것도 마찬가지.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그 사실이지만.’
베놈은 쓸데없는 기억을 떨치려 고개를 저었다.
이미 몇 차례 넌지시 마라바스와 멀리할 것을 권했으나 이타르는 제게 막강한 힘을 줄 수 있는 천재 연금술사를 버리지 않았다.
그 끝이 파멸이 아니길. 베놈은 책상에 앉아 한결같은 자세를 유지하는 마라바스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동자는 뜨고 있으면서도 아득한 먼 곳을 보는 듯 초점이 나가 있었다. 빛깔도 썩은 생선 같았다.
베놈이 말을 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 마라바스가 먼저 운을 뗐다.
“하일에 가 계신 황태자의 어깨가 무거워 보입니다.”
“네가 이용한 코델리아 문제를 수습해야 하니 그렇겠지.”
이성적으로 대꾸하니 마라바스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듯 픽 웃었다.
“이타르 님께서 간절히 원하던 아레테는 머지않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네 사사로운 욕심을 주군을 향한 충성심으로 위장하지 마라.”
“몇 시간 후면 반역을 일으킬 처지에 충성심을 논하는 건 어떤 기분입니까.”
베놈은 당장이라도 마라바스의 목을 틀어쥐고 도끼를 가져와 기계팔을 잘라낸 다음 용광로에 집어넣고 싶었다. 그만큼 위선을 떠는 그가 역겨웠다.
하지만 그를 곁에 두는 건 이타르 드 트라이하가 선택한 일.
“허튼짓할 생각 말아라. 충성을 연기하려거든 끝까지 해.”
베놈은 그를 한 차례 더 째려보곤 방을 나섰다.
***
하일드는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노파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문득 마라바스가 주술을 사용해 노파를 강제로 늙게 했다는 연금술사들의 말이 섬광처럼 떠올렸다.
관리되지 않아 빗자루처럼 버석거리는 머리카락과 갈라지고 부서진 손톱. 생기를 잃고 색깔마저 바랜 눈동자.
내색하지 않으려 주먹을 꽉 쥐었지만 시야가 뿌예졌다. 단 몇 초간 눈을 마주하는 것으로 하일드는 그녀가 사라진 제 아내임을 알 수 있었다.
“코델리아. 코델리아…….”
“아…….”
노파는 신음만 흘렸다. 기력이 쇠한 듯 숨을 몰아쉬면서도 아레테를 끊임없이 발산하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원칙대로라면 당장 그녀를 제압해야했지만 하일드는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그럴 수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황실 근위대와 의견을 교환해야 할 듯하니 너무 거칠게 다루진 마십시오.”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이 그녀를 포승줄로 묶었다. 하일드는 조심스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 순간.
콰아앙-!
순간 걸음이나 제대로 걸을까 싶던 노파가 벌떡 일어났다.
“으…… 으흑……!”
노파의 흐느낌과 함께 그녀의 몸 전체에서 강력한 아레테의 힘이 분출했다.
한편, 연회가 이뤄지는 홀에서 시간을 보내던 귀족들은 바닥이 잠깐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하일은 지진이 거의 없는 땅인지라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가까운 곳에서 지진이라도 난 걸까요?”
“저희 영지는 괜찮을까 모르겠네요.”
“이제 괜찮은 걸 보니 별일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들의 얼굴은 금방 풀어졌다. 살기로 사람 여럿을 죽일 듯 신경이 곤두서 있는 건 차이엘드 소속의 고용인들뿐이었다.
카일은 대화를 나누던 이녹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곤 브루노를 불렀다.
“하일드 집사장의 보고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서쪽 정원의 나무 그루터기에 기절해 있는 것을 지금 막 발견했습니다. 이리로 데려오는 중입니다. 아무래도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잠깐.”
카일은 손그늘을 만들곤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무척 위태로운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맹렬한 기세로 다가오는 그들을 발견한 귀족들이 혼비백산 비명을 지르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마라바스의 주술에 당한 시체들인가. 누나가 말한 대로군.’
날이 날인지라 무관이 아닌 자신이 검을 들고 올 수는 없었기에 카일은 아쉬운 대로 디저트용 나이프를 몇 개 손에 쥐었다.
황궁의 근위병들은 창백하다 못해 불어터진 피부를 가진 생명체들의 정체를 몰라 창을 겨누면서도 파르르 떨었다.
“물러나지 말고 맞서라!”
베르드가 명을 내리자 근위병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창을 고쳐 잡았다. 살아 움직이는 시신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듯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던 연회장은 어느새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에 잠식되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되었다.
카일은 곧바로 아멜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겹겹이 방어의 아레테를 둘러주고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레이디 클레어. 잠시 제 피앙세의 곁을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클레어는 군말 없이 아멜의 손을 꼭 잡고 그녀를 리엔의 곁으로 데려갔다. 다음으로 카일은 바네사를 바라봤다. 그녀를 움직이는 데에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15배.”
“넵! 목숨을 바쳐 마님을 지키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답을 들은 카일은 곧바로 몸을 틀어 마라바스의 인형이 된 시신들 쪽으로 향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근위병들이 크게 밀리고 있었다.
카일은 근위병을 돌멩이로 내리찍으려던 마라바스의 인형에게 나이프를 명중시켰다.
“괜찮습니까.”
“공, 공작 전하…… 감사합니다. 으윽!”
근위병은 손목을 다쳤는지 고통을 호소했다. 카일은 검을 건네받곤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에게 그를 치료받게 하라고 명했다.
‘생각보다 더 밀리는군.’
일단 적들의 생김새가 반쯤 썩은 인간의 형태이다 보니 지레 겁을 먹는 자들이 많았다. 예장을 한 귀족들이 도망치느라 바빠 사기가 꺾인 것도 문제였다.
오죽하면 리엔에게 잘 보이기 위해 검을 쥐고 폼만 잡는 베르드가 용감해 보일 지경.
심지어 약혼식 참석자 중 가장 열심히 싸우는 건 사교계에 복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페르슈 다이앤이었다.
카일은 몸을 일으키려는 마라바스의 인형을 다시 기절시키며 다이앤 백작에게 말했다.
“적들은 마라바스 라이델의 주술이 걸린 시신들입니다. 의지 없이 그의 명대로만 움직이니 몸이 부서지기 전까진 계속 움직일 겁니다.”
“아무래도 이번 일 또한 코델리아와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하일드가 이렇게 쉬이 당할 정도라니.”
“연금술사들을 불렀으니 곧 도착해 이들에게 걸린 주술을 풀 겁니다. 그전까지는 지금 같은 방법으로 상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라바스의 인형들은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이대로라면 오늘 내로 결판이 나지 않을 상황.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몇몇 근위병과 고용인들이 비교적 멀쩡한 시신들의 얼굴을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빈센트, 자네가 왜…….”
“아이보리, 넌 분명 저번 주에 죽었잖아!”
“우리 아가…….”
마라바스의 인형들이 죽은 자의 시신이라는 추측이 순식간에 퍼졌다. 검기로 인형들을 쓸어버리려 했던 다이앤 백작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시신들을 참 골고루 구해온 것 같군요. 이런 상황이라면 시체를 훼손시키기 어렵겠습니다.”
“…….”
카일은 인형의 급소를 정확히 가격해 기절시키며 한숨을 삼켰다. 인형들이 끝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카강!
아멜은 호위 기사가 칼자루로 청소년쯤 되어 보이는 인형을 기절시키는 것을 지켜보았다.
몸이 날랜 인형들이 빈틈을 파고들어 여인들 쪽으로 돌격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이래서는 정말 끝이 없었다.
‘무슨 놈의 제국 수도에 죽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
이래서 사람은 매장이 아니라 화장을 해야 한다며 툴툴대 봤자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귀부인들을 호위하던 근위병들도 슬슬 지쳐가는 것이 보였다. 아멜은 그들에게 물을 건넸다.
「젠장. 시체들이 끊임없이 밀려오는데 어느 세월에 급소를 쳐서 기절시키라는 거야?」
「급소 찾기 전에 내가 찔려 죽겠는데!」
그사이에 마라바스가 더 강해진 것인지, 코델리아의 힘을 짜낸 것인지 상황은 점점 좋아지지 않았다.
‘다행히 아직 사망자는 없어.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도박을 해볼까.’
아멜은 바네사를 구석으로 불러왔다. 어느 때보다도 살벌한 눈을 하던 그녀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마님. 혹시 어디 다치신 건 아니죠?”
경호비 15배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철렁한 얼굴이었다. 아멜은 바네사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며 물었다.
“바네사. 만약 제가 다친다면 어떨 것 같아요?”
“갑자기 낯간지럽게 그런 질문을 하시는 이유가 뭐예요?”
틱틱거리는 대답과 들려오는 속마음이 무척 대조적이었다.
「마님이 안 계시면 난…… 또 혼자가 되겠지.」
「절대 다치게 두지 않을 거야.」
「내가 지켜낼 수 있어.」
이만하면 됐다. 아멜은 바네사의 손을 꼭 잡고 눈을 맞춘 채 말했다.
“바네사. 절 지켜줄 거예요?”
“……자꾸 마음대로 속마음 읽지 마시라니까.”
“저를 소중한 친구로 여겨줘서 고마워요. 저번에 준 상자, 지금 열어볼래요?”
바네사는 시선을 피하며 품을 뒤적였지만 뺨이 발그레해진 건 숨기지 못했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상자를 여는 순간 아멜은 바네사의 속마음을 또 한 번 들을 수 있었다.
「소중한 친구…….」
「이렇게 예쁜 사람이니 내 힘으로 지키고 싶어.」
바네사는 상자 안에 고이 간직되어 있던 목걸이를 보고 입을 벌렸다. 그녀의 손끝이 이끌리듯 목걸이를 건드렸다.
순간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빛기둥이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마, 마님! 이거 뭐예요?”
아멜은 싱긋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바네사는 제 몸에 흐르는 짜릿한 힘이 그토록 원하던 아레테인 줄도 모르고 당황하고 있었다.
“아, 그 목걸이 이름은 섬광의 뿌리예요. 클레어 언니가 트라이하에서 특별히 공수해온 아레테의 결정이 박힌 보물이죠.”
“……!”
“절 지켜준다고 했잖아요. 약속 지킬 거죠?”
바네사 메이브란테. 별칭 섬광의 지배자.
드디어 세계관 최강자의 힘을 직접 볼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