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처음 보는 도구도 곧잘 다루곤 하는 바네사였다. 그녀가 낯선 아레테의 힘을 완전히 제 것처럼 사용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성처럼 긴 꼬리를 가진 빛 덩어리 몇 개가 그녀의 마음대로 움직였다. 손을 내리꽂듯 움직이면 하늘에서 빛줄기가 창처럼 내리꽂혔다.
아멜은 신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바네사의 모습을 보며 괜한 쾌감에 사로잡혔다.
‘이거 책에서 읽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하잖아? 분명 빛의 채찍을 자유자재로 쓰는 정도였는데…….’
바네사는 백금발을 휘날리며 인형들의 급소만을 정확히 가격했다. 순식간에 모든 마라바스의 인형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근위병들은 물론 귀족들마저도 넋을 놓고 그 아름다운 자태를 구경했다.
‘대체 차이엘드 공작은 다이앤 백작의 경호비로 얼마를 쓰는 건가.’
‘저, 저게 경호원 하나의 실력이라고? 근위병 전체보다 나은데?’
‘저런 실력자가 자기 세력을 꾸리지 않고 경호원으로 활동하다니…… 작은 다이앤 백작에게 정말 뭐라도 있나?’
바네사를 향하던 시선들이 자연스레 아멜을 우러러보기 시작했다. 손을 툭툭 턴 그녀가 아멜에게 다가가자 작은 탄성도 나왔다.
“고마워요, 바네사.”
아멜은 얼굴 가득 흐뭇함과 대견함을 드러내며 웃었다. 바네사는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하면서도 답했다.
“우리 사이에 뭐 그런 인사까지. 마님을 지키는 게 제 일인걸요? 게다가 아레테의 결정이 박힌 목걸이도 주셨고…….”
“그건 클레어 언니가 준 거예요. 나중에 같이 감사 인사 드리러 가요.”
“그 전에 잠시만요.”
바네사는 영롱한 약혼반지가 자리 잡고 있는 아멜의 손을 끌어와 손등에 짧게 입 맞췄다.
하일에서 손등의 입맞춤은 기사들이 충성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대단한 실력자의 충성을 받은 다이앤 백작에게 사람들이 존경과 질투를 보냈다.
「이것도 보고 있죠?」
「……마님, 여러모로 고마워요. 정말로.」
아멜은 바네사의 속마음을 읽으며 뭉근한 감동을 느꼈다.
이제 남은 일은 시체들을 움직이는 주술을 해제하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오늘 이 자리에는 유능한 연금술사가 있었다.
“이쪽으로. 이 주술은 까다롭지만 시체들이 행동 불능 상태인 지금은 해제가 한결 수월합니다.”
이녹은 차이엘드의 별궁에서 부리나케 달려온 연금술사들에게 손수 주술 해제법을 알려주었다.
연금술사들은 빠른 속도로 시신들을 돌봤고, 머지않아 비상사태는 종료되었다. 황궁의 근위병들은 머쓱함에 머리를 긁적이며 시체를 다시 안치하는 일을 맡았다.
대륙의 두 강국이 혈연관계로 얽히는 베르드와 리엔의 약혼식은 이렇게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
3황자를 지지하는 귀족들과 대신들은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집결했다. 그 모습이 유서 깊은 트라이하 황실에 한바탕 폭우를 쏟아 낼 먹구름처럼 보였다.
그들의 선봉에 선 이타르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건조한 눈으로 황궁을 눈에 담았다.
호흡조차 어려워 늘 어의를 대동하는 레오시스 2세의 어전과 지금은 비어 있는 황태자의 거처, 그리고 이아나가 죽은 뒤 발견되었던 백합 정원.
공간 하나하나를 곱씹을수록 반역의 명분만 더 뚜렷해졌다. 이타르는 망설임 없는 손길로 검을 뽑아 들며 중얼거렸다.
“황태자가 함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 때맞춰 약혼식 참석이라니.”
“천운이 따르는 건 이번 한 번입니다. 놈은 곧 아무 힘도 없이 트라이하로 돌아올 겁니다.”
“그렇겠지.”
이타르는 베놈의 말에 픽 웃었다. 코델리아가 백합 훈장 수여식에서 마수를 푼 덕에 하일 측은 트라이하와 연금술사들을 어느 때보다 경계했다.
본래 황태자라는 신분에 맞게 상당한 인력을 대동했을 이녹이 싸움이라곤 생전 해본 적도 없게 생긴 샌님들과 하일로 향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가 돌아온다면 이미 모든 상황은 끝나 있으리라.
“포획 주술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문제없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슬슬 시작하지.”
이타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부황의 어전으로 향했다. 칼날에 어둠이 내린 황궁의 모습이 잠깐 담겼다 사라졌다.
문이 활짝 열리는 순간 황제의 시녀들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한 모양.
“이, 이타르 님. 황제 폐하께 오셨다고 고할…… 커헉!”
“내가 직접 고하지.”
이타르의 수하들은 큰 보폭으로 걷는 그를 엄호하며 앞을 막아서는 자들을 모조리 베어버렸다. 사방에 피가 꽃망울처럼 튀었다.
그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황제를 지키려는 시중 서넛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굳게 닫혀 있던 문들이 속절없이 열렸다.
“지금 이게 무슨 무례…… 윽!”
“시끄럽다.”
이타르는 부황을 가장 가까이에서 전담해 모시던 어의를 단칼에 베었다.
안정과 휴식을 위해 상대적으로 어둡게 유지되고 있는 침상에서 황제는 여느 때처럼 기침을 하고 있었다.
“폐하의 태도는 마치 이런 일을 예상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레오시스 2세는 발코니로 도망가거나 옷장에 몸을 숨기지 않았다. 의연하게 침상에 앉아 제게 살기를 보이는 아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타르. 네 칼을 내 피로 적시면 네 분노가 가라앉겠느냐.”
“…….”
“부디 나를 베는 것에서 만족해다오. 더 이상 죽은 네 누이동생을 위해 스스로를 죽이지 않았으면 한다.”
“유감이지만 부황의 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 피와 황태자의 피까지 모조리 바친다고 해도 부족합니다.”
이타르가 턱을 까딱이자 수하들이 황제에게 달려들었다. 트라이하의 현제라 불리는 레오시스 2세는 순식간에 황제의 의복과 명예를 빼앗겼다.
“지하 감옥에 가두도록. 사용할 데가 있으니 목숨은 붙여 놔.”
“알겠습니다.”
이타르는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끝까지 제 발로 움직이는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질문을 삼켰다.
왜 이아나를 죽음으로 몰아가셨습니까.
왜 그 아이의 죽음에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으신 겁니까.
내뱉지 못할 말이었기에 이타르는 눈을 느릿이 감았다 뜨며 또 다른 질문을 했다.
“아멜리아 다이앤은 아직인가?”
***
대부분의 귀족들은 황제가 연회를 파한다고 말하자마자 껄끄러운 일이 벌어진 장소에서 신속하게 빠져나갔다.
무엇보다 신성해야 할 황제의 약혼식에서 움직이는 시체들이 난동을 부렸다는 사실 자체가 불길하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에 급습을 당하고 기절해버린 하일드의 상태가 좋지 않아 차이엘드와 다이앤은 황궁에서 잠시 상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자연스레 황태자 이녹을 포함해 차이엘드 공작에게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려던 무리들도 황궁에 남게 되었다.
“하일드는 정말 괜찮은 겁니까. 갈수록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은데.”
“송구하옵니다, 전하. 일단 약을 먹이고 해제 주문을 걸어두었으니 차도가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카일은 좀처럼 깨어나지 못하는 하일드를 걱정 어린 시선으로 살폈다. 그와 함께 주변을 순찰하던 다른 고용인들도 깨어나지 못했다.
그간 지켜본바, 하일드는 누군가에게 간단히 당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이토록 무력하게 당했다면 그 상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훈장 수여식 때처럼 코델리아가 직접 온 건가.’
아멜 또한 카일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래전 사라졌던 부인이라면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하일드 집사장을 무장해제 시켰을 터.
“집사장님이 어쩌다가…….”
아멜은 안타까움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를 내며 하일드 집사장의 손을 쓸어주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누나 님께서 날 걱정해주시는군.」
기절한 줄로만 알았던 하일드의 속마음이 들려왔고, 흐릿하게나마 그가 하고 있는 생각들이 영상으로 보였다.
‘정신을 잃으신 게 아닌가? 기절 상태인데 어떻게 속마음이 보이지?’
속이 시커먼 카일도 일단 잠들고 나면 속마음이 들리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경험으로 아멜은 제 아레테가 자의로 하는 생각만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런데 마음이 들린다니. 곰곰이 생각하던 아멜은 차이엘드의 연금술사들에게 물었다.
“혹시 멀쩡한 사람을 기절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주술이 있을까요?”
“그건 잘…….”
“저희는 주로 금을 만드는 일에만 치중해서……”
다들 곤란하다는 듯 시선을 피하던 그때, 뒤에 물러나 있던 이녹이 가만히 답했다.
“네, 있습니다. 사람을 죽은 것으로 위장하는 주문을 만들다 실패하는 바람에 생긴 기술이지요.”
“그 주술을 해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복잡하긴 하지만 해제의 주술을 걸면 됩니다. 물론 주술을 누가, 어떻게 걸었는지를 알아야만 해제할 수 있고요.”
이녹의 말을 들은 아멜은 겉으로는 아쉬운 척하면서도 안심했다. 그렇다면 하일드의 기억을 읽어내면 되는 일.
타국의 황태자에게 도움을 받는 일은 자칫 외교적 문제로 이어질 수 있기에 주문 해제를 이녹에게 부탁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정신을 집중하고 하일드의 손을 가볍게 쓸었다. 아레테의 힘이 맞닿은 두 손에 퍼지는 순간.
“이게 뭐지? 크윽……!”
이녹이 제 한쪽 어깨를 붙잡으며 격한 고통을 호소했다. 그 모습이 불에 데인 환자처럼 다급했기에 트라이하의 시종들은 그의 상의를 벗겼다.
“전, 전하…… 이건 대체……!”
그러자 누군가가 그려둔 짙은 남색의 마법진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그린 것인지는 당장 알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이녹은 어느 한 장면을 떠올리며 이를 부득 갈았다.
“괜한 의심 마시고 하일 제국 방문이나 준비하십시오. 외교가 중요한 때인 것 같으니.”
그렇게 말하기 직전, 이타르는 답지 않게 제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지금 무언가의 주술이 발동되고 있는 어깨를.
“안돼! 다이앤 백작……!”
이녹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온전히 듣기도 전에 아멜은 이를 악물었다.
온몸에 서늘한 기운이 퍼졌다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두려운 마음에 눈을 꼭 감으니 롤러코스터를 탈 때처럼 온몸이 이리저리로 쏠리는 기분이 들었다. 약간의 어지럼증, 그리고 속도감.
몸이 어디론가로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이 들 때쯤, 훈장 수여식 때 잠깐 보았던 코델리아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카일, 방금 뭐였…… 어?”
번뜩 눈을 뜬 아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까지 보고 있던 풍경들은 꿈처럼 사라지고 사방이 어두웠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군. 다이앤 영애. 아니, 이젠 다이앤 백작이지.”
눈앞에 나타난 남자의 눈동자에는 광기가 형형했다. 마라바스 라이델. 아멜은 그의 이름을 곱씹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팔목에 따끔한 감각이 느껴져 시선을 내렸을 땐, 또 한 번 색깔이 바뀐 팔찌가 힘없이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