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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99화 (99/134)

#99

나는 색깔이 변한 팔찌를 숨기며 주변을 찬찬히 둘러봤다. 빛이라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이 전부인 공간.

바닥재의 촉감이나 언뜻 보이는 가구들의 광택을 봐선 지하실이나 구금실 같은 폐쇄적인 장소에 나를 감금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잘 관리된 느낌도 아니야. 버려진 별궁 같은 곳인가.’

형체를 완벽히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눈앞의 마라바스 라이델뿐이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납치당한 게 분명하다.

트라이하 쪽에서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녹의 어깨를 중심으로 일순간 연쇄적으로 발동하던 주술들은 분명 누군가가 치밀하게 짜놓은 것이었다.

이곳으로 끌려오기 직전에 코델리아의 얼굴이 점멸하듯 보였던 것까지 생각하면 앞뒤가 맞았다.

그렇다면 마라바스와 이타르는 나를 끌어들이기 위해 꽤나 공을 들였다는 뜻.

‘미치겠네. 납치는 남의 나라 이야긴 줄 알았는데.’

다짜고짜 목에 칼이 들이밀어지는 급박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대포라도 쏴대는 것처럼 어두운 창밖이 번쩍번쩍하다 일순간 다시 캄캄해지기를 반복했다. 달밤에 체조라도 하는지 웬 함성까지.

‘설마 이타르가 반역이라도 일으킨 건 아니겠지……?’

아까 상황이 급박하지 않다고 했던 거 취소. 나는 도구나 인질, 어쩌면 둘 다의 역할을 위해 잡혀온 것이 분명했다.

나는 무심결에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들어 마라바스를 바라봤다. 기계팔과 다른 한 팔을 엮어 팔짱을 끼곤 나를 바라보는 모습에 은근한 여유가 서려 있었다.

“다이앤 백작. 널 이리로 데려온 것은 이타르 님의 뜻이다. 곧 그분이 일을 마치고 이곳을 찾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납치하는 건 어느 나라 예의지?”

“나라?”

마라바스는 뒤틀린 웃음을 짓곤 바닥에 앉아 있던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에서 환희마저 느껴졌기에 더 겁이 났다.

“더 이상 백작이 말하는 나라나 국가 같은 것은 없다. 세계는 아레테라는 단일 질서를 따르는 하나의 제국이 되겠지.”

“그게 네 욕망인가? 사람들 마음을 멋대로 지배해 움직이는 게?”

“그렇게 말하는 다이앤 백작은 어떤 욕망을 품었길래 닿은 상대의 마음을 읽는 아레테를 가지게 되었는지 궁금하군.”

젠장. 예상한 일이긴 했지만 마라바스는 내 아레테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모르니 섣불리 꾀를 쓸 수는 없는 노릇.

“뒷조사에 열을 낸 것 같으니 그냥 묻지. 나를 트라이하에 데려와 뭘 하려는 거야?”

내 질문을 들은 마라바스는 몸을 다시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그가 두꺼운 커튼을 휘어잡고 단번에 젖히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가슴팍에 백합을 꽂은 자들이 거대한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황궁의 시종과 시녀들을 거친 손길로 잡아들였다.

‘저 사람들은 그때 신문 기사에서 봤던 1황자의 측근들이잖아?’

3황자의 측근들이 1황자의 측근들을 잡아들이고 있다면 어떤 상황인지야 뻔했다. 예상대로 이아나의 기일에 맞춰 이타르가 반역을 일으킨 것이리라.

그렇다면 내가 도맡게 될 일이 무엇인지 짐작 갔다. 이아나의 죽음이 어떻게 된 일인지 1황자 측근들의 속마음을 읽어내라 하겠지.

하지만 마라바스는 다른 마음을 먹은 것처럼 흘리듯 물었다.

“백작의 아레테와 내 아레테는 둘 다 정신계지. 누구의 힘이 더 강한지 궁금하지 않나?”

“우위를 논하는 게 의미 없을 텐데.”

“글쎄. 과연 그럴까.”

마라바스가 내게 손을 뻗었다. 유체이탈을 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 아무래도 내게 아레테를 사용하려는 모양.

나는 반지를 낀 손을 꼭 쥐곤 그를 노려봤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공작의 아레테가 제법 단단하군.”

내게는 약혼식 장소에서 카일이 걸어준 방어 마법이 겹겹이 스며 있었다. 거기에 내가 가진 정신계 아레테도 약한 편이 아니라 마라바스의 수작이 통하지 않는 듯했다.

‘카일의 과잉보호가 이럴 때 빛을 발하네.’

고마운 마음과 동시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버티면 바네사든 카일이든 날 구하러 와줄 테니 무리해서 탈출을 시도했다가 붙잡히는 일은 만들지 않는 게 나았다.

내 정신을 지배하는 데 실패해 뭐라도 씹은 얼굴을 한 마라바스는 턱짓으로 제 인형 둘을 불러 내 곁을 지키게 했다.

“이타르 님이 이 여자를 찾으시면 내게 먼저 보고하도록.”

바로 데려가게 하지 않고 자길 거치게 하다니. 인형들에게 내리는 그의 명은 어딘가 의미심장했다.

***

아멜이 사라진 직후 하일의 황궁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홀에 남은 모두가 차이엘드 공작과 트라이하의 황태자를 보며 입을 쩍 벌렸다.

‘그 계산적인 차이엘드 공작이…….’

‘완전히 이성을 잃었잖아?’

‘작은 다이앤 백작이 차이엘드를 완전히 바꿨다는 게 진짜였나.’

이들의 격한 반응은 어쩌면 당연했다. 아멜이 사라진 직후 카일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녹의 멱살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타국의 황태자를 죽일 듯 노려보는 그의 얼굴에는 어느 때보다 깊은 분노가 가득했다. 사람을 죽이고도 남을 만큼 살기가 흘렀다.

“이 사람들이! 지금 구경 났나? 모두 물러가게.”

차이엘드 답지 않은 행동에 되려 놀란 베르드는 손을 훠이훠이 저어 보이며 주변 귀족들을 물렸다. 이런 광경을 모두에게 보여 봤자 득 될 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자국의 공작이 타국 황태자의 멱살을 잡는 그림은 외교상으로 아주 큰 문제가 있었다. 멱살 잡힌 이가 차기 황제라면 더더욱.

“차이엘드 공작…… 아니네. 주변은 내가 정리했으니 하던 거 마저 해. 하일드 집사장은 내가 돌보지.”

그를 말리려다 깨갱 한 베르드도 슬그머니 물러났다. 카일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내 약혼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차이엘드 공작. 흥분한 건 알겠는데 일단 이것 좀 놓고……윽!”

이녹은 마른침을 삼키며 카일의 시선을 피했다. 도무지 사람이 발산하는 살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거친 분노였다.

게다가 아멜리아 다이앤을 집어삼킨 건 누가 봐도 제 어깨에 있던 주술. 이타르의 짓이라 둘러댄다 한들 어차피 트라이하의 책임이었다.

“이녹. 내 약혼녀를 어디로 납치했는지 물었다.”

“미안하네. 그녀를 되찾는 데 적극 협조하도록 하지.”

“네 협조는 필요 없다. 당장 어디로 데려갔는지나 말해.”

이녹이 모른다고 대답할 때마다 카일의 심박이 빨라졌다. 멱살을 잡은 손아귀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차이엘드의 부와 명예 따위가 한 줌 재처럼 느껴졌다. 약혼녀는 고작 그런 것 따위와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존재였다.

피바람이 분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살벌한 적막을 깬 건 차이엘드 소속의 중년 연금술사였다.

“공작 전하. 황태자 전하의 어깨에 있던 포획 마법진은 마라바스 라이델의 것입니다.”

“확실한가?”

“예. 일전에 보고드렸던 대로 주술은 사용하는 사람마다 특성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주술이 수동으로 발동시키는 형식이라는 것인데…….”

“약혼식에 불청객이 있었나 보군.”

카일은 이녹의 멱을 놓고 이를 으득 갈았다. 주술의 주체가 마라바스라면 사랑하는 약혼녀는 트라이하로 납치당했을 확률이 높았다.

지금 당장 트라이하로 향한다고 해도 이동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게다가 군대를 이끌고 타국의 황궁에 쳐들어가는 건 명백한 선전포고.

“카일. 사랑과 평화, 알죠?”

1년 전만 해도 망설임 없이 움직였을 테지만 약혼녀의 가치관에 반쯤 세뇌된 지금은 조금 망설여졌다.

카일이 명분을 찾아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그때, 때마침 베르드의 시종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폐하! 트라이하에서 반역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황제인 베르드는 물론이고 그를 둘러싸고 있던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트라이하의 반역이라면 그 주체가 누구인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차이엘드 정보부의 브루노 또한 빠른 걸음으로 나타나 사건의 세부사항을 보고했다.

“이타르 님이 측근들과 함께 본궁을 점령했다는 소식입니다. 추가 정보가 들어오면 즉시 보고드리겠습니다.”

카일은 다리가 풀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이녹을 바라봤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놀란 얼굴로 브루노를 바라보는 게 애처롭기까지 했으나 그건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차이엘드의 병력을 동원하면서도 트라이하와 대립각을 세우지 않을 방법을 찾아낸 카일은 가만히 몸을 숙여 이녹과 눈을 맞췄다.

“트라이하 황태자의 이름을 걸고 제게 정식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황궁 탈환을 돕겠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무게가 실려 있었으나 이녹에게는 달리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카일의 제안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몰아치는 상황 속에서 그나마 나은 해결책이었다.

의도한 바가 아닐지라도 차이엘드의 피앙세를 트라이하로 넘겨버렸으니 일단 그와 우호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옳았다.

“……차이엘드 공작. 시국이 어지러우니 힘을 빌려줬으면 합니다. 트라이하의 황태자로서 이 도움은 절대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카일이 다소 뻔뻔하게 답하자 클레어가 문을 지키던 시종에게 눈짓을 보냈다. 단단히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순간.

“저게…… 다 뭐야?”

“웬 암살자들이 이렇게…….”

“차이엘드가 숨겨둔 병력이 이렇게 많았나?”

어두운 옷을 갖춰 입은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절도 있는 걸음으로 홀에 들어왔다. 황궁 곳곳을 지키던 황궁의 시종들이 입을 쩍 벌리는 게 당연하다 싶을 정도의 규모였다.

주군의 눈동자에 서린 분노와 조급함을 읽어낸 차이엘드의 병력들은 바짝 긴장하곤 각 맞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전하. 클레어 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정보부 요원들, 특수 암살 부대, 공수부대, 광역 말살 부대, 주술 대항 특수부대 및 일반 병력을 모두 준비시켰습니다. 하명하십시오.”

이녹이 귀환용으로 가져온 이동의 아레테가 담긴 스크롤을 펼치던 카일은 잠시 멈칫했다.

이들은 차이엘드 최고의 병력이었고 능력은 말할 것도 없이 출중했다. 그에 걸맞게 살벌한 이름들을 지니고 있었다.

‘……누나가 무서워하실 것 같은데.’

구하러 갔는데 되려 아멜이 겁을 먹는다면 그만큼 좋지 않은 그림도 없다. 잠시 고민한 카일은 스크롤을 사용하며 덧붙였다.

“이제부터 당신들은 차이엘드 평화유지군 소속입니다.”

“평화……?”

“평화유지군. 이름 그대로 사랑과 평화를 위해 싸우는 겁니다.”

차이엘드 소속의 특수부대원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자들까지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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