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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00화 (100/134)

#100

이타르는 굳게 쥐고 있던 칼을 휘둘러 공중을 베어냈다. 후드득 칼날에서 떨어져 나온 핏방울들이 바닥에 붉은 줄을 내었다.

바닥에 들러붙어 바르르 떨리는 손 하나가 그 선을 넘어 이타르의 신발 근처까지 뻗쳐왔다. 이타르는 그 손등을 주저 없이 짓밟으며 말했다.

“목숨이 붙어 있는 놈들만 골라 부황께서 계신 지하실로 옮겨라. 나머진 알아서 처리해.”

그 명을 들은 수하는 황제궁에 널브러진 인체들을 바라보았다. 황제와 황태자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모두 이곳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무장도 하지 못한 채 3황자의 지지세력이 퍼붓는 공격을 받았다. 실로 포섭이나 후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반역이었다.

애당초 황위를 이어갈 생각이 없기에 공격은 더욱 거침없었고, 줄을 잘못 선 죄로 수많은 생명의 불꽃이 꺼졌다. 이타르는 그 속에서 울상을 짓는 여동생의 얼굴을 잠시 보았으나 그뿐이었다.

피바람이 잠시 잔잔해졌다는 사실에 긴장을 늦춘 베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광경에 숨이 턱 막히며, 문득 오래전 들었던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이대로 그분까지 죽게 할 수는 없지 않나. 희생은 한 명이면 족하지.”

마라바스 라이델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리 말했다. 베놈은 시체를 피해 이타르를 뒤따르며 짧은 번뇌에 빠졌다.

그때, 나는 왜 그의 말대로 행동하는 것이 주군을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던가. 지금 내가 밟고 있는 피는 그 선택의 결과인가.

그렇다면 나는 이토록 무사할 자격이 있나.

쉬이 대답을 내리지 못한 채 마저 걸음을 떼려는데 이타르의 따끔한 시선이 느껴졌다. 분노도 욕망도 담겨 있지 않은 눈이었다.

“지금쯤이면 하일 쪽에도 반역 소식이 전해졌겠지. 슬슬 아멜리아 다이앤을 이용할 때군. 베놈, 일전에 말한 물건은 준비되었나.”

“자백제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여분까지 진작 준비해 두었습니다. 조금만 들이켜도 전하의 물음에 진실만을 답하게 될 것입니다.”

자백제는 오랜 시도 끝에 개발된 연금술 신약의 별칭이었다. 복용한 자가 거짓을 말하면 곧바로 심장에 무리가 가는 구조였다.

그 약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당시, 이타르는 곧바로 아멜리아 다이앤을 떠올렸다.

자백제는 삼킨 말을 억지로 뱉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니 그 약을 이용해 이아나의 죽음을 밝히려거든 그녀가 필요했다.

이타르는 무심결에 제 앞에 무릎 꿇고 진실만을 고하는 아멜을 상상했다. 저를 올려다보는 녹갈색 눈동자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묘한 전율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우선 이아나의 죽음에 대한 모든 것을 밝힌 후. 그 후에도 자백제의 효력이 남아 있다면 사적인 질문 몇 개쯤은 해도 좋으리라.

“베놈. 마라바스에게 가 다이앤 백작을 지하실로 데려오라 전해라. 나는 먼저 가 있겠다.”

“알겠습니다.”

베놈은 조금의 멈칫거림도 없이 자리를 떴다. 이타르도 곧바로 걸음을 옮기려다 잠시 그 자리에 섰다. 기류가 난동을 부리는 것이 무언가가 등장한 모양.

‘예상보다 훨씬 빠른 출동이군.’

아멜리아 다이앤을 탈환하기 위한 무언가가 트라이하 황궁에 도착한 것이 분명했다. 이타르는 행동을 재촉하기로 하곤 걸음을 빨리했다.

***

마라바스 라이델은 내 정신을 지배하지 못해 상당히 불만족스러운 눈치였다.

눈에 서려 있던 약간의 기대감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날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의 눈은 뜨겁게 달아오르다 차갑게 식기를 반복했다. 나를 내려다볼 때면 눈동자에 불길이 일었다가, 가끔 무전을 들은 경호원처럼 눈동자를 비낄 때면 허상이라도 보는 듯 아득했다.

‘정말 무언가를 보고 있을 수도 있어. 슬쩍 떠볼까.’

나는 말을 걸 타이밍을 재느라 그를 바라봤다. 오들오들 떠는 것과는 거리가 먼 내 모습이 그에게는 흥미롭게 보였을까.

“다이앤 영애. 그대는 볼수록 신기하군.”

“이젠 다이앤 백작이라고 불러야 할 텐데. 내가 작위를 받을 때도 지켜보고 있었을 테니 잘 알 것 아냐.”

“그것까지 눈치채고 있었나?”

“네가 코델리아의 시야를 훔쳐본다는 건 나뿐만 아니라 차이엘드와 다이앤의 모두가 대충 예상하고 있던 일이지.”

수를 읽혀 기분이 언짢을 법도 한데 그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코델리아를 소환하는 것이 즐거운 것일까.

곧 스치듯 잠깐 만난 적이 있는 노파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일드 집사장님의 부인이라던 코델리아 웨일.

기사였던 과거는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은 몸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탁했고 행동은 정신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어딘가 엇나갔다. 마라바스는 신음을 내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아멜리아 다이앤. 그대는 코델리아의 용도까지 눈치챘나?”

물론 그가 코델리아를 어떤 식으로 이용해먹고 있는지는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물건에나 사용할 법한 ‘용도’라는 단어에 기분이 상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라바스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아레테를 일으켰다.

그가 기계팔에 완장처럼 감아둔 하르모니아의 목걸이에 짙은 남색의 빛무리가 일었다. 동시에 코델리아의 몸에서 안개 같은 투명한 빛이 피어올랐다.

두 빛이 뒤섞이는 순간.

“윽……!”

나는 고통스럽게 울리는 머리를 싸맸다. 누군가가 두개골을 열고 손으로 뇌를 마구 휘젓는 느낌. 그 가운데 마라바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내 아레테가 영애처럼 속마음을 읽는 게 아니라 아쉽군.」

「영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한데.」

「아쉬운 대로 영애의 정신을 잠깐 지배하도록 할까. 마침 해줘야 할 일도 있으니.」

듣기 거북한 목소리. 마라바스는 코델리아를 이용해 제 아레테를 증폭시켜 내 정신을 지배하려 했다.

아레테가 불이라면 코델리아의 힘은 기름이었다. 아레테의 위력이 몇 배로 강해져 이대로 몇 분만 더 있으면 정신을 완전히 잃을 것만 같았다.

“싫어…… 그만……!”

목소리를 짜내도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주변에 들고 휘두를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면 아예 마라바스를 공격했겠지만 시야 확보조차 어려웠다.

‘켈트만에서 카일도 이렇게 고통스러웠을까.’

아니, 카일은 나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제 앞에선 입안의 혀처럼 굴던 영랑들이 깊이 숨기고 있던 본색을 드러내는데 어찌 정신을 안 놓을까.

가고일 백작에게서 읽어냈던 그 장면을 떠올리자 더욱 마라바스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아졌다. 나는 치맛자락을 꼭 쥐고 버텼다.

“영애는 질기군.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네 음심은 필요 없…… 윽!”

더 이상 버티는 건 힘들다는 생각이 들 무렵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마라바스는 흠칫 놀라며 아레테를 잠깐 거두었다.

안에서 문을 열어줄 때까지 난동 없이 기다리는 것을 보면 하일에서 온 내 구원자들은 아니다. 나는 숨을 고르며 마라바스가 보일 행동에 신경을 집중했다.

마라바스가 문을 열자 사내 하나가 들어왔다. 나는 그의 얼굴을 알았다. 이타르가 백합 훈장 수여식 때 대동했던 수하 베놈이었다.

‘프링글스 사장님이 모아다 준 자료에서도 베놈의 이름이 꽤 나왔었지.’

이타르에게는 영애들의 유모 같은 존재가 아니던가. 줄곧 3황자의 최측근이라는 타이틀을 지녀온 사람이기도 하고.

마라바스도 비슷한 입장이리라 생각했는데 둘의 사이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베놈 쪽에서 은근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게 보였다.

“마라바스. 이타르 님께서 일을 시작하려 하시니 필요한 것들을 갖춰 지하실로 자리를 옮기도록.”

“……알겠다.”

베놈은 이타르의 명을 전하기 위해 잠깐 들른 듯 금방 방을 빠져나갔다. 일부러인지 내 쪽으로는 아예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마라바스는 문 쪽을 오래도록 쳐다봤다. 조금 이상한 그림이었다.

‘왜 같은 이타르의 측근인 베놈을 저렇게나 경계하는 거지?’

방금도 그렇다. 코델리아를 이용해 아레테까지 증폭시킨 마라바스였다. 작정하고 덤비신 덕에 조금만 더 했다면 내 정신을 완전히 지배했을 텐데 베놈이 오자 일을 멈추고 숨겼다.

나를 이곳으로 데려와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이타르의 명이라면 그의 충신인 베놈에게는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 도와달라고 한다면 모를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내 정신을 지배하려 했던 건 마라바스의 단독행동이었을 확률이 높아. 나를 지배해서 어떤 식으로 사용하려는 거지?’

마라바스는 같은 편인 이타르와 베놈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비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반역이 이뤄지는 지금도 철저히 감추는 것이라면 파급력이 대단할 터.

뭘 숨기고 있는지 알아낸다면 똘똘 뭉쳐 반역을 일으키는 트라이하 세력들을 와해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정보를 얻을 방법이 없다.

속으로 입술을 짓씹을 때 마라바스가 코델리아를 내 쪽으로 끌고 왔다. 힘을 사용해 지친 것인지 코델리아의 몸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들었을 테니 거듭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곧장 지하실로 갈 테니 코델리아의 몸을 붙잡도록.”

마라바스는 무심히 말하곤 이동의 아레테가 담긴 스크롤을 꺼냈다. 나는 비틀거리는 코델리아의 몸을 꼭 붙잡아주었다.

그때, 기대하지도 않았던 기적이 벌어졌다.

「불쌍한 아가씨…….」

「나는 괜찮지만…….」

「드디어 끝을 볼 작정인가…….」

트라이하에서 산 송장처럼 지내오며 그간의 모든 것을 봐온 코델리아의 속마음이 불완전하게나마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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