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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01화 (101/134)

#101

이타르는 아멜 일행보다 한발 앞서 지하실에 들어왔다. 축축한 공기와 곳곳에서 들려오는 1황자 측근들의 신음이 그를 맞이했다.

‘이아나. 이젠 정말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베놈은 곧 들이닥칠 차이엘드 놈들을 상대하라고 보냈다. 마라바스는 행동이 원체 느리니 빨리 오지 않을 것이다.

이타르는 수하들을 열 걸음 뒤에 대기시키고 아주 잠깐만 부황과 독대하기로 했다.

수하가 들고 있던 등불을 받아든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초주검들을 발로 툭툭 밀어내며 레오시스 2세의 곁으로 갔다.

의자에 앉힌 채 묶여 있는 그는 황제의 의복과 관을 빼앗겼음에도 위엄을 풍겼다. 어렸을 때부터 존경하던 모습 그대로.

‘그런 당신이 왜…….’

이아나가 죽었다는 갑작스러운 소식을 들었을 당시 이타르는 부황에게 달려갔다.

비록 1황자와 저가 황태자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시기였다지만 황제의 현명함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황제는 이녹을 황태자로 앉히고 이아나의 죽음을 심장 발작으로 인한 돌연사로 결론지었다.

살해 의혹에는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도 않았다. 이타르는 그 모든 행동들이 원망스러워 치를 떨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등불을 드문드문 밝혀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이타르의 목소리만이 울렸다. 황제가 의연히 떨군 고개를 들지 않고 침묵만을 지키자 이타르의 언성이 높아졌다.

“왜 그 애의 죽음을 한낱 기삿거리로 생각하신 겁니까. 그 애를 누구보다 사랑하지 않으셨습니까.”

“…….”

“사랑에 빠진 그 애가 연인에게 받은 백합 다발을 껴안고 기뻐하던 것을 당신도 보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황제는 침묵만을 지켰다. 이타르는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어깨를 우악스레 흔들며 대답을 재촉했다.

툭―

맥없이 흔들리던 황제의 머리가 뒤로 꺾여 넘어갔다. 그제야 이타르는 굳건한 어깨를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고 중얼거렸다.

“대체 언제…….”

황제가 죽었다. 끝까지 위엄을 지키고 있어 함께 지하실에 잡혀온 자들조차 눈치채지 못한 죽음이었다.

이타르는 한동안 차게 식은 부황을 내려다보았다. 어의들을 모조리 죽일 때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건 아니었으나 이건 그가 원하던 결말이 아니었다.

“3황자, 당신은 죽어도 그분과 같은 곳에 묻히지 못할 것이오!”

“괴물! 그분이 당신께 어떤 은혜를 베풀었는데……!”

함께 잡아온 1황자와 황제의 지지세력들이 차가운 눈빛을 보내온다. 이타르는 손끝이 하얘질 정도로 주먹을 꼭 쥐곤 소리쳤다.

“닥쳐.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아무것도 모르는 건 3황자 당신…… 커헉!”

이타르의 칼끝이 말대꾸를 한 귀족의 입을 단번에 찔렀다. 그를 괴물 바라보듯 하는 시선들이 더욱 굳건해졌다.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어졌다.

죽어버린 여동생이 어느 때보다도 보고 싶었다.

***

그간 내가 목격한 코델리아는 초주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생기가 없고 정적이었다. 그런 그녀의 속마음이라니.

나는 마라바스가 잠시 책상에서 무언가를 챙기는 틈에 코델리아와 눈을 맞추었다. 탁한 눈동자였지만 코델리아도 분명 나를 봤다.

「왜 갑자기 눈을…….」

「……두렵나.」

「차이엘드의 피앙세…….」

고장 난 라디오처럼 드문드문 끊기는 속마음으로나마 따뜻한 말씨가 느껴져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가능하다면 이 사람을 데리고 트라이하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코델리아, 나는 당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요.”

내가 입 모양으로만 말하자 코델리아의 눈이 조금 동그래졌다. 속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걸 보니 내 말을 알아들은 게 분명하다.

마라바스가 작업을 서두른 탓에 우리 둘의 대화는 금방 끊겼지만 한 번 통한 눈빛은 끊어지지 않았다.

음습한 지하실의 입구에 들어서 이타르를 마주하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코델리아가 전해오는 수많은 정보들을 받아들였다.

‘코델리아는 대단한 사람이구나. 내가 이런 피폐한 삶을 살았다면 1년도 되기 전에 돌아버렸을 텐데.’

물리적으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코델리아라는 기사가 얼마나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인지 잘 알겠다.

마라바스의 정신 지배 상태에서 빠져나오게 해줄 그녀의 가장 강한 욕망이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걱정 말아요. 곧 우릴 구하러 누군가가 올 거예요.’

코델리아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으나 입을 벙긋거릴 수 없었다. 마라바스가 고개를 돌린 방향에 이타르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안색은 일전에 봤던 것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어 병마에 시달리다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다이앤 백작. 오랜만이군.”

“전하를 이런 식으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표정을 보니 제가 이곳에 잡혀 온 게 착오나 실수 때문은 아닌 듯합니다.”

“그대를 데려온 것은 짐작한 대로 내 뜻이다. 상대의 마음을 읽는 아레테가 필요하니 잠깐 빌려주었으면 하는데.”

하일에 시체들을 풀어 황제의 약혼식을 쑥대밭으로 만든 사람이 잠깐 힘을 빌려달라는 말을 하니 기가 찼다.

타이밍이 나쁘다면 원하는 정보를 내준 후에 나는 죽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하께서는 생각보다 저를 믿으시나 봅니다. 제가 읽어낸 속마음을 말하지 않고 거짓을 말하면 어쩌실 겁니까.”

“역시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군.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이타르가 작은 유리병의 마개를 열었다. 아레테가 듣지 않는 영약과는 다른 빛깔.

“최근 트라이하에서 개발된 자백제다. 착상부터 개발까지 10년도 넘게 걸렸지.”

그는 강제로 약을 먹이려는 듯 성큼 다가왔다. 나는 질겁을 하며 뒤로 물러나는 대신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전하께 한 가지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곧 제 입을 통해 알게 되실 진실은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과 다를지도 모릅니다.”

아니,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 증거로 마라바스의 표정이 조금 흐트러졌다.

“진실을 안 후가 진실을 알기 전보다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저와 코델리아를 이용하셔야겠습니까?”

“뭔가 알고 있나 보군. 하지만 나는 지금 그대의 말을 믿지 않는다.”

이타르가 내 턱을 잡기 전에 내가 입을 벌렸다. 갓 개발된 약물을 순순히 마시는 건 위험한 일이었지만 이 약은 아니었다.

원작에서 반역에 성공해 정권을 잡은 이타르가 전쟁 자금을 모았던 수단이 바로 이 자백제였다. 부작용이 하나도 없어 윤리적인 이유로 생산이 막힐 때까지 불티나게 팔렸다지.

이타르는 제 마음쯤이야 읽혀도 상관없다는 듯 내 턱을 틀어쥐었다. 입안으로 달콤쌉싸름한 액체가 들어왔다. 내가 망설임 없이 그것을 삼키자 이타르는 조금 당황한 듯했다.

어느 정도 약병이 비워지자 이타르는 남은 약을 손끝에 찍어 내 이마에 묻혔다. 조금 화끈거리는 느낌과 동시에 짧게나마 그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어차피 부황께서 승하하신 한 되돌릴 수 없어.」

「그나저나 차이엘드 놈들이 생각보다 빨리 왔군. 베놈이 잘 처리하고 있겠지.」

이타르의 속마음에는 반가운 소식이 섞여 있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버티면 악몽 같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몸에 힘이 들어갔다.

***

이동의 아레테를 타고 트라이하에 도착한 차이엘드의 병사들은 순식간에 정문의 방어선을 뚫었다.

반역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 정문에는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의 절반 이상이 배치되어 있었건만. 예상을 훨씬 웃도는 돌파력에 베놈은 이를 갈았다.

놈들은 이제 곧 자신과 소규모의 연금술 부대가 지키고 있는 본궁으로 올 것이다. 이곳마저 내준다면 반역도 목숨도 이곳에서 끝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끝내 궁금한 것을 알지 못하시겠지.’

어떻게 해서든 본궁과 바로 그 아래에 있는 지하실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다질 즈음 수하 하나가 고했다.

“저기 차이엘드의 문장이 보입니다!”

“차이엘드 소속의 특, 특수 암살 부대입니다……!”

“광역 말살 부대와 정보부대도……”

“총, 총기사단장 페르슈 다이앤도 있습니다!”

차이엘드는 거대한 자본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냥개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무예에 관심이 있는 자들은 그중 몇몇 부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베놈의 작전상 후퇴 선언만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물러나지 않고 들으라는 듯 외쳤다.

“내빼는 놈이 있다면 내 이 손으로 직접 찔러 죽일 것이다! 암살 부대든, 말살 부대든 우리에게는 연금술의 힘이 있다!”

그의 쩌렁쩌렁한 외침은 상당한 거리를 벌리고 대치 중인 카일리안 차이엘드에게도 들렸다.

약혼녀를 무려 40분 동안이나 빼앗긴 그는 세상 어느 때보다도 흉포한 짐승이 되어 있었다. 눈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카일의 옆에 선 바네사도 심기가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경호할 마님을 무려 40분이나 잃은 그녀는 눈앞의 트라이하인들을 당장이라도 찢어발기고 싶었다.

소중한 외동딸 아멜을 무려 40분 동안이나 내준 페르슈 다이앤 또한 형형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는 적장의 목을 따 술을 담글 기세였다.

“공작 전하. 이곳은 제가 맡을 테니 바네사 양과 함께 아멜을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다이앤 백작의 한마디에 카일과 바네사는 즉각 움직였다. 곧 차이엘드의 부대원들이 누나 님의 아버지의 명을 기다렸다.

그는 검을 뽑아 쥐곤 기합을 넣었다. 양손에서 솟구치는 검기가 하늘에 닿을 듯 높았다.

“내 딸 납치해간 놈들은 내 손으로 주님께 보낸다!”

콰과광―!

그의 일격에 천지가 뒤흔들렸다. 동시에 차이엘드의 부대원들이 공격계 연금술 주술이 담긴 스크롤들을 마구 찢기 시작했다.

주술이 발동됨에 따라 번개가 내리꽂히고 불기둥이 치솟았다.

이 정도 주술이 담긴 스크롤이라면 값비쌀 터. 잠시 멍하던 베놈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군사들에게 외쳤다.

“상대는 연금술의 가호를 받지 못한 미개한 하일 제국민이다! 저들의 스크롤은 한정되어 있으니 침착하게 주술을 사용하라!”

쩌렁쩌렁한 외침이었음에도 차이엘드의 평화유지군들은 조금도 기세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 대량의 스크롤을 마구 찢어댔다.

“저 양은 대체…….”

“베놈 님! 저희 쪽 연금술사들이 손을 못 쓰고 있습니다!”

방어계 주술을 쓰고 있던 트라이하의 연금술사들이 뒤로 넘어가자 차이엘드의 부대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질주해 적들을 섬멸했다.

한 번 방어막이 뚫리자 페르슈 다이앤의 무시무시한 검기도 피할 수 없었다.

연금술사들이 주술을 구현하는 속도보다 차이엘드가 돈으로 산 스크롤을 찢는 속도가 압도적으로 빨랐다.

“젠장……!”

베놈은 욕지기를 하며 추가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뒤로 몸을 내뺐다. 슬쩍 보이는 차이엘드의 연금술 스크롤은 산처럼 많았다.

훗날 자주 입에 오르내리게 될 ‘무한한 보급으로 승리하는 차이엘드’라는 별칭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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