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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02화 (102/134)

#102

하일 황궁의 손님용 방. 클레어는 턱을 괴고 창밖을 내다보다 어쩐지 제 신세가 딱하다고 생각되었다.

아멜이 납치되었다는데 직접 구하러 가지는 못할망정 얌전히 집이나 지키고 있는 꼴이라니. 이동의 아레테를 부여받은 것이 다 무용하게 느껴졌다.

머나먼 타국에서 탱글탱글 말려 흐르는 아멜의 머리카락이 상하기라도 하면 무척 기분이 나쁠 것 같았다. 아니, 기분이 나쁜 데에서 끝나지 않으리라.

클레어는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아멜이 제 선물을 값지게 사용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섬광의 뿌리는 결국 바네사의 목에 걸렸지만 아멜이 무척 흐뭇해하지 않았던가.

카일리안과의 소리 없는 선물 전쟁에서 또다시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클레어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클레어 님. 집사장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차이엘드 병원장 폴 레미안이 말했다. 그 소식에 그녀의 기분은 조금 더 나아졌다.

연금술사들에게 현금을 두둑이 쥐여준 결과 그들은 병원의 인력들과 합심해 하일드에게 적합한 의료적 조치를 해냈다. 또다시 차이엘드의 위대한 자본이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폴. 집사장의 상태에 대해 보고하도록.”

“집사장님은 주술에 내상을 입으신 데다 정신적 충격이 크시어 한동안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당분간은 걷는 것도 힘드실 겁니다.”

병원장의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하일드는 누워 있던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앉는 행동만으로도 고통을 호소했다.

“집사장님. 첫째도 안정, 둘째도 안정입니다!”

“신경 써 주어 고맙네, 폴. 자네 말대로 안정을 취하는 게 좋겠어.”

하일드는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미소를 보였다.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이 안도하며 공작저로 돌아가자는 명을 기다렸다.

그곳에 가 반드시 돌아올 누나 님과 공작 전하를 위한 식사와 목욕물, 마법의 사탕 여러 개를 준비해 두는 것이 고용인의 도리이리라.

그러나 하일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클레어는 엉뚱한 명을 내렸다.

“집사장은 거동이 불편할 정도이니 이곳에서 조금 더 쉬다 가는 게 낫겠군. 너희는 먼저 돌아가 주인의 귀환을 맞을 준비를 해두도록.”

“하지만…….”

“언제부터 내 명에 토를 달았지?”

고용인들은 헙 입을 다물곤 언제 되물었냐는 듯 신속히 움직였다. 안 그래도 누나 님이 납치당해 신경이 예민해진 레이디 클레어의 심기를 거스를 바보는 이곳에 없었다.

방 안에 둘만 남게 되었을 무렵 클레어는 팔짱을 끼고 하일드를 바라봤다. 병자에게 어디서 저런 기운이 나오는지 눈빛에 간절함이 가득했다.

“레이디 클레어.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노파의 정체가 제…….”

“사라진 아내, 코델리아 웨일이라는 거?”

하일드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훈장 수여식 때 아멜에게 마수를 푼 게 코델리아였더군. 조금 더 확실해지면 말해주려 했는데 시체들을 끌고 약혼식장에 쳐들어올 줄이야.”

“……대체 제 아내가 왜 그곳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찾았을 땐 분명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레이디 클레어, 부디 저를 그곳으로 보내주십시오.”

“집사장. 레미안 병원장의 말을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지금 가면 그대는 죽을지도 몰라.”

하일드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답했다.

“레이디 클레어. 저는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네 부인은 이미 네가 알던 모습이 아니다. 지금쯤 마라바스의 손에 놀아나 더한 모습으로 망가졌을지도 모르지.”

“…….”

“게다가 여러 사람들을 해치는 데에 분명 가담했어. 하일로 데려온다고 한들 그녀가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왕족과 황족을 여럿 건드렸다. 원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황실 백합 훈장 수여식과 황제의 약혼식을 망친 것 또한 그녀였다.

하지만 하일드는 이번에도 즉시 답했다.

“그렇기에 제가 가야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코델리아의 곁에 있어 주어야 합니다.”

클레어는 겨우 몇 마디 말을 마치고 배를 움켜쥐는 하일드를 보며 혀를 찼다. 저런 몸으로 가서 뭘 하겠다고.

“하일드. 네 가장 큰 의무는 차이엘드 공작저를 돌보는 것일 텐데.”

“송구합니다.”

조금도 망설임 없는 목소리였다. 클레어는 한숨을 쉬며 손가락을 튕겼다. 먼 거리도 가뿐히 뛰어넘는 그녀의 아레테가 하일드 집사장을 감쌌다.

“차이엘드는 직무 유기를 두고 보지 않는다. 적당한 후임자를 구해놓고 나갈 수 있을 정도로만 무리하도록.”

“감사합니다.”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뛰어드는 것인데도 하일드의 얼굴은 환했다. 클레어는 그가 사라진 자리에 가만히 앉아 상념에 잠겼다.

차이엘드 공작저를 저버리고 껍데기만 남았을지도 모르는 아내를 찾아 아픈 몸을 이끌고 떠나는 이유.

‘의무감이거나 사랑이겠군.’

전자라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후자라면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조금은 서글퍼졌다.

계승 전쟁에 내몰리는 것들은 모두 가련하다는 잡념이 그녀의 머릿속에 잠시 스쳐 지나갔다.

***

카일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눈앞의 적을 베었다. 깊은 상처를 낸 다음 약혼녀의 행적을 물어도 트라이하의 병사는 모른다는 말로 일관했다.

카일은 그를 바닥에 내팽개치곤 지붕 위를 바라봤다. 빛의 창을 여러 개 빚어 주변 적들을 섬멸하는 바네사의 얼굴도 좋지 않았다.

“대체 어디에 숨긴 건지…… 코델리아의 기운은 분명 본궁에서 느껴지는데 말이에요.”

“숨겨진 공간이 있나 보군.”

둘의 날카로운 눈빛이 한 남자에게로 향했다. 제 편인 귀족들이 모조리 잡혀가는 바람에 안전을 위해 차이엘드의 일반 부대원처럼 위장하고 있던 이녹이었다.

원래도 평화주의자인 그는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와 죽어 나가는 트라이하의 병사들을 보며 정신을 반쯤 놓은 상태였다.

거기에 더해 레오시스 2세의 행방도 알 수 없으니 이녹은 초조함에 어딘가 어눌해졌다. 카일은 매서운 눈으로 그를 다그쳤다.

“시간이 없으니 얼른 말하십시오. 본궁에 숨겨진 공간이 있습니까?”

“숨겨진 공간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 제가 본궁이 아닌 황태자궁에서 생활하는 몸이라…….”

“쓸데없는 정보는 됐고 필요한 것만 말하십시오. 황궁에 머무르는 전하의 지지세력이라면 인원수가 상당할 텐데, 그들이 모두 잡혀 들어갈 장소라면 많지 않을 겁니다.”

“아, 최상층과 지붕 사이의 공간과 지하실 정도는 모든 궁에 있을 겁니다.”

카일은 솟구치는 분노를 꼭 억눌렀다. 마음 같아서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황궁을 날려버린 다음 눈으로 아멜을 찾고 싶었지만 그녀의 위치를 몰라 그럴 수 없었다.

‘……제발 무사하기를.’

무사하기만 하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구할 테니. 카일은 간절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수색을 맡은 곳은 지하실이었다.

***

마라바스는 손발이 묶여 있는 나를 의자에 앉히고 아예 발목까지 옭아매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그가 코델리아의 머리채를 우악스레 쥐고 내 발치에 내려놓으니 그녀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키며 안개 같은 희뿌연 빛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타르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부탁인지 명령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아멜리아 다이앤. 이 지하실의 다른 방에는 내 누이동생인 이아나의 죽음에 대해 아는 자들이 있다. 허상이 아닌 진실을 아는 자들이지.”

“…….”

“지금 당장 그들의 속마음을 읽어 내게 보고하라.”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다 코델리아의 손끝에 내 구두코를 살짝 댄 채 정신을 집중했다.

코델리아의 마음을 읽겠다고 마음먹었을 뿐인데 그녀는 물론 이 공간에 있는 자들의 속마음이 서서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녹갈색 기류의 형상을 한 내 아레테의 힘이 잔잔한 바람처럼 불더니 이내 폭풍처럼 휘몰았다. 마라바스와 이타르 또한 인상을 찌푸리고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

“다이앤 백작, 옆 방에 갇혀 있는 자들의 속마음이 들리나?”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에게 가 누이동생의 죽음에 대해 묻겠다. 그들의 마음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어내도록.”

이타르와 마라바스는 그렇게 내가 있는 방에서 사라졌다. 나는 눈을 감고 아레테를 멈추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주변에 있는 무수한 사람들의 속마음이 들려오는 건 꼭 하늘에서 쏟아지는 수천 개의 우박을 맨몸으로 맞는 기분이었다.

가장 많이 들리는 것은 승하하신 레오시스 2세를 향한 애도, 그리고 그를 죽게 만든 이타르를 향한 비난과 저주였다.

「그토록 현명하셨던 황제께서 이리도 허무하게…….」

「3황자가 살해한 것이나 다름없지. 어의를 대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라는 걸 뻔히 알면서…….」

「살인자. 괴물. 그분께서 어떤 배려를 해주셨는지도 모르고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죽어 마땅한 놈!」

내게 향하는 나쁜 말들이 아닌 것을 잘 안다. 그러나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리고 속이 좋지 않았다.

이 짓을 이어가자 정신적인 고통이 커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누구라도 좋으니 나타나 제발 코델리아의 아레테 증폭 효과를 멈추어주기를 바랐다.

아니, 사실 가장 와 주었으면 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카일리안 차이엘드. 환청처럼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여기 있었으면 좋겠는데.」

「어디 다치진 않았을까…….」

걱정 가득한 속마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 번 그의 마음을 듣자 주파수를 찾은 라디오처럼 그의 속마음만 계속해서 들려왔다.

곧 문이 벌컥 열렸다. 매서운 바람의 형태로 방 안에 휘몰고 있는 내 아레테 때문에 카일은 팔로 눈가를 가렸다.

“누나!”

“카일……!”

분명 서로가 서로를 불렀으나 바람 때문에 목소리가 잘 닿지 않았다. 걸음을 떼기도 힘든 강풍임에도 카일은 힘겹게 내 쪽을 살폈다.

「일단 바람을 멈춰야 해.」

「이 바람에는 일전에 마라바스에게 정신을 지배당할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기운이 서려 있군.」

눈치 빠른 내 약혼자는 내 바람에 섞인 코델리아의 힘을 알아챘다. 이대로라면 코델리아를 내게서 떼어내 아레테의 증폭을 중지시켜야 한다는 생각까지는 금방이리라.

「지금도 고통스러울 텐데. 나도 괴로웠으니까…….」

「누나까지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

「저번엔 내 약혼녀가 나를 구했으니 이번엔 내가…….」

기특한 속마음에 마음이 뭉클해지려는데 카일의 추리가 어째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했다.

「마라바스의 아레테를 해제하는 방법이라면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 욕망 자극.」

「다행히 보는 사람이 없군.」

「내 사랑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

강풍을 견디느라 벽을 붙잡고 있던 손이 슬쩍 넥타이 쪽으로 옮겨갔다. 잠깐. 손이 왜 그쪽으로 가? 설마……

“누나!”

두 글자로 내 시선을 끌어당긴 카일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넥타이와 셔츠까지 거칠게 끌어당겼다.

바람이 몹시도 강하여 매끈한 상체가 단번에 드러났다. 바닥에 누워 있던 코델리아가 충격을 받았는지 바람이 조금 잠잠해졌다.

그 틈을 타 카일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유혹 서린 목소리를 냈다.

“누나, 조금 더운 것 같지 않습니까?”

아니야, 카일! 그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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