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마라바스의 정신 지배는 무의식 속 강력한 욕망을 자극하면 깨져버린다는 것은 켈트만에서 학습한 바 있었다.
마라바스에게 정신을 내주었을 때, 약혼녀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긋한 목소리로 욕망을 자극했다.
“카일…… 누나 추운데.”
그 장면을 보았을 당시에 어떤 기분이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정신 지배고 나발이고 눈앞의 약혼녀만 보였다.
복수니 증오니 하는 것보다 찡긋 엉큼한 눈짓을 보내오는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즉시 그렇게 했고.
‘그런데 왜…… 아무런 효과도 없는 거지?’
하지만 비슷한 유혹의 말을 내뱉어도 아레테의 바람은 사그라들 기미가 안 보였다. 오히려 더 강해진 것 같기도 하다.
카일은 은근히 초조한 마음에 사로잡혀 한마디를 덧붙였다.
“누나, 더우시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는데.”
사심이 가득 낀 유혹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던 아멜은 애가 타 미칠 노릇이었다.
그의 유혹은 결코 보기 나쁜 광경이 아니었다. 탄탄한 가슴팍과 군살 하나 없는 복근, 매끈한 허리선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예쁘고 섹시한 연하남이 날 좀 봐달라며 유혹을 퍼붓고 있는데 어느 누나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단지 지금 그녀는 마라바스에게 정신을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효과가 없을 뿐이었다.
이러한 이유를 알 리 없는 카일은 조금 시무룩해졌다. 제 몸과 얼굴과 목소리로 단번에 아멜을 구해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왜지?’
차이엘드 특유의 비상한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원리와 행동과 결과를 헤아리니 믿기 힘든 결론이 나왔다.
‘설마…… 내가 누나의 욕망이 아닌 건가.’
쿠궁. 카일은 몹시 서글퍼져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욕망덩어리인 약혼녀가 저를 욕망하지 않는다니.
울적해진 그는 곧 이럴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멜이 그토록 좋아하던 상반신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이젠 상반신이 아닌 건가.’
카일은 다시금 의무감으로 가득 찬 눈으로 아멜을 바라봤다. 아멜은 ‘아니야! 그거 아니야!’를 수도 없이 외치며 살며시 내려가려는 그의 손을 바라봤다.
다행히 그녀의 마음을 반영한 강풍이 카일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아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카일은 곧 그럴듯한 결론을 도출해냈다. 그의 아멜 한정 희망적인 사고방식이 작용한 것이다.
‘누나가 나를 욕망하지 않는다면…… 크게 다치셨을 확률이 커. 아마도 머리 쪽이겠지.’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약혼녀가 나를 욕망하지 않을 리 없다. 카일은 철렁해 해결책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아멜은 확신하는 카일의 속마음을 읽으며 그간 자신의 이미지를 반성했다.
카일은 방어의 아레테를 넓고 좁게 여러 겹 두른 다음 힘겹게 걸음을 뗐다. 강풍을 뚫고 그녀에게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아예 불가능하진 않았다.
살갗을 베어낼 기세로 미칠 듯이 몰아치는 바람을 피해 몸을 낮추고 움직이니 머지않아 의자에 묶인 약혼녀가 보였다.
“카일……!”
울먹이며 제 이름을 부르는 약혼녀라. 잠깐 음심이 치솟았지만 카일은 침착하게 코델리아를 아멜에게서 떼어냈다. 그러자 폭풍처럼 휘몰던 아레테의 바람이 멎었다.
묶여 있던 손발을 풀어주자 자유로워진 그녀가 우는 소리를 하며 얼굴을 기대왔다. 카일은 뒷머리를 조심스레 쓸어주며 빠르게 그녀를 살폈다. 외관상으로는 크게 다친 부분이 없었다.
“겉으로 큰 상처가 없어서 다행이지만 즉시 의사를 보고 머리의 내상을 먼저 치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머리의 부상이요?”
“다치신 것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
아멜은 카일의 셔츠 단추를 채워 주며 그간의 사정을 압축해 설명했다.
카일은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자각에 잠시 수치스러워하다 견디기 힘든 유혹이었다는 아멜의 평가에 뿌듯이 볼을 붉혔다.
“구하러 와줘서 고마워요, 카일.”
“연인을 구하러 오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한발 늦은 것 같긴 하지만.”
카일은 이타르가 아멜의 이마에 묻힌 자백제를 바라보았다. 약물이 아직 푸른 마력을 발산하는 것을 보니 자백제의 지속시간이 끝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곧 아레테의 폭풍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하들이 차이엘드의 부대원들을 지하실로 불러왔다. 아멜은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누나 님!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창백해지셨습니다. 얼른 공작저로 돌아가 쉬시지요.”
“페르슈 다이앤 경께서도 이곳에 와 계십니다.”
“고마워요, 모두…….”
아멜은 뜨겁게 고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홀로 타지에 끌려와 듣고 싶지도 않은 타인들의 속마음을 듣는 건 찰나였지만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었다.
“어서 돌아가요. 코델리아도 함께 가는 게 좋겠어요.”
아멜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당장 차이엘드 공작저로 귀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몸에 남은 코델리아의 힘 덕에 닿지 않은 상대의 마음이 들려왔다. 마라바스와 이타르의 속마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카일은 격한 분노를 드러냈다. 그가 잠시 상황을 파악하느라 어벙해진 이타르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크윽……!”
바닥으로 나가떨어진 이타르를 차이엘드의 장정 수십 명이 에워쌌다. 마라바스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은 대우를 받았다.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도착한 차이엘드에 포위당한 둘은 입을 꼭 다문 채 주변만 조심스레 살폈다.
이타르는 자신을 지그시 내려다보는 사내 하나를 째려보았다. 그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두건을 걷었다. 예상대로 황태자, 이녹이었다.
“일국의 황태자가 쥐새끼처럼 차이엘드에게 도움을 요청하다니.”
“이타르. 네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알면서 하는 말이냐? 부황께선 어디 계시지?”
“…….”
이타르는 대답 대신 침묵을 선택했으나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일순간 사위가 적막에 휩싸였다.
아멜은 이성을 잃은 채 이복동생의 멱살을 틀어쥐는 이녹을 가만히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아레테의 성능을 증폭시키는 코델리아의 힘이 남아 있는 지금, 닿지 않아도 이녹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부황의 승하 사실을 들은 이녹은 동시에 이아나의 죽음을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드디어 마지막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역시 그런 거였구나.’
아멜은 이타르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을 구속하려는 부대원들에게 맹렬히 저항했다. 최후의 발악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물러날 수는…… 크윽!”
손날로 뒷목을 가격당한 이타르는 무릎을 꿇린 채 손을 등 뒤로 묶였다. 반역을 시작할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추레했다.
“이제 돌아가서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멜은 자신을 조심스레 이끄는 카일의 손을 꼭 잡았다. 이대로 편안한 하일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후일을 도모하는 일이 없도록 지금 이타르의 욕망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다. 그녀는 양해를 구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타르 전하.”
아멜이 제 이름을 부르자 이타르는 다소 멍하게 그녀를 올려다봤다. 납치해온 그녀가 저를 부르는 이유라면 욕지기를 하기 위함이리라.
하지만 아멜은 이아나가 줄곧 지어 보이던 표정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진실을 듣고 싶다고 하셨지요.”
“…….”
“아직 자백제의 효과가 남아 있으니 제게 질문하십시오. 들은 것을 말씀해드리겠습니다.”
당장 패 죽여도 시원찮을 놈에게 질문을 허락하고 답변을 약속하다니. 아멜의 담대한 발언에 모두가 놀랐다.
“아멜리아 다이앤. 그대는 내게 왜…….”
물론 아멜은 이타르를 생각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그의 재기를 가장 확실하게 막을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슬쩍 마라바스의 안색을 살피다 말했다. 가련한 얼굴을 지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그날의 진실에 대해 듣고 싶어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보조개가 살짝 패는 가벼운 웃음. 이타르는 제 안의 무언가가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그녀를 협박하거나 강제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
“……허면 그대에게 묻겠다. 부황께서는 왜 내 동생의 죽음을 외면하셨지? 그 애를 아끼셨다.”
“외면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타르 전하께서 실의에 빠져 있는 동안 이녹 전하와 함께 진상을 밝히려 힘쓰셨지요.”
이타르는 그녀의 이마에 보석처럼 묻어 있는 자백제 한 방울을 바라봤다.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말은 모두 진실이리라.
“……그렇다면 그렇게 해서 밝혀진 진실이 무엇인가. 왜 내게는 알려주지 않은 거지?”
“부황과 황태자께서는 이타르 전하가 무너질 것을 염려하고 계셨던 겁니다.”
“내가 무너지면 가장 큰 득을 보는 것이 그들인데 염려했다고?”
“그렇습니다. 이아나 공주님이 이타르 전하의 최측근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견디기 어려우셨을 테니까요.”
이타르는 물론 주변을 지키고 있던 모두가 섬찟 놀랐다. 이타르의 눈동자가 거칠게 떨렸다. 그는 찬찬히 고개를 돌려 사실을 들킨 듯 침울해하는 이녹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는 이타르 님이 받게 될 정신적 충격을 생각해 암살 의혹을 참아내고 계셨던 겁니다.”
아멜은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이타르 전하는 그런 분을 돌아가시도록 종용하고 반역을 일으키셨고.”
이타르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다. 승하한 부황의 자애로운 얼굴이 악몽처럼 떠올랐다.
“아니야, 이건 내가 알던 사실과 달라……!”
“사실이 아니라 추측과 다른 것이겠지요. 이타르 전하께서는 슬슬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누가, 무슨 의도로 이아나 공주님을 죽였는지.”
아멜은 제발 답을 알려달라는 듯 저를 올려다보는 이타르를 가련하게 바라보았다. 그를 물리적으로 해치지는 못하지만 정신이라면 충분히 어지럽힐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읽어낸 진실이라는 무기가 존재했으므로.
“이아나 공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내에게 받은 백합 다발 때문에 돌아가신 겁니다. 누군가가 그 꽃에 미세한 마수들을 실어두었지요.”
나긋한 목소리를 들은 이타르의 머릿속에 미세한 마수들을 부리는 유능한 연금술사 하나가 떠올랐다.
광물을 매개로 주술을 부리는 보통의 연금술사들과 달리 생물을 매개로도 주술을 부리는 연금술사.
“……마라바스 라이델. 네가 왜?”
자신의 수하를 바라보는 이타르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에게 이름 불린 마라바스는 잠시간 말이 없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이아나 공주의 죽음에 가담한 게 저 혼자만의 일일 것 같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