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역시 이렇게 나오시는군.’
아멜은 억울함을 토로하거나 반발하는 대신 자신이 저지른 일을 인정하는 마라바스를 바라보았다. 티끌만큼의 미안함이나 반성도 없는 태도였다.
그렇다면 그가 다음에 보일 행동 또한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떻게 하면 마라바스의 진짜 계획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을지까지도.
“카일.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아멜은 곁에 꼭 붙어 있던 카일만이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작게 말했다. 다행히 카일이 그녀의 지령을 못 알아듣는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한편 이타르는 해석할 줄 모르는 언어를 접한 것처럼 아득해졌다. 이아나를 해친 게 제 측근이라는 가정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것이라 생경하기까지 했다.
“……마라바스. 농담이 지나치군.”
“농담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이렇게 창백해지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
이타르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마라바스의 말대로 그의 몸은 마주한 진실에 착실하게 반응했다.
황제와 황태자의 지지 세력을 마구잡이로 해치던 게 먼 옛날의 일인 양 몸이 돌처럼 무거웠다. 숨을 잘 쉬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잖나. 대체 네가 왜 이아나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공주의 죽음은 저 혼자 가담한 일이 아닙니다.”
이타르는 차이엘드에게 포박된 자신의 지지 세력들을 바라보다 불현듯 서늘함을 느꼈다.
일국의 황자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체스를 두는 사람들과 닮아 있었다. 자신의 말이 상대편의 말에 가로막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을 때나 지어 보일 법한 얼굴.
“그럴 리가…….”
이타르는 차이엘드에게 구속당한 제 측근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들이 한결같이 제 시선을 피하자 속이 메스꺼워졌다.
“대체 왜…… 무엇을 노리고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지?”
“…….”
“그런 짓을 벌이고 나서도 내 옆자리를 지키는 건 또 무슨…….”
아무도 이타르의 물음에 답해주지 않았다. 사위의 침묵을 깬 것은 추가 병력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달려온 베놈이었다.
“이타르 님.”
그는 차이엘드의 침입자들과 마라바스 사이에서 처연하게 주저앉아 있는 주군을 바라보았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무너졌는지 보지 않았음에도 알 수 있었다.
“베놈. 너 또한 알고 있었던 것이냐.”
“…….”
“물음에 답하지 않으면 네 목을 치겠다.”
이타르는 자신이 손발을 묶인 처지라는 것을 잊은 양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군에게 늘 충성하던 베놈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이앤 백작.”
베놈의 침묵 속에서 수긍을 읽어낸 이타르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도피처는 아멜이었다. 속마음에 숨겨진 진실을 모두 읽어냈을 여인.
아멜은 제 이마 한가운데가 아직도 화끈거리는 것을 확인했다. 자백제의 효과가 남아 있으니 거짓말을 했다간 내상을 입을 것이다.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을 만큼 잔인한 현실이라.’
약혼반지 근처에는 아직도 코델리아의 힘이 감돌고 있었다. 아멜은 그것이 코델리아가 사력을 다해 저를 도와주고 있는 것임을 알았다.
‘고마워요, 코델리아.’
아멜은 정신을 집중했다. 방금 들어온 베놈이 떠올리는 충격적인 기억이 영상으로 재생되었다.
***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어두운 복도. 기억의 주인인 베놈이 백합 사진 여러 장과 로열 알케미스트의 직인이 찍힌 소견서를 구기며 어딘가로 급히 달려간다.
걸음의 끝에 있는 것은 마라바스 라이델. 베놈은 그의 얼굴에 소견서를 들이밀고 분노에 찬 음성을 쏟아낸다.
“마라바스. 이게 뭔지 아나? 방금 우리 측 사람이 황태자에게 가던 것을 가로채 온 것이다. 왕실 연금술사들은 이아나 공주님의 죽음이 백합에 실린 마수 때문이라는군.”
“그래서.”
“그래서? 지금 내가 네놈을 찾아온 이유를 모른다고 할 셈인가?”
베놈은 마라바스에게 달려들어 그의 옷깃을 우악스레 틀어쥔다. 거친 몸짓에 테이블 위에 있던 물건들이 떨어져 사위가 일순간 어지러워진다.
“무슨 마음을 먹고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이타르 님께 사실을 고하고 사라져라.”
그러나 경고를 듣고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마라바스의 태도에 베놈이 되려 움찔한다.
욕망이 넘실대는 남색 눈동자를 마주한 탓일까. 멱살을 잡은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간다.
“진실을 고하고 순순히 사라지는 것만이 이타르 님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건 이 자리에 너 하나뿐이다, 베놈.”
마라바스는 옷을 털며 방 안쪽 깊은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3황자의 측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그중에는 이타르의 신임을 받는 자들과 백합 다발을 전달했던 이아나 공주의 연인도 섞여 있다. 베놈은 오랜 시간 굳어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한다.
마라바스는 베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입을 연다.
“황제가 1황자를 황태자로 책봉하는 것이 거의 확실시 되었는데도 이타르 전하는 이아나 공주님만을 감싸고 돌지. 누이동생이 원하니 황제가 되겠다는 동기는 너무 약해.”
“그게 무슨…….”
“사랑하는 이의 복수를 위해 상대를 파멸시키겠다는 각오 정도는 있어야 권력을 잡지 않겠나?”
베놈은 한동안 아무런 말을 잇지 못한다. 주군이 처한 잔인한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느릿이 저어보지만 그럴수록 방 안에 들어찬 그의 측근들이 선명히 보일 뿐.
“나……나는 사실을 고할 것이다. 이타르 님께서 얼마나 상심하고 계신데……”
베놈이 실성한 사람처럼 더듬더듬 말한다. 마라바스는 반쯤 굳은 그의 곁에 다가와 승자의 미소를 머금고 느긋하게 말한다.
“가서 말해 봐라. 공주의 연인은 공주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권력을 원했기에 마수가 깃든 백합을 전달한 것이라고.”
“…….”
“전하를 둘러싼 모든 이들이 실은 당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계승할지도 모르는 힘을 섬기는 것이었다고 전달해 보아라. 사실을 알게 된 그분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면.”
베놈은 마라바스의 말을 받아치지 못한다. 크흠, 하고 귀족들이 헛기침하는 소리만 들려온다.
적막의 시간이 지나고, 마라바스는 회유하듯 천천히 말한다.
“베놈. 이대로 그분까지 죽게 할 수는 없지 않나. 희생은 한 명이면 족하지.”
“그게 무슨…….”
“네가 진정 이타르 전하를 생각한다면 그분이 권력만을 바라도록 모든 것을 설계하라는 말이다.”
“…….”
“그분은 죽지 않는다. 네가 입만 잘 다문다면.”
한참이나 마라바스의 얼굴을 바라보던 베놈은 결국 판단을 내린 듯 느릿이 고개를 끄덕인다.
***
예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기억을 엿본 아멜은 기억의 주인인 베놈을 힐끗 바라봤다. 그는 지금도 사실을 말할지, 끝까지 숨길지 갈등하고 있었다.
그가 내린 판단대로 이타르는 이아나의 죽음에 서린 의혹을 제 손으로 밝히겠다는 의지 하나로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과 그토록 아끼던 동생이 계승이라는 판의 체스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금 완전히 무너졌다.
베놈의 판단은 옳았으나 동시에 옳지 않았다.
아멜은 다시 고개를 내려 제 발치에 무릎을 꿇고 제발 진실이 무엇인지 알려달라 애원하는 이타르를 바라봤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제 손등에 입을 맞추던 모습이나 자백제를 손끝에 묻혀 제 이마에 문지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차이엘드의 부대원들이 그를 확실히 붙잡고 있는 것을 재차 확인하곤 싱긋 웃으며 자세를 낮추었다.
“이타르 전하. 제게 하신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성녀의 것처럼 우아하고 따스했다. 현실을 부드럽게 각색해 들려주는 것으로 그를 위로할 것처럼.
하지만 아멜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나쁜 새끼. 납치할 땐 언제고 뻔뻔하게 도움을 청해?’
어쨌든 자신을 납치하라 시킨 것은 이타르였다. 저를 도구처럼 이용해 쓰고 버리려던 주제에 온정을 바라다니.
“이타르 전하. 이아나 공주님은 연인에게 받은 백합 다발 때문에 변을 당하신 겁니다. 방금 들으신 대로 꽃다발에 마수를 실은 건 마라바스 라이델.”
“아…….”
“하지만 마라바스가 백합에 마수를 실은 건 전하의 측근 거의 모두가 가담한 일입니다. 즉, 공주님의 죽음은 전하의 측근들이 계획한 것입니다.”
“대체 왜 그런……”
이타르의 시선을 받은 그의 측근들이 곤란한 듯 시선을 피했다. 아멜은 생긋 웃으며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전하의 측근들에게 필요한 것은 누이동생을 사랑하는 이타르 전하가 아니라, 권력을 쥐고 저들의 이익을 보장해줄 3황자였기 때문입니다.”
“…….”
“저들에게 전하와 이아나 공주님은 그저 체스말에 지나지 않았던 겁니다. 공주님은 전하를 움직이기 위해 기꺼이 죽일 수 있는 존재에 불과했고.”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들이 도끼처럼 이타르를 내리찍었다. 그의 사지가 고열을 앓는 사람처럼 떨렸다.
한참 전부터 빛깔이 없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멜은 손끝으로 그의 눈가를 다정하게 쓸어주며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하는 오라버니의 사랑을 받지 않았더라면 공주님은 더 오래 살다 가셨을 텐데.”
“아…….”
이타르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눈물을 흘렸다. 때맞춰 무언가가 이곳을 향해 우르르 몰려오듯 땅이 조금씩 울리기 시작했다.
아멜은 기다렸다는 듯 씩 올라가는 마라바스의 입꼬리를 놓치지 않고 카일에게 신호를 보냈다.
쾅―!
보이지 않는 힘과 힘이 충돌하며 일순간 바람이 휘몰았다. 지하실의 모두가 눈을 꼭 감았다 떴다. 마라바스와 카일이 힘을 겨루고 있었다.
아니, 겨룬다고 하자니 이미 승부가 난 것 같았다. 카일이 쓰는 방어의 아레테가 압도적으로 강했다.
마라바스는 당황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욕지기를 내뱉었다.
“젠장……!”
마라바스는 무릎을 꿇은 채 이타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멜은 그의 무릎을 구두로 밟으며 씩 웃었다.
“내 약혼자는 같은 정신지배에 두 번 당할 만큼 멍청하지 않아. 방어의 힘을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잠시 빌려주라고 했지.”
“아멜리아 다이앤……!”
마라바스가 이를 으득 갈았다. 아멜은 구두에 더 힘을 주고 그의 다리를 무자비하게 밟으며 말을 이었다.
“잡아떼는 게 특기인 네가 순순히 혐의를 인정했다면 분명 다른 목적이 있어서겠지. 지금 상황에선 이타르 전하의 정신을 아예 나가게 해서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겠고.”
“속마음을 읽어내 알아챈 것 가지고 유세를 부리는 건가?”
“이번엔 속마음을 읽어낸 게 아니라 상황을 읽어낸 거지. 네 생각을 읽는 건 역겨운 일이라.”
작전에 실패한 마라바스는 잠시 후, 실성한 사람처럼 고개를 쳐들고 웃었다. 아멜은 가만히 그가 미친 척을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크하하하……! 역시 마음에 들어. 영애가 있다면 세계제국을 세우는 것쯤은 금방이겠지. 나와 함께 갈 텐가?”
땅이 더욱 요란하게 울렸다. 무언가의 무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듯한 요동. 그러나 아멜은 당황하지 않고 씩 웃었다.
코델리아가 보여준 기억 속에서 마라바스는 영안실을 헤집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몰려오는 것들은……
‘마라바스의 특기인 시체의 군대.’
대륙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약혼식을 능히 망친 그였다. 시체들과 물리적 거리가 훨씬 가까운 지금은 주술의 위력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바네사. 어딘가에서 듣고 있는 거 알아요. 싹 쓸어버리세요.”
잠시 후, 지척을 뒤흔들던 요란한 떨림이 일제히 멈추었다. 슬며시 미소 짓는 것은 아멜뿐이었고 차이엘드의 평화유지군들도 놀란 얼굴을 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이 빛은 뭐지?”
창문 하나 없는 지하실 안쪽까지 눈부신 빛줄기가 뻗쳐와 이타르의 측근들을 모두 기절시킨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