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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05화 (105/134)

#105

트라이하의 황태자 이녹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해 뜨기 직전의 어둠 속에서 이토록 찬란한 빛줄기가 존재할 수 있다니.

빛줄기들은 잘 길들여진 사냥개처럼 지하실을 헤집으며 차이엘드의 적들만을 기절시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약혼식장에서도 같은 광경을 본 적이 있으나 겨우 반나절이 지난 지금, 빛을 이용한 공격은 그 격이 한층 높아졌다.

‘대체 차이엘드는 어떻게 이런 인재를 경호원으로…….’

이녹은 행여 빛이 저를 공격할까 바짝 긴장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차이엘드의 사람들을 따라 무사히 지상으로 올라온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님!”

섬광으로 주변을 쓸어버린 바네사가 아멜을 발견하고 쪼르르 달려왔다. 그녀는 아멜의 전신에 상처가 없음을 꼼꼼히 확인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님…… 갑자기 사라지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괜찮으세요?”

“응. 바네사가 때맞춰 와줘서 괜찮아요. 다친 데도 없고.”

“정말 제가 마님께 도움이 되었나요?”

이녹은 제 눈을 의심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살기를 흩뿌리며 마라바스의 사병들을 말끔히 쓸어버리던 바네사가 초롱초롱한 눈을 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마치 원반을 잘 물어왔으니 칭찬해달라고 꼬리를 살랑이는 강아지처럼 보였다.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건만 차이엘드의 일명 ‘평화유지군’들도 대부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차이엘드 공작은 바네사의 옆으로 슬쩍 다가가 섰다. 저가 칭찬받을 순서를 기다리는 어린애 같았다.

‘이게 대체 무슨…….’

차이엘드 공작뿐만 아니라 공작저 자체가 아멜리아 다이앤에게 미쳐 있다는 소문이라면 이녹도 들은 적이 있었다.

실제로 보기 전까지는 부풀려진 이야기라 생각했으나 이번만큼은 진실보다 소문이 얌전한 쪽인 듯했다.

“고마워요, 바네사. 무서웠는데 덕분에 살았어요.”

아멜은 미소를 머금은 채 바네사를 껴안고 머리를 쓸어주었다. 이번처럼 그녀가 반가운 적이 없었다.

맞닿은 몸을 타고 전해져 오는 콩닥거림마저 반가웠다. 아멜은 그녀를 힘껏 안았다가 팔을 풀었다.

한편, 순서를 빼앗겨 기분이 좋지 않던 카일의 시선이 이타르에게 박혔다. 그는 멍한 시선으로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카일은 그를 어떻게 응징할지 찬찬히 생각해보았다. 마라바스가 깊게 가담했다고는 하나 어쨌든 납치 명령을 내린 것은 이타르일 터.

게다가 그는 음심 포착 팔찌의 색깔을 변하게 한 전력까지 있었다.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이녹 전하. 슬슬 죄인의 거취에 대해 논의해야 할 듯합니다.”

“아…….”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이녹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든 이타르를 살리는 쪽으로 가고 싶었으나 현실은 답답할 정도로 꽉 막혀 있었다.

그저 타국 유력 가문의 피앙세를 납치한 일이라면 자국의 법대로 해결할 것을 주장하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타르는 무려 차이엘드의 피앙세를 납치해 반역을 일으켰다. 지하실에 갇혀 있다 지상으로 겨우 나온 대신들이 그를 가만히 둘 리 없었다.

“……잠시 이타르와 이야기를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이녹은 무거운 걸음으로 이복동생에게 향했다. 이타르를 더 단단히 옭아매던 병사들이 고개를 숙인 후 자리를 비켜주었다.

누이동생의 죽음이 제 욕망을 부추기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타르의 눈빛은 이미 죽어 있었다.

이녹은 한참 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를 지켜봤다. 왜 하필 지금, 이복동생들과 함께 정원을 거닐던 장면이 떠오르는 것일까.

“……부황께서도 알고 계셨습니까.”

이타르의 힘없는 목소리가 회상에 젖어 있던 이녹을 현실로 끌어왔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그래. 부황께서 마라바스 라이델의 왕실 연금술사 자격을 박탈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아나를 죽인 자가 뻔뻔스럽게도 네 곁에 붙어 있다며 역정을 내셨지.”

“…….”

“이타르. 부황께서는 끝까지 네게 사실을 감추라 하셨다. 네가 이아나의 죽음을 견뎌내고 나와 힘을 합쳐 트라이하를 이끌어가길 바라셨지.”

그러나 반역이 진압된 지금은 모두 부질없는 소망이 되었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이타르는 짐승처럼 신음하며 울었다. 손발이 묶여 가슴도 줴뜯을 수 없는 울음이었다.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생을 속죄로 보내면 된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타르의 운명이야 뻔했다. 처형. 어디서 누가 집행하느냐 정도의 차이만 있으리라.

“네가 반역을 일으켜 트라이하 황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사실보다 지금의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슬프구나.”

“그런 것을 묻는 게 아닙니다. 부황께 제가 감히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녹은 말을 잇지 못했다. 부황이 무엇보다 아끼던 황실을 처참하게 짓밟은 이타르가 용서받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언젠간.”

그러나 이녹은 사실을 말하는 대신 거짓 대답으로 대화를 마쳤다. 선의의 거짓말은 그간 계속해온 것이니 괜찮다고 생각하며.

분위기가 잔잔히 가라앉았다. 카일은 많이 놀랐을 약혼녀에게 재킷을 걸쳐주며 그녀를 보듬었다. 이젠 정말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던 순간.

“다 끝난 것 같나?”

평화유지군들에게 붙들려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던 마라바스가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비틀린 웃음이 입가에 걸려 있었다.

“곧 죽을 놈이 입만 살았군.”

카일은 짜증과 경멸을 가득 담아 쏘아붙였다. 마라바스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제 몸을 끌고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찰나의 시선에서 파멸의 기운을 느낀 것은 아멜뿐이었다.

“잠깐, 코델리아 어디에 있어요?”

지하실에서는 분명 함께 있던 코델리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타르와 마라바스를 포함한 일의 주동자들은 모두 구속된 상태인데 그녀만이 자리에 없었다.

정신이 없는 듯하여 미지근한 물을 먹이고 잠시 쉬게 한 것이 방금인데 행방이 묘연했다. 아멜은 코델리아의 기억 한 조각을 떠올렸다.

“마라바스. 이 여자의 성능은 어느 정도지?”

“하일의 황궁에서 코델리아를 죽인다면 폭발 주술이 발동되어 황궁 전체는 잿더미가 될 겁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주변에 있는 아레테의 결정도 연쇄 폭발을 일으킬 테니 사실상 수도는 정복할 수 있는 셈입니다.”

코델리아를 두고 마라바스와 이타르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물리적으로 가까운 지금이라면 마라바스는 분명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조종할 수 있을 터.

“카일! 코델리아를 찾아야 해요. 죽음과 동시에 폭발하는 주술이 걸려 있어요.”

“그게 무슨……”

아멜은 카일에게 엿본 속마음의 내용을 빠르게 설명했다.

그는 이타르나 마라바스를 불러 사실을 재확인하는 대신 아멜의 말을 믿고 사람들을 풀었다.

아레테를 이용한 흔적은 없었고, 코델리아는 몸이 성하지 않으니 그녀는 최대의 사상자를 내기 위해 황궁 중앙으로 향했으리라.

그러나 걸리는 것이 있었다.

‘황궁 전체가 잿더미가 될 정도……?’

카일은 일순간 아멜의 죽음을 상상하는 제 머리가 미웠다. 만일 이 웃음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닐 것이다.

그녀를 이곳에 둘 수 없다. 카일은 마침 전투를 정리하고 다가오는 장인을 발견하곤 안도했다.

“다이앤 백작. 따님과 사람들을 데리고 이 자리에서 벗어나주십시오. 최소한 내성은 벗어나셔야 합니다.”

그의 말에 흠칫 놀란 아멜이 끼어들었다.

“잠깐, 카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가 나가면 카일은요?”

“제가 인력을 풀었으니 책임자인 저는 이곳을 지키는 게 옳습니다. 만에 하나 벌어질 일에 대비해 잠시 몸을 피하십시오.”

아멜은 저를 감싸려는 아버지의 손을 피했다.

“코델리아를 찾으라고 한 건 저예요. 게다가 저는 아레테의 결정을 가지고 있다고요. 같이 대피하는 사람들이 제가 일으키는 연쇄 폭발 때문에 다칠 수도 있어요.”

“그럼 바네사와 단둘이 다른 곳으로…….”

“카일.”

아멜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떨리는 손이 차츰 진정되며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가 들려왔다.

「누나가 조금이라도 다쳤다간…….」

「절대 안 돼.」

「이런 곳에 있게 놔둘 수는 없어. 얼른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야 해.」

「코델리아의 폭발에서도, 연쇄 폭발에서도 안전할 만한 곳으로…….」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멜은 손을 품듯 꼭 잡아주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다른 사람들을 먼저 대피시켜주세요. 저를 앞가림도 못 하는 어른으로 키우지 않으셨잖아요.”

잠시 고민하던 페르슈 다이앤은 딸의 완고한 태도에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이미 한차례 반역이 휩쓸고 간 후라 이타르가 지하실에 가둬두었던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멜의 단호한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카일의 손을 쓸어주었다.

“카일은 바깥으로 안 피할 거죠?”

“제 명을 받은 자들이 황궁을 수색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살 사람, 죽을 사람이 정해져 있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아멜은 생긋 웃었다.

“끝까지 곁에 있게 해주세요. 카일이 져야 할 책임이 있다면 저도 같이 질 거예요.”

카일은 아멜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다. 곁에 남은 바네사에게 당장 네 주인을 모시고 바깥으로 벗어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맞닿은 손의 온기는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그녀의 음성은 평화를 말할 때보다 달콤하다.

보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도 떨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녀가 왜 위험을 무릅쓰고 곁에 머무르려는지 깨달았다.

“……끝까지 곁에 있어 주겠다고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누나.”

싱긋 웃으며 말한 카일이 품 안에서 귀환용 이동의 스크롤을 꺼내 차이엘드 공작저의 좌표를 입력했을 때였다.

쾅―!

사위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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