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코델리아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높은 곳을 찾아 움직이는 몸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마라바스 라이델.’
수년 동안 정신을 지배당한 여파일까.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리지 않는 지금에도 몸은 그가 세뇌한 대로 움직였다.
유사시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 그리하여 폭발 주문을 발동시켜 주변의 모든 것들을 날려버릴 것.
그녀는 움직이는 대로 황궁의 중앙부, 가장 높은 첨탑과 거리를 좁혔다. 이제 몸은 제멋대로 첨탑 상부로 향할 것이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하니 눈앞이 하얘졌다. 어떻게든 정신 지배를 끊어 내려 애를 써도 소용이 없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정신을 지배받는 상태라고는 하나 이미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정신 지배가 풀린다 해도 돌아갈 곳도 없었다.
마지막 순간 사력을 다해 차이엘드의 피앙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고 한들 용서받지 못할 짓들을 너무도 많이 저질렀다.
곳곳에 남은 잔불이 풍기는 연기를 마시며 코델리아는 제 삶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찬찬히 곱씹었다.
여자의 몸이나 기사가 되기로 한 것. 뜻하지 않은 부상을 당해 잠시 쉬던 중 선대 차이엘드 공작의 일자리 제안을 받은 것.
공작저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가문이 독점 매매하던 아레테의 결정을 지켜온 것. 막대한 보상과 차별 없는 태도에 매료되어 기사의 업을 버린 것.
‘마라바스는 내가 아레테의 결정에 오래 노출되어 이런 몸이 되었다고 했지.’
일주일에 하루쯤 게으름을 부리며 들판을 쏘다녔다면 이런 몸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성실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차이엘드 공작저에서 보냈던 모든 시간들이 저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다시 한 번만 더 보고 싶소.’
하일 황실의 약혼식을 파투낼 당시 아주 잠시간 하일드 웨일을 보았다. 그 또한 세월을 피해 가지 못해 많이 여위고 늙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고 불러주었다. 코델리아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만족하기로 하곤 억지로 멈추고 있던 걸음을 뗐다.
그녀가 첨탑의 출입문을 힘주어 열려던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코델리아.”
“……!”
“코델리아 웨일.”
중년을 넘긴 목소리는 앓는 듯 위태로웠으며 가쁘기까지 했다. 코델리아는 자꾸만 첨탑 위로 향하려는 몸을 억지로 틀었다.
배를 틀어쥐고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하일드 웨일이 그곳에 있었다.
“보고 싶었소, 부인.”
“아…….”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부인이 입힌 상처가 생각보다 커서.”
코델리아는 그제야 그가 입은 내상이 자신의 짓임을 기억해내곤 고통스러워했다. 이 손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지른 것인가.
하일드는 애써 웃으며 정신이 불안정해지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정신을 지배받는 와중에도 자신을 보고 멈칫하는 그녀가 고마웠다.
“부인. 이제 돌아갑시다.”
“아, 아…….”
하일드는 실성한 사람처럼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품어 안았다. 등을 쓸어주고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오래전, 공작저의 입구를 지키던 누군가가 부인이 사라졌음을 알렸을 때, 당장 그녀를 찾아내 안아주지 못한 것이 내내 한스러웠었다.
“부인. 그때 해줬어야 하는 포옹을 이제야 전하는 나를 용서하시오.”
“아…….”
“함께 돌아갑시다. 만일 부인이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면 나도 함께 떠날 거요.”
“…….”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부인의 곁에 있겠소.”
하일드의 말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코델리아는 제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그 말들을 곱씹었다.
맑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하일드가 뺨을 쓸어주는 순간 안개가 낀 듯 답답하던 그녀의 정신이 맑아졌다.
“하일드…….”
코델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눈동자와 목소리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모든 것을 정화할 듯 정결한 태양이 지평선 위로 돋아 오르고 있었다.
***
“카일…… 혹시 손수건 같은 거 있어요? 어떡해…….”
멀리서 코델리아와 하일드를 지켜보던 아멜은 히끅거리며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감동이 복받쳐 눈물이 멎지를 않았다.
카일은 품에 늘 간직하고 있던 닭 자수 손수건을 내주었다.
“누가 손수건에 자수를 이렇게 못…… 제가 둔 거네요? 이걸 늘 가지고 다녀요?”
“물론.”
“……이 상황에서 카일까지 다정하면 눈물이 안 멈추잖아요.”
카일은 품으로 파고드는 아멜을 토닥였다. 하일드와 코델리아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감정적이 된 아멜과 달리 그는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굉음이 들려왔을 당시에는 코델리아가 기어이 목숨을 끊어 제 몸을 폭탄으로 만든 줄 알았다.
이대로 죽는 건가 하는 생각보다도 품 안의 약혼녀가 아파할 것이 겁났다. 그녀를 보호하려 품에 바짝 안은 건 본능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바네사는 ‘얼씨구. 아주 연극을 하세요’하고 빈정거리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굉음이 코델리아를 발견했으니 얼른 와 달라는 부대원의 신호인 줄 누가 알았을까.
아니, 어떤 놈이 빨리 알리겠답시고 무식하게 건물을 부수나. 아무리 급했다고 해도 그건 아니다.
‘누군지 잡히기만 해 봐라. 확 그냥…….’
카일은 울컥하는 마음을 참아내기 위해 품 안의 아멜을 바라보았다. 셔츠가 축축하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계속 훌쩍거리고 있었다.
“바네사. 가서 마실 물을 구해오십시오.”
“넵! 이슬을 긁어모아 올 테니 하시던 거 천천히 하시면서 오래 기다려주세요.”
“…….”
의도치 않은 일이었으나 바네사가 자리를 비웠기에 단둘이었다. 카일은 그새 불그스름하게 부은 아멜의 눈두덩이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짭니다.”
“카일은, 흡, 안 슬퍼요? 두 분이 저렇게 재회하신 게?”
“슬프다기보단…….”
카일은 자신의 말을 끝맺지 못했다. 분명 뭉클한 장면이었지만 슬프진 않다. 그에게 슬픔은 약혼녀를 영영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나 느끼는 감정이었다.
슬프다기보다는 오히려 기뻤다. 괜히 제 가슴이 벅찬 것도 같다.
가느다랗게 이어져 있던 사랑의 끈이 끊어지지 않고 두 연인을 이어놓는 것을 확인한 순간, 카일은 아스라한 감동에 젖었다.
하일드가 코델리아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목숨을 걸고 반역의 장소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코델리아가 하일드를 여전히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함께하자는 그의 말이 그녀의 욕망이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코델리아의 욕망을 자극해 그녀를 구해낸 건 하일드가 아니었다. 둘 사이에 실처럼 질기게 자리한 사랑이 폭발을 막았다.
‘……사랑과 평화라.’
멀리서 재킷을 퍼덕여 잔불을 끄는 평화유지군들은 잠시 모르쇠 하기로 한 카일은 녹갈색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봤다.
사랑으로써 평화로운 지금, 아멜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누나, 사랑합니다.”
“…….”
“그러니 이제 그만 튕기고 결혼식 날짜를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누나를 사랑한다는 거, 이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속마음이야 천 번도 더 읽혔을 거고.”
카일은 아멜의 양 뺨을 꼭 감쌌다. 엄지로 뺨을 쓸어주니 푸스스 터지는 웃음. 누나, 하고 부르면 푹 패는 보조개.
갓 피어오른 햇살을 받아 추수철의 들판처럼 빛나는 눈동자와 부드럽게 한들거리는 카페라테 색 머리카락.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지금 당장 식을 올리고 싶지만 준비하실 시간이 필요할 테니 결혼식 날짜는 다음 달 중으로 잡겠습니다.”
그래서 더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드레스는 이번 주 중으로 고르십시오. 차이엘드의 이름으로 하는 의뢰이니 기한에 못 맞추는 일은 없을 겁니다. 원하는 디자인이나 디자이너를 골라주십시오.”
물론 어떤 드레스를 입어도 내게 와준다면 황홀할 테지만.
“하객 목록은 다음 주까지 만들어 주십시오. 도울 자들을 붙일 테니 어려운 일 없이 금방 될 겁니다. 원하신다면 하일의 귀족 모두에게 청첩장을 돌리겠습니다.”
드디어 당신이 내 아내가 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도 좋겠지.
“신혼여행은 어디든 갈 수 있으니 말만 해주십시오. 마땅히 생각해 둔 곳이 없으시다면 차이엘드 소유의 섬들이나 별장들의 목록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기왕이면 단둘이 있을 수 있는 한적한 곳으로.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결혼 지참금도, 예물도 필요 없습니다. 누나만 제게 오면 됩니다.”
사실 혼수로 같이 와줬으면 하는 게 딱 하나 있긴 하지만.
“아멜리아 다이앤. 차이엘드의 안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그 자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누나가 아니면 안 됩니다.”
카일은 차이엘드의 문장이 들어간 약혼반지가 자리 잡고 있는 그녀의 왼손을 끌어왔다.
이미 약혼반지가 약지를 장식하고 있는 게 좋기도, 조금 아쉽기도 했다. 이런 순간에 반지를 끼워주는 게 더 감동적이었을 텐데.
그는 반지의 조금 아래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조심스레 살갗을 빨아들이자 불그스름한 자국이 남았다.
“제가 가진 모든 걸 이미 드렸다는 게 아쉽습니다.”
“카일…….”
겨우 진정시킨 울음이 또다시 터지려고 한다. 아멜은 속절없이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어쩌지 못하고 울먹였다.
이미 모든 걸 내준 사람에게 더 무얼 바랄 수 있을까. 이젠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아낌없이 내주고 싶었다.
“사랑해요, 카일.”
아멜은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짧게 입 맞추곤 말을 이었다.
“드레스는 다음 주 중으로 고를게요. 하객 명단도 금방 작성할 수 있어요. 그리고 또…… 당장 급한 게 뭐였죠?”
긴장이 풀려버린 아멜이 배시시 웃었다. 카일은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급한 것 말입니까?”
“응.”
“대답.”
“…….”
“제 청혼을 받아주겠다는 대답. 저한텐 그게 제일 급한데.”
아멜은 카일의 귀여운 채근에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모르는 척 애태우고 싶기도 했지만 이젠 제게 인내심이 없었다.
“카일리안 차이엘드. 우리 다음 달에 결혼해요. 청혼을 받아들이는 건 물론이고 저도 원해요.”
“…….”
“얼른 카일이 해주는 부인 소리 듣고 싶은데.”
카일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아멜을 번쩍 안아 올렸다. 그녀의 뺨을 따라 밝아오는 아침 햇살이 유독 찬란했다.
「……내가 왜 다음 달이라고 했지.」
「이번 달 중순도 일정이 괜찮을 것 같은데.」
아멜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카일의 후회를 들으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언제 속상해했냐는 듯 그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사랑합니다.”
“저도 사랑해요, 카일.”
서로의 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 두 사람이 긴 입맞춤을 나누는 동안, 비극의 밤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