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07화 (107/134)

#107

페르슈 다이앤은 폭발음이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아득해졌다. 아멜. 그가 소리 없이 딸의 이름을 불렀다.

트라이하의 젊은 대신들은 얼른 황궁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발을 동동 굴렀지만 자식을 둔 자들은 아니었다.

“다이앤 백작. 내성을 벗어나도록 도와줘서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마라바스의 수하들에게 진작 당했을 테지.”

“…….”

“우린 일생을 황궁에서 일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네. 이제 자네의 도움 없이도 피신할 수 있으니 어서 가보게.”

“……감사합니다.”

페르슈 다이앤은 있는 힘을 다해 황궁의 중앙으로 향했다. 아멜이 보인 단호한 눈빛과 말투에 순간 설득되어 자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었다.

‘아멜……!’

언제 코델리아의 폭발 주술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곳에 그 아이를 혼자 내버려 두고 오다니. 아버지라 불릴 자격도 없었다.

주마등처럼 자그맣던 딸아이가 품에 처음 안겨오던 때가 생각났다. 처음 아버지라는 말을 옹알거리던 순간과 걸음마를 떼던 날도.

체통도, 격의도 잊은 채 눈앞이 뿌예지도록 달린 그는 잠시 후, 꼭 붙어 평화롭게 일출을 구경하는 한 연인을 발견했다.

“…….”

딸아이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차이엘드 공작과 자연스레 머리를 기대는 아멜.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울리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전직 총기사단장으로 하여금 딸을 든든하게 지켜줄 기사가 더 이상 자신이 아님을 깨닫게 했다.

“정말 사랑스럽다니까요…….”

“두 분은 어쩜…….”

웬 감탄사를 들은 다이앤 백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둘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이 수풀 곳곳에 숨어 있었다.

다이앤 백작은 시큰거리는 코를 괜히 문지르며 고용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일이 대충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하일드도 잘 되었군. 이리 따스한 눈길을 받는 걸 보니 내 딸의 앞길도 괜찮을 게 분명하고…….’

이젠 정말 자리를 비켜줄 때라고 생각하는데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다이앤 백작은 보지 않고도 딸의 손길을 알아챘다.

“아멜.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아버지…….”

“우리 딸…… 이제 다 컸구나.”

“아버지도 참. 그 말씀만 몇 번째인지 아세요?”

다이앤 백작은 허허 어깨를 으쓱하며 딸을 살폈다. 예상대로 조금 부르터 있는 입술 말고도 다른 문제점이 있었다.

“아멜. 이마에 있는 이건 무엇이냐? 푸른 빛을 내는데.”

아멜은 제 이마에 무엇이 있는지를 곱씹다 헉 하고 놀랐다. 이타르가 제 이마에 묻혀둔 자백제가 아직도 빛을 내다니.

“아무래도 자백제 효과가 남아 있나 봐요. 그사이에 거짓말을 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아멜은 안도감에 가슴을 쓸었으나 그 이야기를 들은 카일의 눈빛은 오묘해졌다.

아까와 같은 상황에서라면 자백제는 분명 위험한 물건일 터. 하지만 지금 같은 평화로운 상황에서라면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아멜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카일에게 슬쩍 손을 얹어보았다. 그의 힘겨운 내적갈등이 들려왔다.

「그럼 지금 누나는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는 건가.」

「……이런 생각 하지 말자.」

「솔직한 대답…… 뭘 제일 좋아하시는지 여쭤볼까.」

「이런 생각은 그만두는 게 좋겠군.」

「저번에 그렇게 해드렸던 게 정말 기분 좋으셨을까.」

「…….」

팅―!

아멜은 따끔한 감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손목이 아프다 싶어 음심 탐지 팔찌를 내려다보았더니 웬걸, 팔찌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이상하다. 어머니가 분명 한 사람당 한 번씩, 총 다섯 번까지만 변한다고 했는데.”

“이상하구나. 혹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연금술사분들, 잠시 이리로 와 줄 수 있겠소?”

다이앤 백작은 걱정 가득한 눈길로 너덜너덜해진 팔찌를 훑어보았다.

저와 사위가 한 번씩. 리엔 공주와 이타르, 마라바스. 들은 바로는 다섯 번을 모두 채운 셈인데 팔찌가 또 반응하다니.

수풀에 숨어 있던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이 망가진 팔찌를 구경하려 기웃거렸다. 그중에는 차이엘드 소속의 연금술사도 있었다.

“오오…… 다섯 번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팔찌가 추가로 반응하다니. 이건 연금술의 법칙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무언가에 반응한 듯한데……”

모두가 감탄사를 흘리는 가운데 다이앤 부녀만이 카일을 슬쩍 바라봤다. 그는 뜨끔한 얼굴로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내 딸에게 얼마나 거대한 음심을 품었기에…….’

다이앤 백작은 할 말을 잃었다.

***

카일은 부녀간의 시간을 마련해주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워주었다. 결코 거대한 음심을 들켜 도망 나온 것이 아니었다.

‘자백제 해독약이 생각보다 구하기 쉽군.’

연금술사들을 동원해 아멜이 마신 자백제는 말끔히 해독했다. 그렇다면 트라이하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일의 주동자인 마라바스와 이타르의 거취를 정하는 것.

물론 카일이 정해둔 그들의 거취는 저세상이었다. 소중한 차이엘드의 피앙세를 납치했는데 용서가 필요할까.

논의해야 할 것은 시기와 방법뿐이었다. 카일은 쓸데없이 마음이 여린 이녹에게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전하. 일이 마무리된 듯하니 슬슬 하일로 돌아가려 합니다. 죄인을 공국의 법대로 처벌하고자 하니 인도해 주십시오.”

“아…….”

이녹은 마른침을 삼켰다. 본래 차이엘드 공작이 찾아오면 이타르는 자국의 법대로 처벌할 것이니 마라바스만 데려가라 이를 참이었다.

일국의 황태자이자 곧 황제가 될 몸이니 그 정도 배짱은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을 과대평가한 것이었다.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약혼녀 앞에서의 온화한 얼굴이 아니었다. 제 앞길을 가로막는 인간이 있다면 뼈까지 씹어 먹을 짐승처럼 보였다.

게다가 트라이하 황실 소속인 이타르가 제 약혼녀를 해하려 했다는 것이 밝혀진 지금은 황실에 조금의 호의도 보이지 않았다.

이녹은 본능적으로 지금 자신이 보이는 태도나 몸짓,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조국의 미래를 결정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카일리안 차이엘드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였다.

“……이타르는 본국에서 조사를 마친 뒤 최대한 빨리 차이엘드 공국으로 인도하겠습니다. 마라바스는 공작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카일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졌다. 이녹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양보한 것이었지만 그의 답은 카일의 기대에 조금도 미치지 못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사지를 떼어낸다고 해도 성이 차지 않는데 조사를 마친 뒤 인도라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전에 잠깐 얼굴을 봐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전하께서도 같이 가심은 어떠할까 합니다.”

본심을 숨긴 카일은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이녹은 자신의 근처에 몰려드는 자들이 죄다 차이엘드 소속이라는 찜찜함을 느끼며 지하실로 내려갔다.

이타르는 비교적 넓고 쾌적한 공간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의 양손은 수갑이 채워진 채 책상 위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카일은 그곳에 잠시 시선을 고정하다 철창 안으로 들어갔다.

“이타르. 이 말만은 해주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계승 전쟁에 내몰려 희생자가 된 건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

이타르의 눈에 느린 속도로 눈물이 차올랐다. 차이엘드 공작이 건넨 말은 가슴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것 같았다.

카일은 감동받은 양 저를 올려다보는 이타르를 보다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의 양손이 보기 좋게 테이블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 약혼녀를 건드린 건 네 잘못이지.”

푹―!

끔찍한 비명이 사위에 울렸다. 카일은 옷에 피가 튀지 않도록 주의하며 이타르의 손을 관통하고도 책상 깊이 박힌 단검을 뽑았다.

“내 약혼녀에게 네 손이 닿았다는 증거를 남겼으면서 무사하길 바랐나?”

그의 손이 내리꽂혔고, 다시 한번 이타르의 울부짖음이 지하실에 울렸다.

이녹은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광경에 자리를 벗어나려 했으나 차이엘드의 수하들이 그를 은근히 막았다.

남 일이 아니니 잘 봐두라고 말하듯.

대 트라이하 제국의 황태자인 이녹은 결국 이복동생의 양손이 넝마가 되는 것을 끝까지 지켜봐야 했다.

“지혈.”

카일은 두 글자짜리 명을 내리곤 황태자보다 먼저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얼굴에 튄 피를 닦을까 했지만 늘 휴대하던 닭 자수 손수건을 아멜에게 빌려준 터라 가지고 있는 것이 없었다.

‘……있었다고 해도 그 손수건으로 더러운 피를 닦을 수는 없지.’

아쉬운 대로 손등으로 피를 닦은 그를 차이엘드의 정보원 하나가 으슥한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엔 입에 천 조각을 가득 머금은 마라바스가 무릎 꿇린 채 묶여 있었다.

카일이 손을 뻗자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이 그의 손에 안착했다. 그는 칼끝으로 마라바스의 턱을 들었다.

“마라바스 라이델. 표독스러운 눈빛과 달리 벌벌 떠는 게 볼 만하군.”

“……내 능력을 차이엘드의 영광을 드높이는 데 쓸 수도 있을 텐데. 그래도 날 죽일 셈인가?”

“물론.”

카일은 칼자루를 다잡고 적당히 거리를 좁혔다. 얇은 슬립 하나만을 걸치고 있던 약혼녀를 담았던 눈부터 찌를 생각이었다.

그가 칼을 드는 순간 누군가가 앞을 막아섰다. 카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바네사 메이브란테. 내 앞을 막을 생각인가?”

“잠, 잠깐…….”

소식을 듣고 급히 뛰어온 듯 바네사는 숨을 골랐다. 마라바스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아멜리아 다이앤에게 눈이 멀어 잊고 있었다. 바네사 메이브란테. 떠돌이 신세이던 자신을 구원했던 여인을.

하지만 현실은 마라바스가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달랐다.

“공작 전하. 마님께서 찾으세요. 눈부터 찌르실 거죠? 그럼 피가 튈 텐데.”

“그렇겠군.”

“빛으로 장막을 쳐드릴 테니 얼른 하세요.”

“그러지.”

바네사는 마라바스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카일의 옷을 보호했다. 그의 검이 가볍게 공중을 가르는 순간, 마라바스는 시야를 잃었다.

“읍, 으윽…….”

“입에 저런 건 언제 넣어두셨대요? 날이 갈수록 철저해지시네.”

“시끄러워. 개의 먹이로 던져줄 생각이니 심장만 발라내 챙기도록.”

카일은 바네사에게 칼을 넘기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곧 등 뒤에서 꽉 막힌 비명이 여러 차례 쏟아졌으나 그는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