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귀환이 생각보다 늦어지는군요.”
창밖을 내다보던 리엔이 초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하일의 황궁에서 초조한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황후가 될 그녀를 둘러싼 시녀들과 맞은편에 앉은 황제 베르드, 그의 시종들 또한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베르드는 찬찬히 상황을 곱씹어보았다. 신성한 약혼식 날 갑자기 시체들이 들이닥치더니 다이앤 영애가 납치당했다.
차이엘드는 즉시 일행을 꾸려 추격을 시작했고, 이동의 아레테가 담긴 귀환용 스크롤이라면 카일이 확실히 챙겼다.
그런데도 감감무소식이라니.
“곧 오겠지. 마음을 편히 가지시오.”
베르드는 리엔에게 위로를 건넸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가장 초조한 것은 역시 하일의 황제인 그였다.
건너편 의자에 기대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나디아가 듣는다면 질색을 하겠지만, 하일 제국의 존재 이유는 차이엘드였다.
차이엘드의 힘이 사라진다면 황실은 하중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가정이 있었다.
‘혹시 작은 다이앤 백작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멜리아 다이앤이 다치거나 죽는 경우를 생각하니 오금이 저리는 베르드였다. 그랬다간 차이엘드 공작이 다시 괴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니. 이전보다 더 잔혹해질 것이 확실하다. 사랑을 배운 자에게 다시 나락으로 돌아가라는데 누구인들 포악해지지 않을까.
한숨을 쉬려던 그는 놀랍도록 여유로운 모습의 나디아 공주를 보고 말문이 막혔다. 정세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여유라니.
“나디아. 이 상황에 책장을 넘기는 네가 대단하다.”
“차분히 기다리시지요, 폐하.”
나디아는 보란 듯 책장을 넘겼다. 일전에 켈트만에서 보았던 충격적이면서도 자극적인 장면을 떠올리니 마음이 절로 가라앉았다.
“카일, 누나 추운데.”
서로를 위해 그런 과감한 일까지 벌이는 둘이니 이번에도 어떻게든 좋게 끝나리라. 나디아가 픽 웃으며 다시 책에 집중할 때였다.
“폐하! 차이엘드 공작 일행이 스크롤을 이용해 무사히 공작저로 귀환했다는 전갈입니다!”
“다이앤 영애는?”
“작은 다이앤 백작을 포함한 일행 모두가 안전하게 돌아왔다고 합니다. 소식을 들은 레이디 클레어도 곧장 그리로 향하셨습니다.”
“오오…….”
베르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아멜리아 다이앤. 그녀에게는 항상 기이할 정도의 천운이 따랐다. 타국
에 피랍되었다 멀쩡히 살아 돌아온 오늘만의 일은 아니었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사건이나 켈트만의 일 때도 그랬지.’
그녀가 불리한 상황이 되면 하일 타임스를 주축으로 한 여론이 움직였다. 차이엘드가 뒤에서 힘을 쓴 것일까.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무언가가 이상했다.
‘분명 뭔가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베르드는 찜찜한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터라 정무가 시작되기 전에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곧 발행될 신문들이 차이엘드의 피앙세 피랍 사건으로 소란스러울 것을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
드디어 차이엘드 공작저로 돌아왔다. 베르드와 리엔의 약혼식이 고작 반나절 전의 일인데도 수십 일은 지난 기분이었다.
“누나 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따뜻한 물을 좀 드릴까요?”
“일단 쉬시겠습니까? 드실 것도 준비해두긴 했습니다만…….”
공작저에 들어서는 순간 고용인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나를 에워쌌다. 내가 납치된 소식이야 진작 들었겠지.
어째 공작저의 주인인 카일보다 나를 먼저 찾는 것 같아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특별 관리를 받으며 쉬어야 할 건 내가 아닌데 말이다.
“저는 괜찮으니 집사장님과 코델리아를 챙겨 주세요. 여러모로 지치셨을 거예요.”
나는 꼭 붙어 있는 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라바스의 정신 지배에서 벗어난 코델리아는 이전보다 훨씬 총명한 인상이었다.
공작저를 찬찬히 훑어보는 그녀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지금 코델리아의 기분을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코델리아. 사람들을 붙여 줄 테니 우선 푹 쉬도록 해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고. 건강을 회복하는 게 먼저예요.”
“어찌 제게 이렇게 친절하신지…….”
“그야 하일드 집사장님의 부인이시잖아요? 트라이하에서 절 도와주시기도 하셨고.”
나는 카일 쪽을 슬쩍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고용인을 보살피는 건 안주인의 덕목이기도 하고요.”
예상대로 카일은 사르르 풀어진 얼굴을 했다. 하일드와 코델리아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내 것 못지않게 따뜻했다.
「사랑은 돌아온다는 말이 정말이었나.」
“하일드. 일주일 휴가를 줄 테니 일에서 잠시 손을 떼고 쉬십시오. 공작저 내의 빈 별궁을 골라 부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전하. 어찌 그런…….”
“일주일. 더 오래는 안 됩니다. 다음 달에 있을 결혼식 준비를 서두르려면 집사장이 필요합니다.”
한사코 거절하던 하일드 집사장님은 마지못해 특별 휴가를 받아들였다. 코델리아는 집사장님과 다른 고용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이동했다.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강제로 나이를 먹게 한 주술도 해제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듣고 집사장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던지.
“폴 병원장님, 집사장님의 내상이 심할 거예요. 많이 움직이셨거든요. 별궁에 들러 돌봐주시길 바라요.”
“그리하겠습니다, 누나 님.”
“아, 바네사도 고생 많았어요. 덕분에 살았네. 주방에 가서 제 이름을 대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어요. 알았죠?”
“넵, 마님!”
나는 바네사의 목걸이가 가운데에 오도록 살짝 만져준 뒤 기지개를 켰다. 반나절 사이에 너무도 많은 일이 있어 조금 피곤했다.
늘어지게 자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혼식용으로 특별 제작된 이 불편한 드레스를 벗는 게 먼저였다.
“환복을 도와줄 몇 명만 따라와주세요. 카일, 먼저 올라가 있을게요.”
“네, 누나.”
왜일까. 고개를 끄덕이는 카일의 뺨이 조금 불그스름했다.
***
이동의 아레테가 담긴 스크롤을 사용하는 일은 상당한 피로감이 남았다. 반나절 사이 대륙을 왕복했다면 쓰러진대도 이상하지 않을 일.
하지만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어느 때보다 팔팔했다. 심장은 평소보다 빨리 뛰기까지 했다. 조금도 지치지 않은 게 스스로도 놀라웠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신다고 하셨지.’
아멜이 왜 굳이 그런 중대한 사실을 흘렸을까 생각하자니 정신이 점점 맑아지고 시야가 밝아지는 착각마저 들었다.
카일은 돌아온 클레어와 잠시 상황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멜은 그녀가 돌아오면 알려달라고 했지만 클레어가 원하지 않았다.
“피곤할 테니 쉬게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멜과 대화는 내일 나누어도 충분합니다.”
레이디 클레어가 ‘쉬게 좀 놔둬라’라는 말을 완곡히 돌려서 하는 것을 눈치챈 카일은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혼자 앉아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 피곤할 것도 같았다. 아멜의 체력은 늘 제가 원하는 것보다 조금 부족했으니.
‘……정말 피곤하실까.’
꿈에 그리던 결혼식 날짜를 잡아 피로라는 것이 싸그리 날아가버린 건 아무래도 자신만의 일인 듯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쁜 일 같지도 않았다. 제 사랑이 더 크다는 뜻이 아닌가. 아멜 한정 긍정적인 사고는 오늘도 열심히 작동했다.
한편, 시무룩할 뻔했던 카일의 근처를 지나던 고용인들은 탄성을 숨기며 수다를 떨었다. 오늘의 주제도 역시 누나 님이었다.
“트라이하에 다녀온 정보부대원들이 입이 마르게 찬양을 하시더라고. 어쩜 고용인들도 그렇게 생각해 주실까?”
“죽을 사람과 산 사람이 정해져 있지 않다니…….”
“폭발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곳에 같이 남아 주시는 주인님이라. 우리는 복도 많지.”
“그러고 보니 식 날짜가 다음 달 중으로 잡힐 예정이라던데.”
“드디어?”
한바탕 탄성이 터졌다. 평소라면 소란스러움에 눈총을 주었을 카일은 마냥 뿌듯한 얼굴로 그녀들의 수다를 경청했다.
자세히 보니 그녀들은 아멜의 환복을 돕던 자들 중 일부였다. 잠시 로비에 내려온 이유는 목욕 용품을 챙기기 위함이라 했다.
“공작부인께서 기다리실 테니 얼른 가자.”
“목욕물에 꽃잎을 띄우는 걸 좋아하셨으면 좋겠는데.”
“저번에 들여온 고급 마사지 오일도 챙길까?”
쫑긋. 카일의 귀가 반응했다. 그는 일어나 고용인들이 들고 있던 작은 쟁반을 살폈다.
깨끗하게 갈무리된 붉은 꽃잎들이 한가득 있었고, 그 옆에 작은 병에 담긴 향유가 여러 개 담겼다. 언젠가 자신이 주문한 것이리라.
카일은 모르는 척 뻔뻔하게 물었다.
“그것들은 어디에 쓰려 가져가는 겁니까.”
“마님께 꽃잎을 뿌려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 아, 지금 침실에 딸린 작은 욕실에서 목욕 중이십니다.”
“이리 주십시오. 어차피 방으로 가는 길이니.”
대답이 너무 빨랐나 싶기도 했지만 이만하면 오래 참은 셈이었다. 카일은 마사지 오일과 기타 등등이 들어 있는 쟁반을 들었다.
고용인들이 주변에 없는 것을 재차 확인한 그는 계단을 두 칸씩 올라가려다 체통을 생각해 겨우 인내했다.
그가 침실에 들어서자 눈치 빠른 고용인들은 문틈 새로 새어 나오는 공기처럼 빠르게 물러났다.
카일은 어디에도 고용인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파악하곤 욕실 문을 열었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달아 있던 제 뺨을 더욱 덥히는 듯하다.
“누나.”
넓은 욕실에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자고 계실지도 모른다. 카일은 덩그러니 놓인 작은 욕조를 발견했다.
아직 시야가 뿌예 잘 보이진 않았지만 제가 언젠가 선물한 유리 욕조였다. 물과 그 안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
달칵. 카일은 안에서 욕실 문을 잠그곤 그녀에게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