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09화 (109/134)

#109

상대적으로 차가운 공기를 느낀 아멜은 고개를 작게 저어 졸음을 털어냈다.

피곤한 몸이 뜨뜻한 물을 만나니 나른해져 잠깐 졸았나 보다. 고용인들이 사라지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눈을 뜨니 욕실에 사심 가득한 미소를 머금은 카일만 덩그러니 들어서 있는 그림은 상당히 자극적이었다.

“왔어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 카일은 자르르 저려오는 몸을 모르는 체하며 걸음을 뗐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유리 욕조를 향해.

“……?”

그러나 욕조에는 맑고 깨끗한 물 대신 웬 희뿌연 물이 가득했다. 목욕물이 불투명하니 여느 욕조들처럼 안이 보이지 않았다.

카일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유리 욕조가 왜 유리 욕조겠나. 대리석 깎아 만들면 쉬울 걸 왜 굳이 가공이 더 어려운 유리로 만들었겠냔 말이다.

이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물에 가루인지 액체인지 약초인지 모를 것을 탄 고용인을 당장 불러다가…….

“카일. 제가 넣으라고 한 입욕제예요. 피로회복에 좋다고 해서.”

“……그렇습니까.”

“이렇게 아쉬워할 줄 알았으면 다른 걸 넣는 건데.”

수면 밖으로 아슬아슬하게 뻗어 나온 왼손이 뺨을 어루만진다. 여전히 약혼반지가 끼워진 터라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걸 잠시 잊었다.

목욕물이 따뜻해 그녀의 손길도 뜨거웠다. 카일의 목울대가 도드라지게 움직였다.

그는 욕조의 머리 부분에 잠시 멈춰서 허리를 숙였다. 아멜은 욕조에 기댄 채 고개를 뒤로 젖혀 그의 입맞춤을 받아냈다.

그의 입술이 콧등과 턱에도 잠깐 닿았다 떨어졌다. 카일은 입술을 다시금 짧게 맛보곤 욕조의 중앙부에 걸터앉았다.

“카일. 가지고 온 건 뭐예요?”

“넣어도 됩니까?”

카일은 쟁반에 담겨 있던 붉은 꽃잎들을 보여주곤 흩뿌렸다. 재킷을 바닥에 대충 벗어 두고 팔을 걷은 다음 목욕물 깊이 팔을 담갔다.

그의 손이 찬찬히 움직이며 만드는 물결을 따라 장미꽃잎들이 움직였다. 카일은 느릿한 움직임과 반응을 즐기며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그의 셔츠가 홀딱 젖어 살결이 투명하게 비쳤다. 아멜은 그의 손을 살짝 잡고 말했다.

“들어올래요?”

카일이 홀린 듯 몸을 일으켰고 욕조의 물이 한 차례 넘쳤다. 그가 입을 맞출 때면 수면이 찰박였다.

목선에 닿은 입술이 집요한 자국을 남겼다. 그녀의 입에서 나른한 숨이 새어 나왔다.

아멜은 눈을 감고 그의 뒷머리를 쓸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찬찬히 고개가 젖혀졌다.

***

나는 무언가가 뺨에 닿는 것을 느끼곤 눈을 떴다. 외출 준비를 말끔히 마친 카일이 입 맞추고 막 멀어지던 참이었다.

분명 어제 같은 시간에 함께 잠들었는데 카일은 단잠을 잔 듯 개운해 보였다. 참으로 대단한 체력이다.

“일정이 있어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저녁에야 돌아올 것 같습니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저도 잠깐 하일 타임스 건물에 다녀올 예정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하일 타임스?”

“응. 산책 겸해서 프링글스 사장님이랑 다과 시간도 좀 갖고. 레모네이드를 기가 막히게 내주시거든요.”

카일의 입꼬리가 뿌듯하게 올라갔다. 이젠 내가 행선지를 숨기지 않는 게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잘 다녀오라는 뜻에서 가볍게 입을 맞춰 주니 볼에 발갛게 홍조가 올랐다. 새삼 부끄러워하는 이유가 궁금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아십니까? 지금 우리한테 같은 향이 납니다.”

“그야…….”

어젯밤에 같은 탕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다 같은 향유를 뒤집어썼으니. 좋아하는 게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카일은 더 자라며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고 나갔지만 잠이 다 달아났다. 천근만근 무거우리라 생각했던 몸도 가벼웠다.

‘간밤에 마사지를 원 없이 받아서 그런가. 몸이 가뿐하네.’

대체 그런 바람직한 지압법은 어디서 배워 왔는지 궁금하다. 나는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며 오늘 일과를 정리했다.

카일이 트라이하를 상대로 선전포고라도 할까 봐 숨기고 있었지만 납치 사건으로 나는 무척 기분이 상했다.

제 어깨에 주술이 있는 줄도 모르고 내게 다가왔다가 나를 트라이하까지 보내버린 이녹은 차이엘드에게 사과했을 뿐 내게는 유감이라는 말만 전했다.

차이엘드 소유거나 차이엘드가 지분을 가진 무역회사들에게 세금상 특혜를 주겠다고는 했지만 그건 차이엘드가 수출을 규제할 것을 우려한 특단의 조치.

비공식적으로 다가와 황실과 정국이 어느 정도 안정된다면 내게도 적절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하긴 했지만 그 제안이 속을 더 긁었다.

‘장난하나. 납치는 내가 당했는데.’

이녹의 차분하고 착한 성정이나 이복동생을 생각하는 마음 따위야 피해자인 내가 알 게 아니다. 오히려 이녹이 이타르의 인도를 차일피일 미루는 게 심기에 거슬렸다.

‘어떻게 해줄까.’

나는 이제 하일의 백작이니 황제 폐하의 권능 어쩌고 하는 말로 이녹의 트집을 잡는 게 가능했다. 약혼자의 가문인 차이엘드를 끌어들여 물고 늘어지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복수는 그런 게 아니었다. 본래 최고의 복수는 상대가 쇠락하는 줄도 모르게 쇠락하게 하는 것.

‘파멸시키겠다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 소소한 복수쯤은 괜찮겠지.’

나는 그저 트라이하의 콧대가 조금 꺾이길 바랄 뿐이다. 마침 트라이하에는 중앙은행도 없으니 딱 좋은 방법이 있었다.

안 그래도 산업보다는 예술과 철학이 발달한 나라인지라 자칫하면 나라의 경제 기반이 뒤흔들릴 수도 있지만 그건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 소소하게 파산 위기 정도야 뭐…… 황실은 금방 재기할 수 있겠지. 아니면 말고.’

이녹이 사방에서 달려오는 빚쟁이들을 쫓아내느라 진땀을 빼는 그림을 생각하니 입맛이 돌고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툭―

“마, 마님? 뭐 그리 사악한 웃음을…….”

“어머, 바네사. 언제 왔어요?”

바네사는 나를 깨울 때면 습관처럼 가져다주던 신문과 책을 놀라 떨구었다. 내 웃음이 그렇게 사악했던 것일까.

다시 주운 신문을 건네받을 때 그녀의 불안한 속마음이 들려왔다.

「차이엘드 공작이 무시무시한 부대들의 이름까지 평화유지군이라고 바꾼 걸 모르시나.」

「정작 마님은 전혀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실 얼굴이 아닌데.」

「이번엔 또 물 밑에서 무슨 일을 벌이실지…….」

꼴깍 침을 삼키는 게 보여 나도 모르게 웃었다. 바네사의 얼굴만 보면 내가 이 세계의 흑막인 게 맞았다.

“마님. 트라이하 폭로전을 시작하시려거든 제게도 알려 주세요. 미리 마음의 준비 좀 하고 있게.”

“폭로전? 이번엔 그런 거 안 할 거예요.”

“네? 그럼요? 황태자 암살 작전 같은 거라도 짜고 계신 건 아니죠? 그런 쪽이라면 더더욱 제게 말씀해주셔야 해요.”

“암살이라뇨. 이번 칼럼은 전에 썼던 것들이랑 다르게 따뜻하고 평화로운 내용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바네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 말을 농담 취급하는 눈치였다.

하긴, 조금 갑작스럽긴 할 거다. 여태껏 내가 쓴 글들은 칼럼의 겉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도 결국 폭로나 저격이 목적이었으니.

하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차이엘드의 피앙세인 아멜리아 다이앤이 납치되었다는 기사가 1면을 차지하는 것을 막을 순 없겠지만…….

‘이녹을 긴장하게 하려면 이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테니.’

다시 한번 입꼬리를 올려 보이니 바네사가 질겁을 했다. 모르고 보면 내 웃음이 무척 사악하니 얼른 알려달라는 말까지 덧붙여 가며.

“바네사. 지금 트라이하의 경제 상황이 어떤 것 같아요?”

“음…… 좋지 않을까요? 일단 식민지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은과 향신료를 퍼오고 있잖아요.”

“제 생각도 그래요. 게다가 이녹은 백성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상당한 돈을 시중에 풀 거예요. 트라이하의 국민 개개인들은 많은 돈을 갖게 되겠죠.”

바네사는 이제야 알겠다며 추리를 마친 명탐정처럼 눈을 빛냈다.

“이번에도 황실이나 측근의 지배에 부정적인 여론을 일으켜 손 안 대고 코를 풀 작정이신가요?”

“아뇨. 전 그냥 하일의 기업가들에게 지금이 트라이하까지 사업을 확장할 적기라는 메시지만 던질 거예요. 하일의 질 좋은 물건들이 수출될 수 있도록.”

“음? 수출을 권장하는 글이라면 복수랑은 거리가 상당하네요?”

“딱히 복수심에 찬 글을 쓸 생각은 없어서. 외출은 조금 더 쉬다 오후에 할 테니 준비해주세요.”

바네사는 고개를 조아리면서도 아리송했다. 내 의도를 읽어내지 못한 모양. 나는 픽 웃으며 힌트를 흘렸다.

“당분간 정부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할 게 뻔한 상황에서, 은 유입이 늘어나 국민 모두가 부자가 된다면 무슨 상황이 펼쳐질까요?”

***

한편 카일은 예상보다 훨씬 일찍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차이엘드 정기 회의의 참석자들이 피앙세 납치 사건으로 날이 서 있을 그를 생각해 눈치껏 말을 줄였기 때문이었다.

어떠한 트러블도 없이 종료된 회의. 카일은 이것도 사랑과 평화의 힘이라 생각하며 마차에 올랐다. 자신을 흐뭇하게 하는 약혼녀를 위해 할 일이 있었다.

“하일 타임스 건물로.”

잠깐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멜은 오후에야 출발할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먼저 프링글스 사장을 만나는 셈.

그녀가 했던 것처럼 마차를 중앙 시장에 세우고 위장용 망토를 두른 뒤, 카일은 곧장 프링글스 사장에게로 향했다.

“공, 공, 공작 전…….”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생긋 웃으니 프링글스는 신의 음성이라도 들은 것처럼 무한한 긍정을 보였다. 아니, 사업을 하는 그에게 대부호 공작은 신이나 다름없었다.

“프링글스 사장. 전에는 무작정 찾아와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아닙니다. 전혀 개의치 않고 있으니 부디 마음 쓰지 마시지요. 제겐 되려 영광이었습니다.”

개의치 않고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프링글스는 카일의 얼굴을 가까이 본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그 순간만 곱씹었다.

사업가들이 차이엘드의 문장이 새겨진 작은 조각상들을 사거나 차이엘드 공작의 얼굴을 곱씹는 건 대부분 같은 이유였다. 프링글스도 같은 단꿈을 꾸고 있었다.

‘혹 하일 타임스를 인수하시려는 건 아닐까. 우리의 전설이자 자랑인 앤 스미스 양이 있으니 아예 불가능한 전개는 아니야.’

앤 스미스의 정체를 알게 된 지금, 프링글스는 차이엘드에게 인수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더욱 부풀었다.

트라이하 타임스뿐만 아니라 켈트만 타임스를 포함해 여러 나라에 다양한 소식을 전할 수 있을 터였다.

다양한 사람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하일 타임스를 찾는 그림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를 대충 짐작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제 약혼녀가 아끼는 이 회사에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프링글스는 바르르 떨리는 수염을 애써 진정시키며 모르는 체했다.

“도, 도움이라면…….”

“인수.”

“……!”

“회사의 현황과 발전 가능성을 고려하여 가격은 이쯤 생각하고 있습니다.”

카일은 품 안에서 프링글스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규모의 액수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에 숫자 0이 헉 소리가 날 정도로 많았다.

‘이, 이 돈이라면 마을 정도는 통째로 사고도 남겠군. 너무 과한데…….’

프링글스는 제 그릇이 작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이 차이엘드와 함께할 기회를 걷어차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과, 과분한 평가에 감사드립니다. 저희 하일 타임스는 지금처럼 열심히 해나가겠습니다!”

“그럼 이만 돌아갈 테니 남은 이야기는 고용인과 나누십시오.”

협상을 마친 카일은 늘 그랬던 것처럼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일어났다.

거액을 제안한 것을 번복하지 않겠다는 듯 거리낌 없는 그의 태도는 잠시 후, 프링글스가 덜덜 떨며 흘린 말 때문에 잠시 무너졌다.

“앞으로도 아내분…… 아니, 공작부인의 편의와 보안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아내. 공작부인.

두 단어에 카일은 다시 펜을 집어들었다. 번복하지 않는다는 건 저 사랑스러운 호칭이 나오기 전의 이야기였다.

“헉……!”

잠시 후, 프링글스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0’을 하나 더 추가하는 카일을 보며 입을 틀어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