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평소와 같은 방법으로 하일 타임스 건물에 도착한 나는 무언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흥분 상태인 것일까.
‘혹시 나 때문인가? 하지만 프링글스 사장님이 내 정체를 떠벌리실 분은 아닌데.’
궁금증에 대한 답은 사장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찾을 수 있었다. 기자와 인쇄공을 비롯한 모두가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일 타임스가 차이엘드와 함께한다니…….”
“이제 우리도 목에 힘 좀 주고 다녀도 되겠군.”
“어머. 언제는 힘 안 주고 다닌 것처럼 말하네?”
“이 사람아! 차이엘드가 회사를 인수하기 전과 후가 같나?”
인수. 두 글자에 아득해졌다. 내 직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을 알아냈으니 카일이 무언가 일을 벌이리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런 식일 줄이야.
물론 카일이 예쁜 꽃병을 가져다 둔다거나, 몰래 맛있는 음식을 보낸다거나 하는 소소한 방법을 쓸 것이라 예상하진 않았다.
‘별관을 하나 더 짓는 정도로 끝날 줄 알았는데.’
차이엘드 스케일로 사고하려면 몇 년은 더 지나야 할 것 같다. 자세한 것은 사장님에게 듣는 게 빠를 테니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사장실에 들어가 깨달았다. 일반 직원들이 보이던 흥분과 기쁨은 프링글스 샤르테가 느낄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는 것을.
“앤…… 아니, 다이앤 백작 전하!”
사장님은 수염이 휘날릴 정도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를 조금은 어려워하면서도 한껏 반기는 모습.
앤 스미스라 불릴 때도 한껏 특별 대우를 받았지만 아멜리아 다이앤이라는 정체를 들킨 지금은 더했다.
그가 손뼉을 짝짝 치자 카페테리아의 직원들이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들을 가득 담아 내왔다. 일순간 내가 신문사 사장실에 왔는지 디저트 카페에 왔는지 헷갈릴 정도.
‘……사람을 시켜서 인수한 게 아니라 카일이 직접 다녀갔나.’
이젠 보지 않아도 카일의 행동이 그려졌다. 나는 대부호를 만나 바짝 긴장했을 프링글스 사장님을 바라보다 찬찬히 망토를 벗었다.
검은 신분 위장용 망토 안에 내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도 실제로 보는 건 다른 느낌인가 보다. 사장님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장갑을 벗자 그간 꽁꽁 숨겨온 약혼반지도 드러났다. 늘 나누던 인사 대로 오른손을 내미니 그가 경악했다.
“프링글스 사장님. 괜찮으니 늘 하던 대로 대해주세요.”
“어찌 제가 차이엘드의 피앙세에게 손을 댈 수 있겠습니까.”
사장님은 신의 음성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쉬이 내 손을 맞잡지 못했다. 결국 그의 손을 잡고 흔든 건 나였다. 정전기라도 일어난 양 움찔하기까지 하니 조금 미안했다.
“사장님, 그동안 정체를 숨겨서 죄송해요.”
“죄송이라니. 부디 말씀을 거두어주십시오.”
“그렇게 어렵게 대해주시면 조금 섭섭한걸요?”
내 입에서 부정적인 단어가 나오자 사장님이 질겁을 했다. 풋 웃은 나는 다시 망토를 뒤집어썼다.
“불편하실 터인데 망토는 왜 다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사장님이 불편해하실 테니 아멜리아 다이앤의 칼럼은 없을 거예요.”
“……!”
사후세계에서 마주한 신이 ‘넌 지옥으로 가라’하고 말하면 이런 반응일까. 사장님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애절한 눈빛을 보내왔다.
“하지만 앤 스미스라는 이름으로는 계속 글을 쓰고 싶어요.”
“……!”
“그러니 사장님이 저를 조금만 도와주세요. 일단은 예전처럼 저를 대해 주시는 것부터.”
생긋 웃으며 손을 맞잡으니 속마음이 영상으로 보였다. 응원하던 운동선수가 경기에서 우승했을 때나 보일 법한 함성과 환호.
나팔 소리와 종이꽃이 하늘을 어지러이 수놓았고 프링글스 사장님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그림이었다.
「앤 양, 아니, 다이앤 백작께서 우리 신문사를 선택해주시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
「내 말년 운이 다 이곳에 쓰인 게 분명해.」
「차이엘드 인수 소식보다도 앤 양의 글을 계속 볼 수 있다는 게 참으로 기쁘군!」
콩알만 한 눈이 환희로 빛났다. 사장님은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럼 이전처럼 대해보겠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제야 예전처럼 대해 주시네. 나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슬슬 본론을 꺼내려는 걸 눈치채셨는지 사장님은 내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앤 양.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트라이하에 대한 폭로글을 쓸 예정인가? 아니면 경제 분석 칼럼?”
사장님의 반응은 바네사가 보인 것과 비슷했다. 하긴, 황실과 켈트만에 비슷한 조치를 취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가.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대응할 생각이었다.
“아뇨. 트라이하로 사업을 확장하기에 적기라는 글을 쓸 거예요. 사업가들, 특히 무역업을 하는 사람들이 트라이하를 주목하도록.”
“……왜 그런 글을? 앤 양은 트라이하에 화도 안 나나?”
무려 납치까지 당했는데 화가 안 날 리 없다. 하지만 수출을 권장하는 것이야말로 트라이하에 따끔한 복수를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트라이하는 지금 반역 사건으로 뒤숭숭하지만 정통 계승자인 이녹 전하가 살아 계시니 곧 수습될 거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시민들은 약간의 당근에도 무한한 흡족감을 느끼는 법이지. 지금 트라이하 황실은 어느 때보다 풍요로우니 수습이 빠르겠군.”
“맞아요. 지금 트라이하는 식민지에서 어마어마한 은을 가져왔죠. 황실은 물론이고 백성들까지도 부유해요. 그 부유함이 국가의 근간을 흔들 테지만.”
나는 차를 한 모금 음미했다. 너도나도 주머니가 두둑하면 행복해질 것 같지만 현실은 반대이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시중에 돈이 많이 풀리면 결국 물가가 오르게 되어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정해진 임금은 따라 오르지 않는다.
결국 화폐의 가치가 떨어져 하루치 임금으로는 한 끼 식사도 배불리 할 수 없는 사태가 닥칠 것이다.
‘게다가 트라이하에는 은 유입을 통제할 만한 중앙은행이나 그와 비슷한 기구가 없어. 인플레이션을 막는 건 불가능해.’
물론 인플레이션 현상 정도는 이녹이 막을 수도 있다. 내가 배웠던 현대 경제학에서처럼 체계적인 조치는 아니라고 해도 어쨌든 일국의 황제이니.
그렇지만 하일의 수출이 시작되면 경제는 작게라도 분명 동요하리라.
“이녹은 납치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차이엘드의 수출품에 세금을 매기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곧 상단들이 움직일 테죠.”
“특, 특종이군……!”
“특종 기사는 나중에 써도 늦지 않아요. 우리가 할 일은 무역업자들이 정국이 불안정한 트라이하에 진출하는 일을 꺼리지 않도록 하는 거죠.”
프링글스 사장님은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트라이하 국내의 물가가 치솟은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하일의 물건이 수출되면 트라이하 국민들은 하일의 물건들만 살 거예요.”
“그럼 하일의 상인들이 부자가 되겠…… 잠깐.”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걸 보니 이제야 진짜 의도를 눈치채신 듯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마저 이었다.
“맞아요. 차이엘드의 수출품에 세금을 매기지 않겠다는 관세 특혜를 예고한 이상 트라이하에서 생산된 물건들은 값싼 하일산 제품들과 가격 경쟁 자체가 안 돼요.”
“트라이하의 물가는 지금도 가파르게 오르고 있으니 자네 말대로 되겠지. 그렇다면 트라이하산 물건들은 팔리지 않을 거고.”
“결국 트라이하는 수입품에 의존하게 될 거예요. 제국 내부의 제조업 생산 기반은 무너질 거고.”
“시간이 더 지나면 트라이하가 기껏 실어온 은들이 죄다 하일로 유입되겠군. 앤, 자네는 대체…….”
나는 마지막으로 차를 홀짝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계획은 모두 사장님이 말한 대로였다.
‘결국 트라이하는 부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제국에 불과하게 되겠지.’
현실이 학부 때 배운 ‘네덜란드 병’으로 잘 흘러가 줄지는 모르겠지만 이만하면 내 복수는 하는 셈이니.
“그럼 의논은 이쯤 하는 걸로 해요. 조만간 글을 보낼 테니 확인해주세요.”
“그러지. 도착하는 대로 확인해 신문에 낼 테니 걱정 말게.”
망토를 고쳐맨 나는 늘 그랬던 대로 손을 내밀었다. 가벼운 악수를 나누자 그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이 여인이 정녕 연대보증으로 나앉은 다이앤 백작가의 영애가 맞나?」
「하긴. 이 정도 실속을 갖추었으니 가문을 일으킨 것이겠군.」
「차이엘드가 보물을 얻었어…….」
***
황제 베르들레반 드 하일은 종종 소박한 옷차림으로 황궁을 나서곤 했다. 백성들을 굽어살필 겸 바깥바람도 쐬려는 편안한 의도였다.
그러나 오늘의 잠행은 각오가 남다른 데다 긴장감이 넘치기까지 했다. 수하 하나가 수상쩍은 정보를 흘렸기 때문이었다.
‘작은 다이앤 백작이 시장에는 왜……?’
왜일까. 시장에 멈춰서는 차이엘드의 마차를 보았다는 수하의 말에 반사적으로 하일 타임스가 떠올랐다.
개선의 여지가 없는 방탕함을 지니고 있던 부황과 하일을 집어삼키려 했던 켈트만을 휘청거리게 만든 문제의 신문.
‘목걸이 사건 때와 켈트만 때 모두 하일 타임스의 앤 스미스는 놀라울 정도의 통찰력을 보였었지.’
신문만큼은 늘 보는 베르드였다. 그는 칼럼니스트 앤 스미스가 사건의 관계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해왔다.
오늘은 그간의 의구심을 해결하기 위해 몰래 잠행을 나온 것이었다. 베르드는 걸음을 재촉해 하일 타임스의 건물 근처에 숨었다.
곧 척 보기에도 수상해 보이는 누군가가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대낮에 검은 망토라니.
게다가 하일 타임스의 사장 프링글스 샤르테는 그녀에게 조심히 가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마치 귀빈이라도 모시는 태도.
‘저 여자가 하일 타임스를 먹여 살리는 앤 스미스겠군.’
후드를 뒤집어쓴 베르드는 고양이처럼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 어딘가로 향하는 그녀의 뒤를 밟았다. 잠시 후.
“……!”
“왜 내 주인의 뒤를 밟고 있지?”
살기 어린 여자의 목소리가 베르드의 귓가에 닿았다. 닿은 것은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차갑게 날 선 칼이 목에 스치듯 닿았다.
“나, 나, 나는…….”
베르드는 눈알을 굴려 자신을 제압한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청아한 외모가 어딘가 낯이 익었다.
어디에서 봤을까. 백금발이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화려하게 꾸민 모습을 본 것 같진 않다. 시녀. 분명 누군가의 시녀였다.
그리고 살벌한 목소리를 내던 그녀가 모시던 주인은……
“……!”
“뭘 놀라, 이 새끼야. 우리 마님 쳐다보지 말고 눈 깔아.”
퍽―!
바네사는 주저라곤 없는 손길로 망토를 두른 괴한을 쓰러트렸다. 감히 우리 연약한 마님을 미행한 놈은 족쳐야 마땅했다.
바네사는 아멜 몰래 짱돌을 집어 들고 바닥에 널브러진 괴한의 망토를 벗겼다. 얼굴을 반쯤 뭉개줄 생각이었건만 되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썅…… 황제가 왜 여기서 나와?’
바네사는 황급히 들췄던 망토를 다시 덮었다. 마님에게 걸리면 또 사고를 쳤느냐고 한 소리 들을 것이다. 그녀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황제를 스윽 발로 밀었다.
“바네사. 안 오고 뭐 해요?”
“여기 귀여운 고양이가 있어서 잠깐 보느라…….”
“고양이? 저도 볼래요!”
“안 돼요. 공작 전하께서 질투하실 거예요.”
베르드는 그럴듯한 이유를 대고 쏜살같이 현장을 빠져나가는 둘을 보며 기함했다.
아멜리아 다이앤. 일국의 황제를 폐위시키고 켈트만과의 동맹 관계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데 깊이 일조한 앤 스미스.
‘차이엘드가 망해가는 가문의 영애 하나를 구해준 줄 알았건만.’
사실 일련의 사건들을 조종하고 있는 건 그녀였다. 화가 나긴커녕 베르드는 아멜이 두려워졌다. 만일 그녀와 척을 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역시 평범한 영애가 아니었나.’
베르드는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그가 황궁에서 어쩌다 우연히 마주친 아멜을 보고 움찔하는 건 며칠 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