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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11화 (111/134)

#111

트라이하의 이녹은 정신이 없었다. 3주라는 짧은 시간 동안 폭풍처럼 몰아친 일련의 사건들 때문이었다.

그는 불면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며 이복동생이 반역을 일으켰던 날과 그 이후를 회상했다.

차이엘드의 평화유지군들이 떠난 후. 이녹은 살아남은 대신들과 함께 상황을 정리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다.

반역을 일으켜 황성을 쑥대밭으로 만든 건 이타르였으나 이녹은 어떻게 해서든 이복동생의 목숨만은 붙여주고 싶었다.

“황제 폐하! 당장 저 반역자를 죽여야 합니다!”

“하지만 차이엘드 공작이 이타르를 인도받으려 하고 있소. 이 이상 공작의 신뢰를 깨면 위험하오.”

“큼…….”

당장 이타르의 뼈와 살을 발라내 짐승의 먹이로 줘버리자던 대신들은 차이엘드를 들먹이니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대부호 가문의 저력이 두렵기도 했거니와, 자신들을 피바람에서 구해준 것이 차이엘드의 평화유지군이기 때문이었다.

트라이하의 황실은 차이엘드와 다이앤에게 큰 빚을 진 셈. 때문에 이녹은 그들을 핑계로 이타르의 죽음을 늦출 순 있어도 없던 것으로 할 수는 없었다.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대신들을 충원하고 이타르를 심문하며 3주를 보냈다.

납치와 반역이라는 이타르의 죄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고, 그 스스로도 죄책감을 느끼는지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이타르는 차이엘드로 인도될 예정이었다.

‘부디 치욕스러운 죽음만은 피하기를.’

반역자이긴 하나 어쨌든 타국의 황자를 공식적으로 인도받는 경우이니 아무리 차이엘드라 해도 심한 고문이나 신체 훼손은 불가능하리라.

최근 차이엘드와의 무역 상황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일 제국의 무역을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는 차이엘드가 일순간 물자 교류를 끊을까 봐 불안해했던 것이 무안할 지경.

오히려 차이엘드를 포함한 하일 측은 자선사업이라도 하듯 저렴한 가격에 다량의 물자를 실어오곤 했다. 아직 정국이 불안정한 트라이하에 거리낌 없이 사업 진출을 시도하기까지.

‘이상할 정도로 우호적이군. 다이앤 영애가 이타르에게 동정심이라도 품은 것인가…….’

이녹은 무언가 찜찜한 기분을 느끼며 책상 앞에 앉았다. 반역을 제압하고 지존의 자리에 오른 자의 책상은 그의 정신처럼 지나치게 너저분했다.

‘이타르가 무사히 차이엘드에 인도되어야만 할 텐데.’

이타르의 입장에서는 무사한 것이 아닐 테지만. 이녹은 뒷말을 삼키며 책상에 머리를 힘없이 떨구었다.

***

나는 끼적이고 있던 서류를 탁탁 쳐 가지런히 했다. 몇 시간 동안 보고받은 것들을 부지런히 메모한 터라 두께가 꽤 됐다.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은 요즘, 나는 나름의 신부수업을 들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오늘은 카일과 함께 차이엘드가 관여하고 있는 사업 전반에 대한 대략적인 보고를 들었다.

“누나. 괜찮으십니까?”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괜찮아요. 보고 좀 받았다고 나가떨어질 만큼 체력이 약하지도 않고.”

나는 흐뭇하게 웃는 카일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 조금 피곤하다는 건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각 사업들을 아주 간단히 듣는다 해도 차이엘드는 수 세대에 걸친 대부호 집안. 내가 숙지해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냥 듣기만 하는 것도 어려운데 사교 활동을 할 때처럼 솔직한 반응을 숨기기까지 해야 하니 더욱 피곤했다. 왜 반응을 숨기냐고 묻는다면 그저 웃겠다.

「방금 호텔 사업에 관심을 가지신 건가. 아멜리아 호텔을 하나 지어서 선물하는 게 좋겠군.」

「백화점 얘기를 할 때 분명 웃으셨어. 중앙광장 근처 부지는 아멜리아 백화점으로.」

「장미 정원 건설 계획이 마음에 드시나? 제국에 존재하는 장미 품종을 전부 모으려면 대략…… 얼마 안 드네.」

속마음을 들은 내가 식겁하는 건 아는지 모르는지 보고를 듣는 내내 카일은 내 얼굴만 바라봤다. 이렇게 집중하는데 어떻게 표정을 드러낼까.

“누나. 피곤하시면 침실로 가서 잠깐 주무시겠습니까?”

물론 못 할 짓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리 카일이 이렇게 예쁜 웃음과 사심을 머금고 좋아하는데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찬찬히 스트레칭을 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회의가 끝나는 대로 클레어 언니의 별궁에 다녀오려고요. 바네사의 아레테랑 관련해서 감사 인사도 전할 겸.”

“……레이디 클레어와 사전에 잡은 약속입니까?”

왜일까. 카일은 조금 곤란한 듯 시선을 피했다. 아파트 단지보다 훨씬 넓긴 하지만 한 집안에 사는 사람끼리 굳이 약속을 잡고 만나야 하나.

“그런 건 아닌데…… 아, 혹시 클레어 언니에게 바쁜 일정이라도 있나요?”

“…….”

“카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카일의 대답은 무언가를 회피하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손을 뻗어 마음을 읽어내려니 슬쩍 피하는 게 더 수상했다.

“우리 예비 신랑님께서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시나 본데.”

“…….”

“뭐, 제가 언니한테 직접 가서 물어볼게요. 카일은 잘 모르는 일이라고 했으니.”

나는 바네사를 불러 함께 별궁으로 향했다. 그래. 이때까지만 해도 클레어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을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

비슷한 시각. 클레어는 치장을 시작했다. 별궁의 시녀들이 승마용 복장과 가죽장갑을 여러 벌 가져와 그녀에게 선보였다.

“옷은 최대한 색이 짙은 것으로 고르도록.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는 필요 없고 질긴 머리끈 하나만 준비해.”

클레어는 제 몸을 차례로 감싸는 옷감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상복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새카만 것들이었다.

상복. 클레어는 그 단어가 딱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준비를 계속했다. 늘 길게 늘어뜨리는 결 좋은 흑발은 높이 올려 질끈 묶었다.

마지막으로 검은 가죽장갑까지 낀 그녀는 턱짓으로 시녀들을 물렸다. 잠시 후, 브루노를 포함한 차이엘드의 정보부대원들이 들어왔다.

“왔나?”

“클레어 님.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가져오라고 한 물건은?”

브루노는 클레어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하일과 켈트만의 약혼식 당시 아멜이 뿌렸던 것과 같은 향수가 들어 있었다.

클레어는 그것을 제 몸에 뿌렸다. 관능적이면서도 깔끔한 향이 공간에 퍼졌다. 모든 준비를 마친 클레어는 초침까지 정확히 맞춰진 벽시계를 바라봤다.

“곧 이동할 테니 준비하도록.”

초침을 노려보는 눈초리가 사냥감의 휴식을 기다리는 맹수의 것처럼 날카로웠다. 얌전히 시간을 재던 그녀가 일순간 이동의 아레테를 일으켰다.

클레어는 물론이고 그녀의 주변에 있던 정보부대원들도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클레어는 일순간 어두워진 시야에 적응하려 잠시 눈을 감았다.

마차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탓에 바닥이 덜컹거렸다. 흙냄새가 섞인 바람은 지금 지나고 있는 산 중턱의 땅처럼 거칠었다.

‘차이엘드 공작부인의 생명을 위협한 죄인을 인도하는 마차치고는 상태가 양호하군.’

클레어는 서서히 눈을 떴다. 마부로 위장하고 있던 차이엘드의 정보부대원과 방금 이동의 아레테로 날아온 사람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실내에 있는 사람이라곤 눈이 가려지고 손목이 묶인 채 바닥에 꿇고 있는 사내 하나.

그의 이름은 이타르. 한때 고귀한 트라이하 황실의 성을 가졌으나 지금 그는 그저 사형 날짜만 기다리는 대역죄인이었다.

‘아멜을 납치한 놈의 목숨이 아직도 붙어 있다니. 마음에 안 들어.’

클레어는 향수가 뿌려진 손목을 이타르의 얼굴 쪽으로 내밀었다. 상처만 조금 났을 뿐 멀쩡한 그가 아멜의 체향을 기억해내곤 반응했다.

안대에 눈이 가려져 앞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이타르는 고개를 쳐들었다. 제 앞에 아멜이 있다고 확신하는 듯. 갑작스레 나타난 그녀가 자신을 구원해주리라는 듯.

동요를 본 클레어는 아무 말 없이 이타르의 턱을 잡았다. 손끝이 차가웠으나 그는 가만히 손길을 받아들였다.

아멜의 쓰다듬이라면 얼마든지 받겠다는 태도가 몹시 거슬렸다. 눈앞의 납치범이 살아 있는 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클레어는 한 손으로 이타르의 머리채를 줴뜯을 뜻 휘어잡곤 말했다.

“이타르.”

“……!”

“반응을 보니 내 목소리를 기억하나 보군.”

“레이디 클레어…… 윽!”

휙―!

클레어의 채찍이 그의 머리통을 휘갈겼다. 머리 다음에는 상체에 채찍이 쩍쩍 달라븥었다. 마차에 혈흔이 낭자했다.

손이 가는 대로 화풀이를 하면서도 클레어는 기분이 무척 좋지 않았다.

이녹은 대역죄인이 황실 혈통이라는 것을 이용해 동생에게 안락한 죽음을 선물하려 했다. 어리석고도 영악한 수였다.

그의 생각대로 하일의 귀족과 황족들은 황자였던 자의 몸을 찢어발길 수 없었다. 이 문제 앞에서는 차이엘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동생의 죽음이 안타까운 줄 알았다면 네 목숨이 아까운 줄도 알았어야지.”

클레어는 아멜을 위해서라면 잠시 차이엘드라는 성을 버리고 별궁의 클레어로 돌아갈 수 있었다.

황자였던 사내를 찢어발기는 행동은 조금도 망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놀라운 마음이 들었다.

오래전, 자신을 별궁에 가둬 기른 아버지가 위독할 때만을 기다려 차이엘드 성을 가진 사내들을 쓸어버린 건 순전히 이기적인 동기였다.

그런데 남을, 그것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영애를 위해 뒷공작을 자처하는 신세가 되다니.

어쩐지 조금 성장한 마음이 들어 뿌듯해진 클레어는 채찍질을 멈추었다. 이타르는 이미 호흡을 멈춘 지 꽤 지난 듯했다.

“우리 아멜을 건드리고도 얌전히 사형당하길 바란 건 아니겠지.”

산뜻하게 말한 클레어는 달리는 마차 밖으로 이타르의 몸을 걷어찼다. 좁은 산길을 따라 달리던 중인지라 그의 몸이 한없이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안타까운 마차 사고군. 돌아가지.”

짧게 평한 클레어가 다시 이동의 아레테를 일으켰다. 그녀는 따뜻한 물에 몸을 잠시 담갔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다.

이동의 어지럼증을 참으려 잠시 눈을 감은 클레어는 피가 흥건한 가죽장갑을 벗으며 눈을 떴다. 그런데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언니?”

“…….”

하필 아멜에게 정면으로 들키다니. 아니, 왜 별궁에 있는 것인가. 잠시 당황한 클레어였지만 아멜이 약속도 잡지 않고 놀러오는 친근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니 표정이 따뜻해졌다.

“잠시 사냥을 다녀오는 길이야. 놀러온 거니?”

태연하고 뻔뻔하게 대답하자 아멜은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네사가 뭐라도 씹은 얼굴을 하는 건 클레어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선하고 따뜻한 시언니 이미지를 지켜낸 클레어는 장갑을 방구석에 던져 숨겼다.

때마침 브루노가 이동의 아레테를 타고 와 중간보고를 전하지만 않았더라도 완벽했으리라.

“클레어 님. 분부하신 대로 이타르는 이동 중 마차의 결함으로 불미스러운 사고를 당한 것으로 꾸미고 있습니다. 비슷한 신장의 시신을 미리 구해두었으니 염려치 않으셔도…….”

“언니……?”

“…….”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브루노는 차츰 고개를 들었다. 따뜻하고 선한 시언니 이미지 구축에 실패한 클레어가 그를 죽일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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