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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12화 (112/134)

#112

습한 욕실 가득 숨소리가 울렸다. 정점을 찍고도 사라지지 않는 긴 여운에 아멜은 욕조에 머리를 기대곤 머리를 뒤로 젖혔다.

가늘게 드러난 그녀의 목선에 카일의 입술이 닿았다. 그는 자잘한 입맞춤을 해대는 것으로 살살 그녀를 꼬드기는 중이었다.

“카일, 이제 그만…….”

그는 도장을 찍듯 뺨에 입 맞추곤 거리를 벌려주었다. 조금 오래 붙잡고 있긴 했다는 자각이 든 탓이었다.

“팔.”

카일이 짧게 말했다. 아멜은 그를 내내 붙잡고 있느라 후들거리는 팔을 뻗어 그에게 매달렸다.

“카일. 머리카락 안 젖게 해주세요. 지금 너무 졸려…….”

“누나는 매일 졸립다는 소리밖에 안 하지.”

픽 웃은 카일은 그녀를 안고 몸을 일으켰다. 물에 잠겨 있던 몸이 허공에 드러났다. 제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려 수없이 떨어트린 입술이 야릇한 자국으로 남았다.

지금쯤이면 고용인들이 눈치껏 침구를 갈았으리라. 다시 깨끗해진 침대 위에 촉촉이 젖은 그녀를 올려둘 생각을 하니 피가 빨리 돌았다.

흠칫 놀란 아멜은 저를 안고 성큼성큼 침대로 향하는 카일에게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

“카일…… 내일 출근해야죠, 출근. 이젠 정말 자야 해요.”

“제 출근 시간은 제가 원할 때라.”

놀란 토끼 눈을 하는 아멜을 새하얀 수건이 깔린 침대 위에 올린 카일은 한참이나 정성껏 물기를 닦아주었다.

최근 읽은 <아내의 피로는 남편이 풀어준다>라는 책에서 본 대로 향유를 손에 듬뿍 묻혀 펴발라주니 아멜은 아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먼저 잠들지는 않으려 하는 게 귀여워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카일은 꼼꼼히 향유를 발라준 뒤 그녀의 아래에 깔려 있던 수건을 바닥에 내던졌다. 움찔하는 그녀의 몸에 흰 이불을 휘감아주며 속삭였다.

“푹 주무십시오. 내일도 밤은 있어야 하니까.”

“결혼식까진 좀 참아주세요. 이러다 과로로 쓰러져서 식을 못 올리겠어.”

“…….”

그건 절대 안 돼. 카일은 목전까지 차오른 말을 꾹 삼키며 팔을 뻗었다. 아멜이 원래 이곳은 제 자리라는 양 꼬물꼬물 움직여 팔을 벴다.

그는 내일 아침이면 엉망으로 뻗칠 머리카락을 쓸어 정리해주며 그녀를 감상했다. 맨살에 흰 이불만 두른 모습이 얼마 전, 웨딩드레스를 고르던 시간을 연상시켰다.

‘……내 아내 예쁘다.’

아멜이 고른 웨딩드레스는 아름다웠지만 지금 모습을 이길 수는 없었다. 카일은 이불만 두른 그녀와 단둘이 비밀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을 상상했다.

“야한 생각 그만하고 얼른 자요, 카일.”

“…….”

금방 들켜버렸다는 게 문제였지만.

아멜은 힘이 빠진 손을 그와 깍지꼈다. 그의 속마음에서 본 웨딩드레스를 떠올리니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새삼 실감 났다.

이타르가 차이엘드로 인도되는 중 안타까운 마차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은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다가 고작 하루 만에 말끔히 사라졌다.

‘대체 차이엘드 남매들이 무슨 짓을 했길래 일국의 황자였던 사람이 죽었다는 기사가 싹 사라지지?’

클레어의 가죽장갑과 브루노의 피범벅이 된 옷을 본 그녀는 마차 사고라는 말을 믿지 않았지만.

저를 납치한 놈이 잔인한 방법으로 죽었다 한들 동요는 일지 않았다. 당한 게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타르의 마지막 모습은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하는 듯했으니.

‘지금쯤 그토록 그리워하던 동생이랑 만났을지도 모르겠네.’

아멜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하곤 제 결혼식이나 상상했다. 식은 그녀가 하사받은 다이앤 영지에서 올리게 되었다.

결혼식 일정이 발표됨에 따라 아멜은 수많은 선물을 받게 되었고, 요즘은 그것들을 구경하거나 신부수업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아멜이 선물을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요즘 몇몇 특별한 사람들에게 줄 답례품 생각으로 눈을 반짝였다.

“카일. 바네사와 관련해서 논의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 여자 얘기를 꼭 지금 해야 합니까?”

“바네사 얘기를 한 다음 카일에게 줄 선물 얘기도 하려고요.”

“…….”

카일은 언제 역정을 냈냐는 듯 성실한 태도로 대화에 임했다. 모두 예상하고 있던 사안들이라 크게 놀랍지 않았다.

재빨리 바네사 건을 처리한 그는 제가 받게 될 선물 이야기를 기다렸다. 아멜은 귓속말을 하듯 조곤조곤 말했다.

“카일에게 주려고 준비한 선물이 곧 완성된다고 하더라고요. 꼭 같이 보러 가요.”

“무슨 선물입니까?”

“그건 비밀. 그동안 받아온 사랑이나 물건들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선물이겠지만 열심히 준비했어요.”

아니. 그런 것들을 다 갚을 수 있는 선물이 있기나 할까. 아멜은 앞으로 그를 오래오래 사랑해주기로 하곤 잠에 빠졌다.

카일은 곤히 잠든 그녀의 머리를 쓸어 주며 목소리를 곱씹었다. 저를 생각해주는 게 무척 고마웠다. 제 사랑이 크다는 것을 알아주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다만 제가 준 것들을 갚을 수 있는 선물은 세상에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 조금 아쉬웠다.

‘……왜 없다고 생각하시지.’

요즘 카일은 한 가지 선물을 원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혼수로 이 선물을 주길 내심 기대했었다.

그녀를 닮은 아이. 차이엘드의 성을 가진 작은 생명을 품에 안고 자신을 부르는 아멜리아 차이엘드.

자신을 기다려주는 따뜻한 눈동자. 나란히 손을 잡고 산책을 하거나 그저 가만히 서로를 껴안는 건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그림이었다.

저가 그 많던 피임 사탕들을 철저히 챙겨 먹고 있으니 불가능한 일인 줄은 알면서도 이미 아이의 이름을 백 개도 넘게 생각해두었다.

‘사랑스럽겠지.’

아내를 닮았다면 매일 접시를 깨트려도 사랑스럽기만 할 것이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공작저지만 벽에 낙서 좀 하면 뭐 어떤가.

카일은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들을 상상하며 아멜을 품에 안았다. 온몸이 기분 좋게 저려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

클레어에게 차이엘드의 안주인 수업을 받은 아멜은 점심식사를 하며 오늘의 일정을 정리했다.

‘카일에게 줄 선물이 잘 제작되고 있는지 점검해봐야 하고. 바네사랑 대화하는 게 먼저인가.’

사실 카일에게 줄 선물의 완성품은 아멜도 보지 못했다. 처음으로 돈지랄다운 돈지랄을 해봤으니 결과물이 꼭 마음에 들었으면 했다.

일단 바네사에게 가기로 한 아멜은 걸음을 재촉했다. 선물 전달을 위해서는 그녀의 방으로 찾아가야만 했다.

‘이걸 위해 일부러 일 폭탄을 떠넘긴 거라고 하면 억울해하겠지.’

바네사는 그녀가 부탁한 일을 하느라 책상 근처에서 조금도 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아멜은 시녀들을 잠시 물린 뒤 분주히 움직이는 바네사를 바라왔다.

그녀의 목에는 클레어가 구입해 아멜이 선물한 목걸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보다 눈에 띄는 건 고용인이 착용하기엔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팔찌였다.

‘이젠 하르모니아의 팔찌라고 불러야겠네.’

목걸이가 바네사의 팔찌로 개조된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트라이하에서 마라바스를 처단할 당시, 그의 목숨을 끊은 건 바네사였다.

아레테의 결정이 박힌 목걸이기에 마라바스를 죽인 바네사가 일단 목걸이를 회수해 하일로 돌아왔다.

하지만 하일과 켈트만의 외교 관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중요한 목걸이를 원 형태 그대로 간직하는 일은 상당히 위험했다.

원래 주인인 황실에 목걸이를 돌려주는 방법도 있으나 그렇게 하자니 켈트만과의 외교 관계가 걸렸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베르드에게 돌려주면 백 퍼센트 리엔 공주의 목에 걸렸겠지만.’

카일은 잠시 고민하다, 목걸이에서 아레테의 결정을 떼어내 팔찌로 제작한 다음 바네사에게 보관을 맡겼다.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팔찌를 차게 된다면 소유권의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물론 믿음직스러운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도 이유였다.

“마님…… 아직 다 못 헸는데 조금만 더 기다리시겠어요?”

“그건 나중에 해도 괜찮아요.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바네사는 서류를 잠시 내려놓고 아멜의 앞에 앉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벌써부터 진지함이 느껴졌다.

아멜은 간단한 다과를 사이에 두고 제 앞에 앉은 바네사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성격이 많이 죽었구나 싶었다.

“이것 좀 볼래요? 바네사가 그때 자른 제 머리카락, 이제 제법 자랐어요.”

“큼, 큼. 그 얘긴 갑자기 왜…….”

“그냥 시간이 많이 지났구나 싶어서요. 얼마 전에 트라이하에서 돌아와 거울을 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바네사는 차분하기만 한 아멜의 목소리가 불안했다. 문득 처음 경호원으로 자신을 고용할 당시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저도 공작저에 들어가는 건가요?”

“그럼요. 당분간은.”

분명 위험한 일을 벌일 당분간만 저를 고용하겠다 했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사건 다음으로는 켈트만이, 켈트만 다음에는 트라이하의 일이 터졌으니 괜찮았다.

하지만 평화의 시작일 결혼식이 코앞인 지금, 아멜은 더 이상 위험한 일을 벌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바네사는 굳은 얼굴로 찻잔만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쿵쿵 뛰는데도 손발이 차가워졌다. 언젠가부터 평생 아멜을 모실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같이 시시덕거리는 것도, 비밀스러운 명을 받드는 것도 모두 제 역할이라 무심결에 확신했다. 아닌 줄 알면서도.

“바네사. 울어요?”

“……제가 마님에게 필요 없어진 건가요?”

“그럴 리가요. 제가 바네사를 보내려는 건 바네사의 힘이 제 몸뚱이 하나 지키기엔 너무 아깝기 때문이에요.”

아멜은 작게 떨리는 바네사의 손에 제 손을 얹고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제 경호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잖아요.”

“…….”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로 아레테를 얻어서 힘을 가진 사람들을 다스리고 싶어 했잖아요. 돈도 많이 벌고.”

아멜이 장난스레 덧붙이자 바네사가 인상을 찡그렸다. 눈물이 톡 떨어져 테이블을 적셨다.

“……하지만 제가 돌아올 곳은 여기라고 하셨잖아요.”

“물론 언제든 돌아와도 좋아요. 도망을 오든, 휴식을 취하러 오든. 하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진 말아요.”

“마님…….”

“신혼여행에서 돌아올 때까지만 경호를 부탁할게요. 그간 급료는 계좌에 넣어두었어요. 그리고 이건 퇴직금.”

아멜이 하르모니아의 팔찌를 톡톡 두드리자 바네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이걸요?”

“응. 줄곧 갖고 싶어 했잖아요? 이미 카일이랑 이야기를 마친 사안이니 괜찮아요. 이런 위험한 물건은 바네사처럼 강한 사람이 맡는 게 옳아요.”

“하지만…….”

“에이. 받아주세요. 팔진 못하겠지만 값진 물건인 건 알잖아요? 정 뭣하면 돈으로 줄 수도 있고.”

바네사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 떠나야 한다면 제 손을 벗어날 돈보다는 아멜의 손길이 한 번이라도 스친 물건을 기념으로 가져가고 싶었다.

철이 들기 전부터 줄곧, 최고의 용병단이라던 아레티스트 중에서도 가장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저를 보살펴준 주인을 떠나야 하는 지금, 돈 같은 건 무용하게만 느껴졌다. 제게 명예로운 일이란 이미 주인의 명예를 드높이는 행동이 되어버렸다.

‘목걸이를 훔치지 못한 게 행운이었구나.’

바네사는 씩씩하게 눈물을 닦고 아멜과 눈을 맞췄다. 아레티스트의 보스 다음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공작저에서는 떠나겠지만, 전 언제나 마님을 지킬 거예요.”

“그래요. 종종 놀러와 줘요.”

아멜은 마지막으로 그녀를 꼬옥 안아주었다. 언제나 지켜주겠다는 약속이 그저 뭉클한 작별 인사라고만 생각하며.

순식간에 아레티스트의 보스가 된 바네사가 다이앤 영지에 멋대로 아멜리아 기사단을 만들고 기사단장이 되는 건 몇 년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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