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차이엘드와 다이앤의 세기의 결혼식이 하루 전으로 다가왔다. 아멜이 하사받은 다이앤 영지에서 간단히 동선을 살피고 온 카일과 아멜은 마차를 타고 공작저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결혼식에 가슴 설레하는 아멜과 달리 카일의 얼굴은 그리 좋지 않았다. 얼마 전 전해 들은 다이앤 백작저의 풍습 때문이었다.
“왜…… 왜 다이앤 백작가에는 결혼식 하루 전에 친가에서 자는 풍습이 생긴 겁니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걸요? 사실 언제부터 있던 풍습인지도 모르겠어요.”
아멜은 키득키득 웃으며 망연자실한 카일을 달랬다. 왜 저기압이신가 했더니만.
차이엘드의 풍습에 따라 결혼식 하루 전날 밤인 오늘은 내일 밤, 즉 신혼 첫날밤을 연습하는 날이라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부리고 있던 그이니 우울해할 법도 했다.
‘왜 남자들은 가문의 풍습을 하루 만에 만들어내는지 몰라.’
다이앤 백작이 하도 완고하게 주장했기에 카일도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고로 오늘 밤은 아멜과 떨어져 보내야 했다.
「결혼식 전날 왜 이런 재앙이…….」
「장인어른은 나를 싫어하시는 걸까.」
「어떻게 떨어져 있으라는 거지.」
「……신혼 첫날밤에 몰아서 하는 수밖에.」
카일은 제 결의가 실시간으로 유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하곤 의지를 다졌다. 어차피 결혼식을 올리면 아멜리아 차이엘드. 장인어른과의 기나긴 신경전은 제 승리였다.
아멜에 관한 일에만 발동되는 카일의 긍정적 사고방식이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쭉 함께할 테니 하루쯤은 떨어져 보낼 수 있으리라.
“그런데 왜 바로 다이앤 백작저로 향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차이엘드 공작저에 잠깐 들르려고요. 짐도 챙길 겸, 카일에게 선물도 전할 겸.”
드디어 선물 전달식이군. 원하던 선물은 아니었으나 그녀에게 무언가를 받는 일은 항상 기뻤기에 카일은 행복했다.
둘은 마차에서 나란히 내려 차이엘드 공작저의 명물, 아멜리아 호수로 향했다. 뭉게구름이 푸른 하늘을 군데군데 가린 화창한 날씨인지라 산책은 기분이 좋았다.
호수가 가까워지자 카일은 소중한 아멜리아 호수가 조금 달라졌음을 눈치챘다. 거대한 거울 같던 수면에 웬 섬 하나가 생겼다.
작은 오두막과 함께 노란 꽃이 잔뜩 심어진 섬은 시골의 집과 마당을 수면에 옮겨둔 느낌이었다. 고즈넉하긴 하나 무언가가 엉성했다.
하늘이 푸르를 때는 괜찮았지만, 흰 구름이 비쳐 호수가 우윳빛이 되면 노란 섬은 꼭 거대한 계란프라이의 노른자처럼 보였다.
“짠! 저게 제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카일리안 섬이라는 이름도 붙여줬어요. 귀엽죠?”
발랄하게 말했으나 카일의 반응은 상당히 정적이었다. 아멜은 되레 불안해져 설명을 덧붙였다.
“조경의 일환으로 인공섬을 주문제작 할 수 있더라고요. 제가 아직 부족해서 계란 노른자처럼 되어버렸지만.”
“…….”
“배, 배를 타면 섬에 있는 집 안에 들어갈 수도 있어요! 안쪽에 가구도 들여뒀는데. 나중에 같이 놀러 가요. 응?”
카일이 제 자리에서 폴짝폴짝 뛸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예상보다도 더 무반응이었다. 설마 열심히 만든 호수에 장난질을 쳤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소심해진 아멜은 슬쩍 그의 손을 잡았다가 깜짝 놀라 손을 놓쳤다. 속마음이 장마철 빗줄기처럼 휘몰아쳤기 때문이었다.
「언제 이런 귀여운 짓을 하셨지? 왜 아무도 내게 보고하지 않은 거지?」
「내 고용인들이 누나에게 매수당한 건가?」
「주인을 기쁘게 할 줄 아는군. 포상 휴가를 내려야겠어.」
「그나저나 카일리안 섬이라면…… 내 이름이잖아.」
「섬은 왜 노란색이지? 닭 자수 손수건에 나왔던 병아리를 상징하는 건가?」
「그렇다면 역시 섬의 용도는…… 그런 뜻일까.」
아멜은 그럴 엉큼한 의도는 전혀 없었으며 그날따라 해바라기와 누런 갈대가 예뻐 보여서 내린 결정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카일은 환희에 차다 못해 반짝이는 눈으로 카일리안 섬만 바라봤다.
「섬에 굳이 집을 짓고 가구를 둔 이유라면 하나.」
「아쉽지만 오늘만 날은 아니니.」
「굳이 아멜리아 호수의 안에 카일리안 섬을 만든 것도 은유겠지.」
카일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산뜻하게 웃었다. 아멜이 가장 무서워하는 얼굴 중 하나였다.
“누나. 선물 고맙습니다. 꼭 의도대로 성실히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멜은 몹시 억울했으나 그간 보인 엉큼한 모습들 때문에 반박할 수 없었다. 믿어주지 않을 테니 반박하는 사람 입만 아프리라.
일단은 카일이 카일리안 섬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선물의 의도가 왜곡되긴 했지만 마음은 전해졌다.
뭐, 왜곡된 의도도 실은 그리 싫지 않았고.
“그럼요. 당연히 그래야지.”
아멜은 뻔뻔하게 웃으며 그를 껴안았다. 내리쬐는 햇살만큼이나 따뜻한 포옹이 길게 이어졌다.
***
그날 늦은 저녁. 집무실에 앉아 업무에만 집중하려던 카일은 제 계획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누나는 잘 있을까…….’
분리 불안이라도 생긴 것인지 고작 하룻밤을 떨어져 있는 것인데도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제 팔이나 다리 한쪽이 떨어져 나간 느낌.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카일은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간 부지런히 먹어치운 마법의 사탕 칸 안쪽으로 손을 뻗으니 작은 목각인형이 잡혔다.
카일은 목각인형의 코를 꾹 눌러 녹음된 아멜의 목소리를 재생시켰다.
“소녀는 차이엘드 공작 전하의 약혼녀이자 차이엘드의 일원입니다. 저희는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입니다.“
지독하게 달콤한 목소리. 카일은 같은 구간을 열 번도 넘게 반복 청취했다. 들을수록 그리운 마음이 사그라들긴커녕 애가 탔다.
코델리아를 되찾아 한결 섬세하게 주인의 마음을 읽게 된 집사 하일드는 시름시름 앓는 주인을 챙겼다.
“전하. 친정으로 떠나신 누나 님도 지금쯤 그리움이 뼈에 사무치실 겁니다.”
“대체 다이앤 백작가에는 왜 그런 전통이 있는 겁니까. 유래가 있습니까?”
“그런 전통이라면 무슨……?”
카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일드는 아멜이 백작저로 떠난 이유를 전혀 모른다는 반응이었다.
“결혼식 하루 전날에 친정에서 시간을 보내는 전통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전하. 다이앤 백작 부부는 하루 전날 황궁의 연회에서 함께 밤을 지새운 뒤 결혼식을 올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렇다면…….”
“친정 이야기는 허무맹랑한 낭설입니다.”
쿠궁. 카일은 억울해 속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사악한 미소를 짓는 장인어른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풍선처럼 부풀었다 펑 터졌다.
전통이 아니라면 잠깐 얼굴을 보고 오는 것 정도야 괜찮으리라. 이미 장인어른을 향한 제 이미지를 포기한 카일이었다.
“당장 출발할 테니 마차를 준비하십시오.”
“이미 준비해두었으니 내려가시지요.”
사랑과 평화를 두루 겪은 하일드 집사장의 눈치는 이전보다 훨씬 빨랐다. 카일은 체통도 잠시 잊고 계단을 두 개씩 내려왔다.
차이엘드의 백마들은 경주마라고 해도 믿을 속도로 달렸다. 눈가를 스치고 가는 바람 때문일까. 카일은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얼른 보고 싶다.’
내일이면 이런 기분은 평생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곧 백작저가 눈에 들어오자 더욱 그랬다.
마차가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리려던 카일은 잠시 멈칫했다. 고용인들은 그의 눈빛이 달라졌음을 눈치채곤 서서히 속도를 늦추었다.
카일의 시선이 향하는 곳엔 신분 위장용 망토를 쓴 남자가 다이앤 백작저를 서성이고 있었다. 창문으로 백작저 안을 들여다보려는 수상한 움직임.
카일은 일순간 표정을 굳히고 주변을 둘러봤다. 무기로 쓸 만한 게 딱 하나 있었다.
“이리 주십시오.”
마부에게서 채찍을 건네받은 카일은 발소리를 죽이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의 눈에는 살기가 흘렀다.
***
한편, 백작저 안에 있는 아멜은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서로 부둥켜안고 살가운 인사를 나눠도 모자랄 시간에 아버지가 자꾸 자리를 피했기 때문이었다.
보다 못한 다이앤 백작 부인이 그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이도 참. 내일이면 아멜의 성이 바뀌는데 자꾸 피하기만 할 거예요? 조금이라도 더 보듬어줘야죠.”
“큼, 큼…….”
“읽지도 않는 신문은 어디서 주워와서…… 어머. 당신 울어요?”
아멜은 깜짝 놀라 아버지의 옆으로 다가갔다. 신문이 눈물에 젖어 거의 종이죽이 되어가고 있었다.
트라이하에 납치되었을 당시, 아버지가 무너지는 모습의 정점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눈이 거의 소세지처럼 부어 있었다.
“세상에…… 어쩐지 아까부터 눈을 안 맞춰 주시더라. 아버지, 언제부터 우셨어요?”
최후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인지 다이앤 백작은 거꾸로 든 신문을 줄줄 읽어내는 신묘한 재주를 보였다.
아멜은 가까이 다가가 그의 신문을 바라보았다. 날짜가 일주일이나 지난 하일 타임스였다.
“아버지…… 무슨 기사 읽고 계셨어요?”
“트라이하에 진출한 하일의 무역 회사들이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는구나. 나라의 정세가 불안해져 국민들이 물품을 사재기하는 모양이지.”
아멜은 웃음이 나려는 것을 꾹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울기 싫은 어린아이가 억지로 말을 돌리는 꼴이었다.
“그래서요, 아버지?”
“무역업자들이 많은 수익을 내 차, 차, 차이엘드가…… 크흡!”
페르슈 다이앤은 결국 신문 곳곳에 숨어 있는 차이엘드라는 이름을 보고 왈칵 울음을 쏟았다. 아멜은 부드럽게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이렇게 아쉬워하실 거면서 왜 그렇게 피하셨어요.”
“우리 아멜…… 네가 내 품에 처음 안겼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내가 보증을 잘못 서 줘서 고생만 하고…….”
“팔려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세요. 딸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데.”
그렇게 말하는 아멜의 눈시울도 점점 뜨거워졌다.
낯선 세계에 떨어진 저를 사랑으로 보듬어준 사람들. 물질적으로 풍요롭진 않았지만 사랑만은 넘쳤던 이들이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리라.
“그동안 감사했어요.”
“우리 아멜…….”
“이리 오렴. 엄마도 안아줄게.”
행복해서 흐르는 눈물이 다이앤 백작저를 촉촉이 적셨다. 그러나 서늘한 날씨도 단번에 녹이는 훈훈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주, 주인어른! 백작저의 입구에서 웬 채찍을 든 총각과 망토를 쓴 남자가 대치 중입니다!”
“……뭐라고?”
당황스러운 소식에 세 사람은 정문으로 향했다. 고용인의 말대로 당장 말려야 할 그림이었다.
채찍 든 총각이 내일 결혼식을 올릴 예비 신랑이라면 더더욱.
아멜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다소 멍해진 백작 부부를 대신해 목소리를 냈다.
“카, 카일? 여기서 뭐 해요?”
“수상한 남자가 창문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안쪽을 힐끔거리고 있어 일단 붙잡았습니다.”
망토를 쓴 남자가 수상한 행동을 했다는 데에는 고용인들 모두가 동의했다. 다이앤 백작은 성큼 다가가 그의 망토를 벗겼다.
“어디서 본 얼굴인 듯한데…… 일단 내 집을 엿봤다니 그냥 넘어갈 생각은 말게.”
“잠, 잠깐! 페르슈, 나일세! 메리엇!”
카일의 채찍에 묶인 남자는 구면임을 주장하며 저항했다. 그제야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낸 페르슈 다이앤은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자네가 여긴 왜…… 아니, 어떻게……”
“미안하네. 내가 너무 늦었어.”
침입자와 아버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를 나눈다. 아멜은 눈을 깜빡이며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메리엇이라는 분을 아세요?”
“알다마다…… 너희 아버지의 친구란다. 보증을 서 달라고 한 다음 사업을 말아먹고 도망간.”
“이런 미친……. 이 아저씨가 그 아저씨예요?”
격분한 아멜은 그에게 한 소리를 퍼부어주려다 내일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을 감안해 슬쩍 카일의 눈치를 봤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어딘가 수상했다.
「메리엇 필즈. 메리필드 무역회사의 사장이군.」
「트라이하 수출 건으로 제일 큰 매출을 올렸던 것으로 기억해.」
「……망토 때문에 얼굴을 못 알아본 것으로 해야겠군.」
카일은 제가 결박한 게 누구인지 뒤늦게 눈치챈 모양이다. 메리필드라면 아멜도 보고 때 들었을 정도로 큰 흑자를 낸 회사였다.
‘그렇다면 설마…….’
“내가 많이 늦었어. 미안하네. 지금이라도 갚을 테니 부디 용서해주게. 이자도 두둑이 치겠네.”
메리엇의 입에서 나온 말에 다이앤 백작저의 일원들이 멈칫 굳었다. 그동안 너무 간절히 바랐던 상황이라 한참이나 눈을 끔뻑였다.
늪처럼 느껴지던 연대보증도 이제 끝.
다이앤 백작 부부와 아멜은 그간 함께 버텨온 시간들을 회상하며 서로를 꼭 껴안았다. 카일은 그 모습을 보며 오래전, 차이엘드 은행 앞에서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자신이 갖지 못했던 가족애. 햇빛으로 만든 따뜻하고 안락한 울타리가 서로를 아끼는 그들을 여전히 보호하고 있었다.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다.’
한 발자국 떨어져 그 모습을 바라보기를 잠시. 카일은 아멜에게 훅 끌려갔다. 다소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그를 아멜이 와락 껴안았다.
“사랑해요. 카일이 없었더라면 이런 날도 없었을 거예요.”
“…….”
“카일? 왜 그래요?”
“……제가 함께 기뻐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요. 카일도 제 가족이잖아요?”
잠깐 얼떨떨한 얼굴을 한 카일은 이내 그녀를 더 꽉 껴안았다. 어릴 적, 차이엘드 은행에서 다이앤 백작 부부와 아멜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바라오던 순간.
“카일?”
“……누나, 사랑합니다.”
줄곧 부러워하던 울타리 안에 들어오게 된 카일은 어느 때보다 편안한 웃음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