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본래 차이엘드 은행은 해가 뜨고도 한참 후에야 문을 열었으나 오늘은 예외였다. 대 차이엘드의 수장인 차이엘드 공작이 친히 방문하기 때문이었다.
은행장은 물론이고 은행에 근무하는 직원들 모두가 완벽한 차림으로 첫 손님을 맞았다.
“공작 전하! 이른 아침부터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침부터 수고가 많습니다. 빚을 상환하려 하니 절차 안내를 부탁합니다.”
그렇게 다이앤 백작저를 괴롭히던 연대보증은 날이 밝자마자 해결되었다. 돈을 받아낸 다이앤 백작과 돈을 갚은 메리엇 모두 후련한 얼굴이었다.
“이제 정말 행복할 일만 남은 것 같아요.”
결혼식 준비를 위해 차이엘드 공작저로 돌아가는 길, 아멜이 작게 중얼거렸다. 카일은 조금의 부정도 하지 않고 그녀를 껴안았다.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카일.”
아멜은 그의 가슴팍에 기댔다. 아름다운 오늘의 주인공으로 거듭나려면 힘이 들 테니 체력을 비축해두고 싶었다.
그러다 우연찮게 읽은 그의 속마음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최종 목적이 많이 달랐다.
「누나가 오늘 피곤해하시면 안 될 텐데.」
「드디어 <누나를 기쁘게 하는 5500가지 방법>과 <연하남의 50가지 그림자>에서 읽은 바를 실행에 옮길 때군.」
카일의 음흉한 노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늘 하던 운동도 강도와 횟수를 늘렸다고 한다. 특히 하반신과 허리 위주로.
식단은 더욱 철저했다. 한창 값비싼 굴과 장어를 얼마나 먹은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첫날밤을 불태우고 싶은 혈기왕성 연하남의 계략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카일은 눈치채지 못하게 저를 운동시키고 있었다.
「요즘 누나와 산책을 자주 다녔으니까…….」
「잠을 안 자도 될 만큼 체력이 좋아지셨으면 좋겠는데.」
자신이 예비 신랑의 마수에 빠져 체력 증진 목적의 산책을 해왔다는 사실을 눈치챈 아멜은 픽 웃었다.
“카일. 대체 첫날밤에 뭘 얼마나 하려고…….”
“……다 들으셨습니까?”
“듣기만 했나요. 영상으로 봤어요. 어째 요즘 몸이 점점 좋아진다 싶었는데 이런 꿍꿍이가 있었을 줄이야.”
“…….”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서 윗몸을 일으키는 운동은 선수들이나 가능한 일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저도 구경하게 해주세요.”
아멜은 카일의 배를 노골적으로 쓰다듬었다. 예고 없는 손길이었음에도 몸이 물렁거리지 않고 돌처럼 단단했다.
지금의 혈기도 왕성해 감당이 안 되는데 얼마나 더 발전하려고 하는 것인가. 아멜은 싫지 않으면서도 오늘 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
미리 다이앤 영지에 도착해 결혼식 준비를 지휘하던 클레어는 예식이 이뤄질 성의 앞을 돌며 장소를 최종 점검했다.
‘아무리 봐도 오늘 결혼식을 위해 만들어진 장소란 말이지.’
아멜이 하사받은 영지의 성에는 전 영주가 건설하다 예산 문제로 중도 포기한 야외 예배당이 있었다.
자본으로 남은 반을 완성하는 것은 클레어 차이엘드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하는 김에 조금 더 꾸미는 것까지.
‘아멜이 영주로서 첫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이기도 하니 값비싼 장식은 없으면서도 화려하게.’
클레어는 새로 온 영주의 결혼식을 구경하러 모인 영지민들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성의 입구에서부터 본식이 이뤄질 공간까지 붉은 융단이 깔렸고, 사방에는 꽃을 뿌릴 아이들이 흰 프릴 드레스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유리와 얼음으로 만든 크고 작은 조각상들이 빛을 산란시켜 오늘 이 자리를 마치 종교의식의 한 장면처럼 보이게 했다.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니만큼 하객석도 넉넉히 준비되어 있었는데, 차이엘드에게 잘 보이려는 하객들이 일찍이 도착해 자리를 점하고 있었다.
‘주례를 맡을 황제와 황제의 약혼녀도 잘 도착했군.’
트라이하의 경제가 실시간으로 무너지는 걸 보고 있는 요즘이니 일찍부터 눈도장을 찍는 것이 상책이라 판단했으리라.
결혼식 준비 상황은 모두 만족스러웠다. 클레어는 시간을 확인했다. 곧 한껏 우아함을 드러낸 아멜과 신랑 될 남자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다이앤 영지의 성은 사용하기 곤란한 상태인지라 모든 준비는 차이엘드 공작저에서 마친 뒤, 다이앤 영지의 경계에서부터 행진해올 예정이었다.
순백의 웨딩드레스와 화려한 장신구들을 걸칠 아멜을 생각하니 그간의 노고도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클레어 님. 공작 전하와 다이앤 백작님께서 영지에 진입하셨다고 합니다.”
“알았어. 준비하도록.”
머지않아 갈기에 윤이 나는 흰 말 스무 마리가 끄는 마차가 지평선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끌려갔다.
유니콘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늠름한 말들은 신랑과 신부를 축하해 달라는 듯 사뿐사뿐 발걸음을 맞추었다.
아멜은 마차의 유리창을 가리고 있던 커텐을 걷었다. 수줍게 드러난 신부의 모습에 일순간 환호가 터져 나왔다.
“새로운 영주님 만세! 다이앤 백작 만세!”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다이앤과 차이엘드에게 축복을!”
아멜은 마차가 예배당 입구에 들어설 때까지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 순간 받은 감동에 오래도록 보답하는 영주가 되리라 다짐했다.
마차는 하일 제국의 주요 귀족들이 모두 모인 예식장 앞에 멈췄다.
카일은 제국의 풍습대로 그녀보다 먼저 내렸다. 높고 맑은 하늘을 비춰 내는 깨끗한 구두와 정성스레 다려진 정복이 제 가죽인 양 어울렸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긴장하게 하는 것은 그의 가슴팍에 달린 배지와 훈장들이었다.
양 손가락을 모두 동원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훈장. 당연하다는 듯 그 위에 배치된 차이엘드의 문양.
그것들은 제국은 물론 세계를 휘어잡은 대부호 차이엘드 공작가의 권능이었으며 그의 아내가 될 아멜리아 다이앤이 누릴 부귀와 영화였다.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흠, 흠…….”
황제라는 이유로 주례를 맡은 베르드는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카일이 저를 보고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이라 확신했다.
살짝 손질해 평소보다 발랄하고 장난스러운 인상을 주는 카일은 세상을 다 가진 양 행복해 보였다.
‘대부호 공작이 원하는 게 겨우 제 곁에 머물러줄 한 사람이라니. 재미없는 농담 같군.’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괴물이라 불리는 그에게 필요한 건 형태를 불문한 진실한 사랑, 딱 하나라는 것을.
“차이엘드 공작. 만일 우리가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 난…….”
베르드는 후회와 감상에 젖어 작게 속삭였으나 카일은 산뜻하게 웃으며 복화술을 시전했다.
“쓸데없는 감상을 듣고 싶지 않으니 어서 제 아내 될 사람이나 불러주십시오.”
“큼, 그러지.”
기가 죽은 베르드는 대본대로만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황제의 말이 빨라질수록 페르슈 다이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드디어 신부가 입장할 시간.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로 아멜을 맞았다. 바네사가 마차의 문을 열자 아멜의 고혹적인 자태가 드러났다.
수정을 대패로 깎아낸 듯 투명하게 반짝이는 면사포를 쓴 그녀는 어깨가 드러나는 디자인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다이앤 백작은 자신과 같은 색인 반묶음 한 머리카락과 눈동자, 부인을 쏙 닮은 보조개를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아멜. 네 앞길에 행복만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멜은 투박한 손을 붙잡고 그가 이끄는 대로 카일에게 향했다. 걸음마다 가슴이 벅차 결국 그가 마중을 나왔다.
“힘듭니다. 이 이상 기다리고 참는 거.”
카일이 작게 불평한 후 베르드의 주례가 배경음악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멜은 황제의 말을 흘려들으며 연인의 속마음을 느꼈다.
「허례허식이 길군.」
「피로연도 얼른 해치우고 신혼여행을 떠났으면 좋겠는데.」
「……내 아내와 함께.」
그의 뜻에 따라주기로 한 아멜은 결혼반지 교환도, 사랑의 서약도 재빨리 해치웠다.
혼례식의 마지막을 장식할 입맞춤을 위해 마주한 카일은 설렘을 주체하지 못하고 뺨을 발그레 물들인 모습이었다.
파멸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그저 내내 행복했으면 하는 사람.
“오늘은 그만하라는 말도, 안 된다는 말도, 기다리라는 말도 안 할게요.”
아멜은 입을 맞추려 다가오는 그에게 흘리듯 속삭였다. 잠시 후 맞닿은 그의 입술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
카일은 찐득하고 달콤한 젤리처럼 느껴지는 그녀의 속삭임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그러는 동안 결혼식 행진이 끝났고, 피로연을 떠났으며 신혼 여행길에 올랐다.
“부인. 제 선물이 마음에 드십니까?”
카일은 다이앤의 문장이 들어간 거대한 범선을 구경하며 멍하니 입을 벌리는 아멜을 관찰했다. 선물은 이제 시작인데 벌써 놀라시다니.
“아니, 이렇게 큰 배를…… 마음만 받을게요. 저희 집안은 관리도 제대로 하지 못할 거예요.”
“오늘은 거절하지 않기로 하셨으면서. 그리고 차이엘드에게 범선 관리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 맞다…….”
“아멜리아 차이엘드.”
카일은 아내의 뺨에 짧게 입 맞췄다. 그녀의 이름 여덟 글자는 그에게 행복을 부르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둘은 신혼여행으로 차이엘드 소유의 남부 섬 서너 개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물론 아멜은 오늘 방문할 섬의 이름이 이미 ‘아멜리아 아일랜드’로 바뀌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카일과 나란히 난간에 기대 장난감처럼 작게 보이기 시작하는 해안선을 눈에 담았다. 느긋이 노을을 감상하던 아멜의 어깨에 카일의 재킷이 덮였다.
“누나. 바람이 거셉니다. 슬슬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러게요. 바람이 강해서…… 어머.”
갑판에 남은 것이 단둘뿐이라는 것을 자각한 아멜의 눈동자에서 빛이 났다. 카일은 묘한 긴장을 느끼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아멜은 어딘가 부끄러워하는 듯한 얼굴을 지어 보이며 카일의 손을 잡아끌었다.
“카일. 저 사실…… 사랑하는 사람이랑 배에 타면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막상 같이 해 달라고 하려니 조금 민망하긴 하네요.”
마른침을 삼키는 카일의 목울대가 거세게 요동쳤다.
“그래도 같이 해줄 거죠?”
카일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인과 함께 배에 올라 하고 싶은 일이라면 무엇이겠는가.
“저는 잘할 자신 있습니다.”
자신만만한 목소리. 아멜은 폴짝 뱃머리의 난간 아래 칸을 밟으며 웃었다.
“그럼요. 카일은 뭐든 잘하잖아요? 아, 여기 말고 꼭 뱃머리에서 하고 싶어요.”
“뱃머리에서…….”
아내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 이런 앙큼한 제안을 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누가 봐도 상관없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우린 이제 부부니까…….’
이젠 공작부인이 저라는 자각을 확실히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누나가 원하는 걸 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카일은 덥석 제 손을 잡아 허리로 끌어당기는 그녀를 보며 침을 삼켰다. 밤까진 한참 남았는데 벌써 이렇게 적극적이라니.
“허리부터 잡아 주세요. 알았죠?”
“무슨 뜻인지 잘 알았습니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서로 다른 만족감으로 반짝였다.
카일은 안정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아멜은 배에 처음 타본 사람들은 꼭 한 번씩 따라 한다는 일명 ‘타이타닉 포즈’를 취했다.
아무런 방해물 없이 펼쳐지는 노을과 짭조름한 바다 냄새. 가끔 보이는 물고기 떼에 가슴이 벅찼다.
아멜은 오랜 시간 이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거대한 속마음을 듣지 못했다면 그리했으리라.
「이 자세는 대체…… 옆에서 보는 것도 예쁘긴 하지만.」
「그건 그렇고, 원하시는 걸 슬슬 시작할까.」
그의 입술이 목선에 닿고서야 아멜은 제가 한 말이 어떤 의도로 받아들여졌는지 깨달았다. 뱃머리에서는 절대 안 돼. 아멜이 고개를 휙 돌렸다.
“카일, 그런 뜻 아니…… 아!”
하지만 갓 신랑이 된 연인은 오늘도 멈출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