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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15화 (115/134)

#115

하일드와 바네사는 범선의 객실칸 앞에서 다소 난감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스타벅 선장이 전한 도착 예정 시간 때문이었다.

“바네사 양. 스타벅 선장이 무어라 했다고?”

“앞으로 20분 후면 목적지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허허…….”

둘은 10분째 같은 대화를 하며 수없이 많은 객실칸을 바라보았다.

갑판에서 이상한 자세를 취하던 공작부인을 번쩍 들어 올린 주군이 급히 객실에 들어간 게 겨우 30분 전.

지금 도착 예정시간을 알린답시고 둘을 방해하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오죽하면 곧 공작저를 떠날 바네사도 몸을 사렸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하일드는 주인의 명예를 지키면서도 그를 방해하지 않을 묘책을 찾아냈다.

“바네사 양. 그동안 수고 많았네.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차이엘드 군도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암요, 암요. 다 돌아보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세 시간이면…….”

“충분하겠네요.”

카일과 아멜이 자잘한 스킨십을 나누는 마차 구석에서 쿵짝을 맞춰온 둘과 달리 스타벅 선장은 기겁을 했다.

“집사장님. 방금 세 시간이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군도 쪽으로 향하려면 연료가 두 배는 더 들 겁니다.”

하일드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제 일인 양 안타까워하는 스타벅 선장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항구에서만 오래 일한 그는 주군이 아내를 사랑하는 방식을 잘 모르는 듯했다.

“스타벅 선장. 걱정 말고 내 말대로 하게.”

“하지만 이 돈이면…….”

“공작 전하께서는 푼돈을 아끼시는 분이 아니야. 사랑 없이는 평화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게.”

흠칫 놀란 스타벅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 없이는 평화도 없다.

그 말은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이 ‘주인 마님과 관련된 사안이니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린 끝’이라는 소리를 은유적으로 하는 표현이었다.

***

아멜은 범선에서 내릴 때만 해도 카일의 버거운 사랑에 지쳐 그의 팔에 매달리듯 걸었다.

하지만 휴양지용 플로피 햇과 가벼운 재질의 흰 원피스로 갈아입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가 돌았다.

“카일. 해변 걸을까요? 응?”

카일은 산책을 가자고 꼬리치는 강아지처럼 자신을 조르는 아멜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여러 번 느낀 것이지만 누나는 여행을 좋아했다. 전생에 여행을 한 번도 다녀오지 못한 것처럼 순간순간에 집중했다.

별것 아닌 곳을 구경할 때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해서, 꼭 다른 곳에도 데려가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벌였다고 말하면 부담스러워하시겠지.’

무언가를 말하려던 카일은 근질거리는 입을 다물었다. 눈치 빠른 아내는 뒷말을 기다렸다.

시선에 모종의 부담을 느낀 카일은 괜히 그녀의 모자를 매만졌다. 잘 어울리긴 했지만 챙이 커서 기습적으로 입 맞출 때 방해물이 되리라.

“누나. 모자가 날아갈 것 같은데.”

카일은 사심 가득한 손길로 아멜의 모자를 젖힌 뒤 손을 잡았다. 어린애의 것처럼 꼼질거리는 손이 그녀의 기분을 말해주었다.

별장은 섬의 자랑인 백사장과 해수를 끌어안은 구조인지라 그저 이대로 함께 걸으면 되었다.

“와…….”

아멜은 감탄사를 흘리며 탁 트인 수면과 일렁이는 노을을 감상했다. 가슴이 벅차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질 지경이었다.

“이런 풍경을 보게 해 줘서 고마워요, 카일.”

“마음에 드십니까?”

아멜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가 어떻게 멋지고, 왜 이 풍경이 아름다운지 한참을 설명하자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카일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사왔는데 마음에 들어?’하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선물. 아멜은 두 글자에 눈을 가늘게 떴다.

“카일. 이 섬…… 차이엘드 소유예요?”

“공작부인의 사유지도 가문 소유의 재산이라고 친다면.”

“…….”

아멜은 우주에 내던져진 것처럼 아득해졌다. 섬을, 그것도 제국의 수도보다 면적이 넓은 섬을 선물하다니.

한편 카일은 아내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데에서 쾌락을 느끼고 있었다. 선물은 역시 깜짝 선물이군.

“아멜리아 차이엘드 섬. 소유주의 이름을 딴 작명입니다.”

이틀 전, 사랑스러운 취지로 제작된 카일리안 섬을 받은 후 ‘땅 선물=받으면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공식을 학습한 카일에게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차이엘드가 소유한 건물이나 땅 몇 곳의 이름에 아멜리아 차이엘드라는 글자를 따 넣는 일.

아멜이 알아채면 뭐 그리 번거로운 일을 하냐고 물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카일은 아내에 관한 일인 한 걱정을 사서 하는 남자였다.

「내가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죽기라도 하면…….」

「누나와 누나를 닮은 아이들이 별장이나 섬도 없이 살게 할 순 없어.」

「…….」

「내 생각이지만 너무 주책맞군.」

카일은 민망함에 생각을 끊었다. 어쨌든 지명을 바꾸었고 새로운 지도를 찍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개정된 지도가 붙은 관공서의 직원들은 물론 그곳을 지나는 많은 사람들이 아멜리아 차이엘드라는 이름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카일은 봄철 새싹처럼 솟아오르는 뿌듯함을 눈웃음으로 드러냈다. 아멜은 픽 웃곤 그의 뺨을 쓸었다.

제 모든 것을 주고 싶어 안달이 난 그의 앞에서 아멜은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일 수 없었다.

“이젠 저도 신랑 스케일에 익숙해졌나 봐요. 아니면 카일이 주는 거라 마냥 기쁘기만 한 건가?”

“……!”

“하지만 건설 준비 중인 아멜리아 백화점과 아멜리아 연무장은 안 돼요.”

카일은 아쉬움을 내비쳤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백화점과 연무장만이 건물은 아니었다. 땅이라면 아직 많이 남았고.

더군다나 백화점과 연무장은 그녀를 위해 준비한 수많은 선물 중 하나에 불과하지 않던가. 마침 해도 떨어져 사위가 어둑했다.

“누나, 슬슬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카일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드넓은 별장으로 향했다. 아득하고 어두운 길이었으나 조금도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

근사한 저녁 식사를 마칠 무렵 아멜의 재산은 세 배쯤 불어나 있었다. 물론 모두가 카일의 소행이었다.

지금도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들을 받았건만. 카일은 바네사를 시켜 또 다른 무언가를 가져오게 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바네사를 바라보던 아멜이 서서히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든 쟁반 위, 붉은 천에 덮인 병들이 눈길을 끌었다.

“술이에요?”

“누나가 마음에 들어 하실 줄 알았습니다.”

카일은 병들을 덮고 있던 천을 걷어냈다. 그러자 투명한 유리병에 기하학적인 라벨이 붙은 포도주 여러 병이 자태를 뽐냈다.

한 병을 집어 들어 라벨을 구경하던 아멜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러 병의 포도주에는 모두 ‘아멜리아’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포도주 이름이 제 이름이랑 같네요?”

“술을 좋아하시니 포도 농장과 와이너리를 선물해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

“세상에나…… 와인 양조장을요? 이런 물량 공세 아주 좋아요, 카일.”

과연 품목이 주류로 바뀌니 아멜의 반응이 달라졌다. 카일은 술이 들어 있는 병을 정성 어린 손길로 쓰다듬는 아멜을 보며 장인어른을 떠올렸다.

‘술을 좋아하시는 건 집안 내력인가.’

카일은 먼 훗날 아이들과 잔을 부딪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눈짓을 주었다.

하일드가 오프너를 능숙히 사용해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건배할까요? 결혼해줘서 고마워요, 카일.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누나.”

맑은 소리를 내며 잔이 닿았다 떨어졌다. 카일은 달콤하면서도 관능적인 향을 음미하다 입술을 적셨다.

와인은 모두 그녀에게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 물론 영감을 와이너리에 전달한 것은 카일이었다.

다른 남자가 아내의 매력을 일일이 찾아내 술로 표현해내는 광경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으므로.

“카일. 우리 한 잔만 더 마실까요? 이번엔 다른 종류로.”

아멜은 남은 다섯 병 중 다른 한 병을 골랐다. 새로운 잔에 새로운 와인이 차올랐다. 그녀는 이번 잔도 깔끔하게 비웠다.

“맛있다…….”

카일은 조금 높아진 목소리를 듣고 픽 웃었다. 이미 딴 두 와인을 몇 잔 더 음미한 그녀가 또 다른 와인을 마시자고 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세 번째 병을 반쯤 비운 아멜은 네 번째 와인을 맛보자고 말했다. 단시간에 술만 마셔 눈과 긴장이 모두 풀린 채로.

게다가 어디에서 배워 온 것인지 따지 않은 와인을 흔들어 병 안에 작은 소용돌이를 만드는 신묘한 기술까지 보였다.

“카일. 한 잔만 더 마실까요?”

“취하신 것 같은데. 잠시 바람이라도…….”

“남편이랑 딱 한 잔만 더 하고 싶어요.”

“…….”

“여보, 응?”

“하일드. 속히 공작부인의 명을 따르도록.”

홀린 듯 그렇게 말하면서도 카일은 후회했다. 아멜의 목소리는 이미 몽롱함을 넘어서 취기가 다분했다.

이대로 술을 꼴깍꼴깍 마시게 내버려 두면 역사에 길이 남을 첫날밤은커녕 숙취 때문에 다음 날 관광도 제대로 못 하리라.

카일은 아멜의 잔을 손수 채워주곤 거듭 강조했다.

“누나. 딱 이것까지만 마시는 겁니다.”

“으응…….”

아멜은 순식간에 잔을 입에 털어 넣곤 씩 웃었다. 얼굴이 너무도 가까웠다.

“싫은데.”

“…….”

“카일은 안 맛볼 거예요?”

아멜은 카일의 잔에 있던 와인을 제 손끝에 묻혀 그의 입술을 쓸었다. 촉감이 좋아 노골적으로 지분거리자 취기가 더 오르는 듯했다.

어지럼증에 잠깐 눈을 감았다 뜨자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주변에 널린 다른 고용인들의 얼굴이 뭉개져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이목구비가 있다, 싶은 건 바네사 하나. 하지만 코앞에 있는 카일리안 차이엘드의 얼굴은 조금도 흐릿해지지 않았다.

“…….”

아멜은 갸름한 그의 턱선을 손마디로 쓸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 가장 아름다운 건 카일이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아름다우며 귀엽고 섹시한 연하남을 조금도 은밀하지 않은 식당의 테이블에 앉혀두는 건 무언가 잘못된 일.

“누나랑 갈래?”

“……!”

카일은 아멜에게 손목을 붙잡혀 침실이 있는 윗층으로 끌려갔다. 홀린 듯 따라간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조금도 저항하지 못하는 주군을 바라보던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은 입을 쩍 벌렸다.

‘저, 저것이…….’

‘공작 전하를 하루 만에 사랑꾼으로 만든…….’

‘전설의 누나 님……?’

그들은 만취 상태에서도 계단을 척척 오르는 아멜의 자태에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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