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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16화 (완결) (116/134)

#116

팔을 잡아끄는 손이 뜨거웠다. 얼굴은 취기와 열기로 발그스름하다. 잘 따라오고 있는지 힐끗 돌아보는 뺨은 보조개가 깊게 패어 있다.

카일은 저를 데리고 가는 아멜의 뒷모습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끼다, 그 이유를 알아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분위기가 비슷하군.’

그는 벌써 1년도 더 된 첫 만남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빛도 목적지도 없던 시간들이 계속되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지친 몸을 이끌고 주변을 정리한 적이 있었다.

고용인들을 내보낸 다음 스스로 침대를 정리했고 책상 위의 물건들은 책상 안에 쓸어 담았다. 시작은 충동적이었으나 주변을 정리하는 행위는 멈추기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치워버린 것은 방에 걸려 있던 커다란 차이엘드의 문장이었다.

앞발을 든 두 마리의 짐승이 언젠간 자신을 집어삼키리라 생각했던 적이 있다. 문장을 방에서 없애버리는 순간 그것에 완전히 잡아먹힌 기분이 들었다.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순간적으로 근교의 낭떠러지가 떠올랐다.

‘괴물에게 어울리는 죽음이군.’

이미 자신을 대부호 가문의 재산을 수호하는 괴물이라 정의 내린 지 오래였다. 카일은 별다른 미련 없이 공작저를 나섰다.

차이엘드 소유가 아닌 마차를 타보는 건 생전 처음이었다. 느리고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생기 넘치는 사람들의 일상을 구경했다.

탁탁 턴 빨래를 빨랫줄에 너는 소녀들. 앞치마에서 사탕을 꺼내 아이에게 물려주는 여인. 지팡이를 짚은 노신사와 왁자하게 웃으며 어디론가로 향하는 청년 여럿.

무심결에 제 또래 쳥년들을 따라간 카일은 어느 허름한 펍에 도착했다. 마셔본 적 없는 술이나 한잔할까 하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망토를 두르긴 했지만 분명 귀족 여인. 울상인 얼굴은 오래전 차이엘드 은행에서 본 적이 있었다.

‘아멜리아 다이앤?’

그녀도 자신을 알아본 것인지 물끄러미 바라봤다. 옆자리에 앉으니 술 냄새가 확 났다. 대체 얼마나 마신 것일까.

녹갈색 눈동자에 담긴 우울한 제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는데, 그녀가 손을 뻗어 뺨을 매만졌다.

몰락한 백작가의 영애가 차이엘드 공작의 몸에 손대는 건 무례함을 넘어서는 일. 그러나 손의 온기 때문에 뿌리칠 수 없었다.

따뜻했다. 눈물이 날 만큼.

“……?”

따스한 눈동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아멜이 저를 끌고 가고 있었다. 물론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카일은 그녀를 따라 호텔 방에 들어왔다. 스스로도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 아무리 봐도 너무 잘생겼어. 당신이 나한테 누나라고 부르는 거 듣고 싶다. 한 번만 해주면 안 돼요? 평생 못 잊을 텐데.”

만취자 특유의 실없는 웃음과 터무니없는 말. 그런데도 왜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을까.

아무런 경계도 없이 침대에 누워 웅얼대는 걸 가만히 보고 있으니 보조개가 깊게 패도록 웃으며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알았으니까 이리 와서 누워 봐요. 누나 믿지?”

어이가 없었으나 홀린 듯 몸이 움직였다. 그녀가 뺨을 어루만져주는 동안 재킷이 바닥에 떨어지고 셔츠 단추가 풀려나갔다.

아멜은 골반 부근에 있는 흉터를 어루만져주며 아팠겠다, 하고 말해주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 지금 상황이 꽤 위험하다는 자각이 들었다.

“다이앤 영애. 제게 뭘 원하시는 겁니까.”

그녀를 밀어내려 다소 쌀쌀맞게 말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

“혼자 가지 말아요.”

제 마음을 어루만지며 빗장과 경계를 풀도록 한 단 하나의 문장.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경험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땐 그 다정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어리석은 일 따위는 하지 말라는 뜻인 줄로만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른 뜻이었던 것 같군.’

회상을 마친 카일은 픽 웃었다. 어쨌건 그녀는 지금 제 아내가 되었으니 상관없으리라.

카일은 아멜을 번쩍 안아 침대 위에 내려주었다. 무릎걸음으로 침대에 올라 얼굴을 가까이하니 그녀의 입술이 예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젠 제게 뭘 원하시는지 묻지 않아도 되는 게 기쁩니다. 처음엔 서툴기만 했는데.”

“아니, 카일은 그때도 무지 능숙했는데…….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고요. 제가 취했어서 자세한 것들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밤이 영원했으면 하고 바랐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정말입니까?”

지금 이 소리를 하면 내일 아침이 밝고서야 잠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하지만 오늘은 신혼 첫날밤. 아멜은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럼요. 솔직히 카일이라면 조금 서툴러도 귀여울 것 같지만…… 뭘 해도 오늘 밤이 그날보다 기쁠 거예요. 그때와 달리 지금은 서로 사랑하니까.”

“…….”

“그래도 사랑하는 만큼 사랑해줘요. 사랑해요.”

상습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카일이었지만 그녀의 직설적인 고백에는 곧잘 부끄러워했다. 지금도 그랬다.

그녀의 말은 전기처럼 온몸을 찌릿찌릿하게 했다. 온 배경이 캄캄하게 어두워지는 와중에 아멜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누나. 오늘 밤에는 늘 하시던 대로 속마음을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응?”

“앞으로 할 행동들은 다 사랑해서 그러는 거니까.”

싱긋 웃는 그의 얼굴에는 사심과 흑심이 가득했다. 긴 팔다리가 저를 꼭 감싸고 놔주지 않자 아멜은 술이 확 깼다.

그녀는 제 뒷머리를 큰 손으로 감싸고 입술을 겹쳐오는 그를 받아들였다. 뜨거운 숨결이 느껴질 때마다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손이 척추를 따라 허리까지 느른히 쓸었다. 뒤이은 부드러운 움직임들이 몸을 찬찬히 덥혔다.

「누나가 정말 잡지에 나온 그런 걸 좋아하실까.」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고 했어.」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데.」

「사랑하는 만큼 사랑해달라고 하셨으니까…….」

찬찬히 받아들인 그의 사랑은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눈가에 열감이 몰렸다. 아멜은 숨을 짧게 멈추었다가 희미하게 내뱉었다.

***

캄캄하기만 한 시야 속으로 물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아멜은 손을 움찔하며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어젯밤 아멜리아 와인들을 급히 마신 탓에 찌릿 두통이 일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애쓰던 그녀는 지금 상황이 카일과 처음 밤을 보냈을 때와 무척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땐 파멸이 예정된 남자에게서 어떻게든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건만. 지금은 그와 행복한 시간들을 보낼 생각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때나 지금이나 카일은…….’

어젯밤을 떠올린 아멜은 무심결에 베개를 꽉 쥐었다. 분명 인간은 발전과 퇴보를 반복하는 동물이라고 했다.

그런데 카일은 발전에 발전만 더하는 느낌이었다. 원래도 뛰어난 몸과 체력에 노련함과 능숙함까지 더해지니 어떤 경지에 오른 기분이었다.

‘이런 남자랑 앞으로 죽을 때까지 함께 살 수 있다니…….’

전생에 나라를 구해도 거하게 구한 것이 분명하다. 억울하게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들도 천 명쯤 살려냈겠지.

아멜은 쭉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며 눈을 떴다. 코앞에 방금 씻고 나와 머리카락이 푹 젖은 카일이 누워 있었다.

“카일?”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그렇게 웃으십니까.”

“지금 상황이 우리가 처음 밤을 함께 보냈을 때와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다음엔 앞으로 쭉 같이 산다는 게 좋아서 웃은 거고.”

카일은 아멜을 따라 편안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니 가슴이 벅찼다.

카일은 평소보다 세 배는 더 몽글몽글한 아멜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었다. 커다란 눈동자로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처음 누나라고 부른 것도 함께 밤을 보낸 다음 날의 아침이었는데.”

“대체 제가 누나 소리를 해 달라고 얼마나 졸랐길래…….”

“그렇게 조르시진 않았습니다.”

“그럼 왜 누나라고 불러준 거예요? 귀족들이 자주 쓰는 호칭은 아니잖아요.”

아멜은 어리둥절했지만 카일은 아직도 그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몸을 씻다 뒤척이는 소리를 듣고 침대 쪽을 엿봤다. 깨어나면 어제처럼 저를 껴안아 주리라 기대했던 여인이 차이엘드의 문장을 보고 경악하고 있었다.

“그때 다시 씻는 척 물소리를 내면서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하면 누나가 도망가는 걸 막을 수 있을지.”

“……이미 다 씻었는데도 물을 틀어둔 거예요?”

“당장이라도 도망가실 것 같은 얼굴이었습니다.”

카일은 물기가 남은 몸으로 그녀를 꼭 껴안고 말을 덧붙였다.

“눈 깜짝할 새에 도망가실까 봐 제가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누나를 붙잡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찔리는 바가 있기에 아멜은 허허 웃었다. 아레테를 써서 엿본 제 모습은 정말 튈 기회만 엿보는 얼굴이었다.

“제가 차이엘드의 가주라는 것을 눈치챘을 테니 다이앤 영애라고 부르면 겁먹을 것 같고. 누구인지 모르는 척하자니 옳다구나 도망갈 것 같고.”

“…….”

“그래서 누나라고 불러본 겁니다. 듣기 좋으면 떠나지 않을까 싶어서.”

의도치 않게 카일이 처음 ‘누나’하고 내뱉었을 때 저가 보였던 표정을 영상으로 보게 된 아멜이었다.

눈동자는 그게 지금 무슨 말이냐고 묻듯 달달 떨리는 데 반해 입꼬리는 변태처럼 헤벌쭉 올라갔다.

어찌나 욕망에 충실한 얼굴인지 보는 제 뺨이 후끈거렸다. 과거의 자신을 데려와 묻고 싶었다. 누나 소리가 그렇게 좋냐고.

「그만큼 붙잡고 싶었으니까.」

「인수전 때도 그렇게 간절한 적은 없었는데.」

「……누나.」

절절한 카일의 누나 공격을 받은 아멜은 작게 탄식했다. 누나 소리는 지금 들어도 좋은데 처음 들은 그때는 오죽했을까. 변태 같은 웃음도 어쩔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아멜은 꼬물꼬물 몸을 움직여 그의 품에 안착했다. 깔끔한 비누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그에게 장난삼아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카일. 영영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말하면 누나 소리 안 해줄 거예요?”

“이젠 아내나 부인이라고도 부를 수 있지만, 누나라고도 계속 부를 겁니다.”

“……진짜? 왜요?”

“그렇게 하면 누나가 웃으니까.”

자신은 그것만을 위해서 산다는 듯 그의 웃음은 깨끗했다. 아멜은 카일의 가슴팍을 콩콩콩 두드리다 아예 그와 이마를 맞댔다.

사랑을 고백하는 그의 속마음이 조곤조곤 들려와 행복감이 커졌다. 카일 또한 평소보다 빠른 아멜의 심박을 들으며 나른한 행복에 젖었다.

카일리안 차이엘드와 아멜리아 차이엘드는 확신했다. 서로가 있는 한, 어떤 미래가 펼쳐지든 예정된 것은 행복뿐이라는 것을.

“누나, 사랑합니다.”

“어제도 이렇게 시작한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으니 다시 한번 하는 게 좋겠습니다.”

뻔뻔하게 말한 카일이 차분히 입술을 포갰다.

사랑으로써 평화로운 두 사람의 위로 정오의 햇살이 쏟아졌다.

[ 完 ]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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