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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17화 (외전) (117/134)

#1

봄볕에 달아오른 산들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나른해 자꾸만 감기는 눈을 힘겹게 뜨니 토끼풀이 수평선까지 뻗어 있었다.

‘여긴 어디지?’

토끼풀 들판에 누워 있던 카일은 몽롱한 몸을 겨우 일으켰다. 눈을 뜨니 낯선 장소에 누워 있는 개연성 없는 상황이라니.

하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푸릇푸릇 돋아 오르는 식물들과 파스텔 톤 하늘이 아름다워 자연스레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었다.

‘……같이 봤으면 좋을 텐데.’

언젠가부터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 아내를 떠올리게 된 카일이었다. 아멜리아 차이엘드. 카일은 자신과 같은 성을 쓰는 이름을 곱씹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금광이나 별장 같은 소소한 선물에도 눈을 빛내며 탄성을 흘리는 그녀이니 이곳도 좋아하리라. 마음 같아서는 이 풍경을 사서 그녀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고 쾌활한 걸음으로 주변을 산책하는 그녀를 상상하자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토끼풀이라도 꺾어다 드릴까.’

얼마 전 읽은 <아내를 기쁘게 하는 법 - 실전편>에 소개된 풀꽃을 엮어 화관을 만드는 방법을 유심히 봐두길 잘했다. 금세 행복해진 카일은 아멜리아 화관 제작에 나섰다.

모양새가 소담한 꽃들만 골라 갈무리하는 번거로운 일도 즐거웠다. 그는 마침내 한 아름의 풀꽃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

희고 폭신폭신한 것이 그의 품에 푹 파고든 것은 그때였다. 카일은 갑자기 품에 안겨 온 생명체가 무엇인지 바라보았다.

‘토끼라고 하기엔 너무 큰데. 털도 이상하군.’

하지만 쫑긋 선 귀와 오물거리는 입은 분명 토끼였다. 카일은 길을 잘못 든 커다란 토끼를 보내주고 제 할 일을 마저 하기로 했다.

하지만 바닥에 내려둔 토끼는 또 한 번 그의 몸을 덮쳤다. 그새 한 마리가 늘어 이번엔 두 마리였다. 쓰다듬어달라는 듯 몸을 부벼오는 게 무척 귀여웠다.

동물 애호가는 아니었으나 보드랍고 애교가 많은 토끼들을 거부하긴 힘들었다. 카일은 두 마리를 품에 안고 마음껏 쓰다듬었다.

‘뭔가 이상한데.’

처음보다 묵직해진 것 같아 고개를 내리니 토끼는 세 마리로 불어 있었다. 하나같이 귀엽긴 했지만 영문을 모르겠는 상황.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토끼들은 그를 놔주지 않고 되려 풀밭 위에 눕혔다.

그의 넓은 품을 차지한 세 마리의 토끼들은 어서 귀여워해달라는 듯 눈을 빛냈다. 흔한 토끼들과 달리 눈이 녹갈색이었다.

‘누나가 토끼가 된다면 이런 느낌일까.’

카일은 조금만 더 토끼들을 예뻐해주기로 했다. 그녀에게 쓰다듬을 받을 때면 저도 기뻤으니까. 그러나 쓰다듬어줄수록 토끼들은 구름처럼 커졌다.

“잠깐……!”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보들보들한 털을 가진 거대 토끼들 사이에 완전히 파묻혀버렸다.

***

일순간 손을 움찔하며 눈을 뜬 카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파에서 잠들어 평소와는 시야가 조금 달랐으나 어쨌든 제 침실이었다.

‘……이상한 꿈이군.’

그에게 꿈이라고 하면 늘 악몽이었고, 가끔 악몽이 아닌 꿈을 꾼다 해도 기상과 함께 신기루처럼 사라지곤 했다.

게다가 평소에 관심도 없던 토끼들에게 파묻히는 꿈이라니. 개에게 물리거나 멧돼지에게 쫓기는 꿈보다는 낫지만 너무 맥락이 없었다.

‘……평소보다 더 늦게 잠들어서 그런가.’

하지만 불가피한 일이었다. 어제는 처음 맞는 결혼기념일이었으니까.

어젯밤 아멜은 아멜리아 금광의 생산물로 만든 화려한 장신구들만 걸치고 소파에 누워 씻고 나올 저를 기다렸다.

차림새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드러낸 모습으로 손을 살랑이는 그녀에게 쪼르르 다가가니, 녹녹하게 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첫 번째 결혼기념일 축하해요, 카일. 선물은 저예요. 마음에 들어요?”

“…….”

“그렇게 빤히 봐도 안 무를 거예요. 저도 이런 거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 읏!”

카일은 충실히 아멜의 장신구들을 바닥에 던져버리곤 첫 결혼기념일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격한 움직임에 속눈썹을 움찔 떨면서도 배시시 웃으며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부인의 앞에서 자제력 같은 것이 발휘될 리 없었다.

‘……누나도 내가 좋았던 만큼 좋았을까.’

반사적으로 눈웃음이 지어졌다. 카일은 제 위로 겹쳐 누워 있는 아멜을 살폈다. 그녀의 위로 덮인 얇은 이불은 허리께까지 흘러내려 있었다.

카일은 아멜에게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고 버릇처럼 입을 맞췄다. 한참을 도둑처럼 살갗을 몰래 탐했으나 새근새근 여린 숨소리는 끊기지 않았다.

제 모든 것인 아내와 일 년밖에 지나지 않은 알콩달콩한 신혼 생활이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높은 파도처럼 행복감이 밀려왔다.

허름한 펍에서 만난 아멜과 하룻밤을 보낸 후부터 매일 이런 식이었다. 떠올리면 미소가 절로 나오는 얼굴이 있으니 하루하루가 기다려졌다.

‘내년 결혼기념일엔 더 행복하게 해드려야겠군.’

굳게 다짐한 카일은 아멜의 행복을 키우기 위해 무얼 해야 할지 고민해보았다. 답은 금방 나왔다.

이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밤만 되면 소르르 잠들곤 하는 아멜의 체력과 지구력을 기르는 것. 그리하여 어쩔 수 없는 날들을 제외한 1년의 밤을 어제처럼……

‘잠깐.’

쭉쭉 뻗어가던 사고가 벽에 가로막힌 듯 일제히 멈추었다. 카일은 머릿속에 달력 여러 장을 떠올린 다음, 사랑을 나눈 날들에 동그라미를 쳐 보았다.

오늘을 기점으로 약 6주간 하루도 빼먹지 않고 사랑을 나누었다는 놀라운 통계가 나왔다. 분명 중간에 빈칸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마지막이 언제였지?’

카일은 아멜의 월경 주기를 떠올려보았다. 몸이 건강한 편인 아내는 주기가 일정해 한 달에 한 번씩 달거리를 했다.

그럴 때면 일상처럼 슬금슬금 덮치려 드는 저를 와락 끌어안은 다음 오늘은 안 된다며 살살 달랬다.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당연히 수긍했고, 팔베개를 해 주고 손깍지를 낀 다음 잠들 때까지 토닥여주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머릿속의 달력에는 그렇게 건전히 넘어갔어야 하는 일주일이 없었다.

아내가 달거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잠이 확 깬 카일은 침착하게 그간 읽은 잡다한 서적들을 떠올렸다.

‘여성이 월경을 지나치는 경우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살이 급격히 빠지는 경우엔 주기가 바뀔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의 아멜은 몸이 조금 나른하다거나, 자꾸 잠이 온다거나 하는 불평 외에는 별말이 없었다.

“…….”

하지만 역시 월경을 빼먹는 가장 대중적인 사유는 임신이었다.

카일은 마른침을 삼켰다. 되짚어보니 그녀가 호소한 증상들이 죄다 임신 초기 증상과 일치했다.

‘침착하자. 침착…… 이 상황에 침착하면 그게 미친 거지.’

완전히 평정을 잃어보는 것은 또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그 와중에 제 몸 위로 엎드려 자는 아멜이 눈에 밟혔다.

카일은 온 신경을 집중해 그녀를 깨우지 않고 침대 위에 반듯이 눕혀냈다. 그간 음흉한 의도로 다져온 운동신경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불을 덮어준 다음 옆에 눕자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방금 꿨던 이상한 꿈은 태몽이었던 것일까.

피임을 철저히 했다면 임신 가능성이 없으니 건강 문제일 것이라 확신하고 넘어갔겠지만 그게 아니었다.

눈만 마주치면 달아오르는 게 신혼인지라 결혼식 후부터는 은근슬쩍 넘어가는 일이 한두 번 있었다. 아니, 서너 번. 대여섯 번이던가.

‘……열 손가락으로는 못 세겠군.’

카일은 저도 모르게 머리카락을 쑤석거리며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두 달 전에는 달거리를 했으니 문제의 6주 동안 일어난 일만 헤아려보면 되었다.

뜨끔하는 순간이 아주 많이 떠올랐다. 가령 황궁에서 자정에 가까운 시간까지 결혼식 피로연을 구경하다 차이엘드 공작저로 돌아오던 마차 안에서의 일.

“누나. 결혼식을 올린 날의 밤에는 꼭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결혼식은 리엔 공주님이랑 황제 폐하께서 올렸는데 왜 카일이…… 아!”

카일은 지끈거려오는 이마를 짚었다. 다음 기억이 곧바로 떠올랐다.

“누나. 제가 퇴근할 시간에 화장대 앞에 앉아 계시는 의도가 뭡니까. 그것도 이렇게 예쁘게.”

“화장대 탓하지 말아요, 카일. 제가 다락방에 있을 때도, 서재에 있을 때도…… 읏!”

이건 매번 낯선 장소에서 저를 유혹하는 아내가 나빴다. 눈을 3초도 넘게 마주하면서 다녀왔냐는 말을 하면 어떻게 참으라고.

물론 그녀가 먼저 다급히 군 때도 많았다.

새로 개발된 보들보들한 수건을 선보이려 아무런 흑심도 없이, 정말 순수한 의도로 그녀가 욕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린 때가 있었다.

“보드라운 걸 좋아하셔서 준비했습니다.”

“수건이라…… 이대로 있으면 물기 때문에 감기 걸릴 것 같은데. 카일이 닦아줄래요?”

“…….”

“응? 누나 추운데.”

역시 누나는 추울 때 제일 예뻤다.

그 외에도 아멜리아 호수 위의 카일리안 섬에서 일어났던 일, 투명한 물을 받은 유리 욕조에서 일어났던 일 등등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임신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내 아이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니.’

아직 확정된 사실도 아닌데 가슴이 쿵쿵 뛰었다. 눈시울은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졌다. 울컥 치민 무언가가 온몸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었으나 차마 곤히 잠든 아내를 깨울 수 없어 카일은 베개를 꽉 껴안는 것으로 기쁨을 표출했다.

당장 집무실 책상에 숨겨둔 아이 이름 후보 리스트를 가져오고 싶었다. 딸일까, 아들일까. 어느 쪽이든 아멜을 닮았다면 사랑스럽겠지.

‘일단 깨어나는 대로 검진부터…….’

날이 밝아오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행복해하던 카일은 문득 멈칫했다. 얼마 전, 아멜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조금 더 시간을 가진 다음 천천히 생각하는 것도 좋겠어요.”

방금까지만 해도 하늘을 방방 날던 심장이 철렁 추락했다. 카일은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심경이 되어 입을 작게 벌렸다.

그렇게 말할 때 아멜은 진심으로 걱정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아내는 아이와 관련된 대화를 할 때면 항상 그런 표정이었다.

‘내가 설마 누나가 원치 않는 아이를…….’

툭. 카일은 껴안고 있던 베개를 놓쳐버렸다. 갑자기 온몸의 피가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만일 그녀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면.

“카일…… 자다 깼어요? 왜 안 자요?”

“…….”

카일은 비몽사몽하는 아멜의 손가락에서 약혼반지를 빼냈다.

일단은 임신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아낸 다음 말을 하든,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짓찧든 해야 하리라.

“조금 더 주무십시오, 누나.”

오늘 하루가 무척 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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