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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18화 (118/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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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을 지새운 카일은 한 가지 문제점을 더 깨달았다.

차이엘드 병원의 일류 의사들을 불러 임신 여부를 알아내게 했다고 치자. 그런데 아이를 가진 게 아니라는 결과가 나온다면.

‘내가 아이를 원한다는 걸 알고 부담감을 느끼실 게 뻔해. 나 하나 때문에 느끼는 부담감은 아닐 테고.’

귀족들에게 아이란 사랑의 결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많은 귀족 여성들은 후계를 이을 자식을 낳아 가문의 입지를 굳건히 하기를 요구받는다.

차이엘드처럼 유서 깊은 공작가라면 주위에서 알게 모르게 주는 압박도 이미 상당할 터였다. 그런데 남편까지 아이 타령을 하면 얼마나 속이 타들어갈까.

개인적, 사회적으로 압박받는 상황이라면 아멜은 아이를 원하지 않아도 차이엘드를 위해 아이를 원한다고 말할지도 몰랐다.

“…….”

카일은 약혼반지가 제 주머니에 들어있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이럴 땐 나도 당신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문이니, 후계니 하는 것들 때문에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생각할 무렵 아멜이 잠에서 깨어났다. 카일은 복잡한 마음을 꼭 숨기고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미열이 있는 것도 같았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 그의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배로 빠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갑자기 스트레스성 탈모라도 온 것일까.

“카일. 괜찮아요? 머리가 엄청 빠졌는데?”

“뒤척임이 심했나 봅니다. 차이엘드에는 탈모 유전자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쩐지 자신의 유전자를 두둔하게 된 카일이었다. 아멜은 떨떠름해하면서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건 그렇고, 제 약혼반지 어디에 있어요? 카일만 뺄 수 있잖아요.”

“아무래도 자주 착용하는 장신구이니 관리가 필요할 것 같아서 잠깐 맡겨두었습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일어날까요?”

기지개를 켜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녀가 갑자기 휘청였다. 카일은 평소의 두 배로 철렁해 그녀의 몸을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잠깐 어지러워서.”

“주치의를 부르겠…….”

“괜찮아요. 제가 어지러운 건 다 카일이 어제 절 늦게까지 괴롭힌 탓이니까.”

분명 아멜은 가볍게 웃으며 농담을 건넨 것이었다. 하지만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그 농담에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직 그녀가 아이를 가졌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러나 임신 초기라면 어느 때보다 수면과 휴식이 중요한 시기.

자꾸 자고 싶어 하고, 나른해 소르르 눈을 감는 그녀를 살살 꼬드긴 건 모두 자신이었다. 규칙적인 생활도 완전히 무너뜨렸다.

아이가 잘못되었다면? 내 탓이다.

이쯤 되자 카일은 단단한 벽에 머리를 박고 싶어졌다.

차이엘드는 죽을죄를 지어도 훈장을 받는다는 우스갯소리는 그 죄가 아멜리아 차이엘드와 연관이 없을 때나 통하는 말이었다.

***

공작의 오전 업무는 황궁에서의 회의였다. 당연히 카일은 업무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그의 생각은 오로지 하나에 쏠려 있었다.

당사자가 모르게 임신 여부를 판명하는 방법.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한정되어 있는 일반인들에겐 불가능한 일일 테지만 차이엘드에게는 아니었다. 카일은 몇 가지 수를 떠올렸다.

대개 각국의 황궁에는 혈통 문제를 위해 아이의 친부모를 분별하거나 임신 여부 및 시기를 알려주는 마도구가 있었다.

문제는 하일 제국에 있는 게 위의 기능을 하나로 합친 최신식 마도구라는 것이었다.

‘친부모 감별 기능은 대체 왜 들어 있는지 모르겠군. 허리를 방탕히 놀렸으면서 제 핏줄은 구분해야 한다는 건가.’

카일은 몹시 짜증이 나 인상을 팍 썼다. 아멜 몰래 사용한다면 문제 될 건 없지만, 나중에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녀는 무척 상심할 것이다.

‘내가 아이의 친부를 의심한다고 생각하실지도 몰라.’

친부? 당연히 자신이었다. 아멜을 하루도 얌전히 놓아준 적이 없으니. 그녀의 몸에는 항상 제 입술 자국이 남아 있었으며 이젠 서로의 체취마저 비슷해지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기분이 상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게다가 황실에서 마도구를 빌린다면 필시 사교계에 소문일 날 것이다. 아멜이 후계에 대한 압박을 받을 수 있으므로 마도구는 사용은 포기.

다음으로 떠오르는 건 역시 진료였다. 병원장 폴 레미안을 불러 어떻게든 그녀 몰래 임신 여부를 판명하도록 하는 것이다.

‘……본인 몰래 채혈이 가능하기나 한가.’

머리카락으로 아이를 가졌는지, 아닌지 파악할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제국의 의학은 피검사를 통해서만 임신 여부를 판명했다.

피검사에 필요한 피를 몰래 확보하려면 그녀가 자연스레 피를 흘려야 하는데, 저를 포함한 차이엘드의 모두라면 아멜의 부상 및 출혈을 목숨 바쳐 막으리라.

생각이 점점 복잡해진 탓에 손이 느려져 종이에 잉크가 번졌다. 그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 카일은 고개를 들었다.

“차이엘드 공작.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언제 회의가 파했는지 죽상을 한 황제가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엔 공주와 결혼식을 올린 후부터 황제는 늘 기죽은 얼굴이었다. 대 하일을 지배하는 황제가 밤만 되면 시무룩해진다는 소문을 카일도 들어 알고 있었다.

“별일 없습니다. 살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카일은 베르드의 시시한 밤 이야기나 남자에게 좋다는 보약들 시식기 따위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의 대화 주제는 흥미로웠다.

“공작. 괜찮다면 차이엘드 병원의 의사를 입궁시켜주지 않겠나?”

“비뇨기과 의사 말입니까?”

“……굳이 따지자면 그렇네만, 자네는 그런 걸 꼭 되짚어줘야 하겠나? 조용히 넘어갈 순 없어?”

“원하신다면 유능한 상담가를 같이 불러드리겠습니다. 폐하의 불능은 심리적 이유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생각해주는 척하면서 매도하지 말게. 불능이라니. 그저 조금 부족할 뿐인데…… 자네처럼 출중한 사람은 내 고충을 모르겠지.”

“과찬이십니다.”

산뜻하게 답한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베르드가 간절한 손길로 그를 붙잡았다.

황제의 얼굴에는 이대로 가다간 아내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깊은 걱정이 서려 있었는데, 그 절박함이 오늘만은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카일리안. 저잣거리에서 유명한 은둔 명의를 잡아다가 내 앞에 데려와 달라는 게 아니잖나. 차이엘드 병원의 의사들 좀 빌려달라는 것뿐인데!”

대체 이놈의 황제는 얼마나 절박했기에 평소 살피지도 않는 저잣거리까지 샅샅이 뒤진 것일까. 카일은 그가 말하는 의사의 정체가 궁금했다.

“저잣거리에서 유명한 은둔 명의라면 누굴 말하는 겁니까?”

“자네는 그 소문을 듣지 못했나? 동양의 어딘가에서 득도한 의사가 광장 주변에서 서성인다더군. 듣자 하니 가느다란 침을 몸에 꽂아 사람을 치료한다던데…….”

“그렇다면 황실 어의로 고용하시면 될 일이 아닙니까. 폐하께선 하일의 황제시니.”

“나도 그러려고 했네만, 고지식한 이유를 들어 가며 거부하더군. 실력이 있으니 그만큼 콧대가 높은 것이겠지.”

“대단한 실력자인가 봅니다.”

“여인의 팔목에 실을 묶어 길게 늘어뜨린 다음, 실을 타고 전해지는 맥박만으로도 회임을 진단해낼 정도라니…… 탐나는 인재인데 말이야.”

“……!”

드디어 원하던 것을 찾아낸 카일의 귀가 쫑긋 반응했다.

***

하일 제국 광장 근처의 작은 다락방. 오웬 장은 부산스레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하일 타임스를 읽고 있었다.

‘오늘도 앤 스미스의 칼럼은 날카롭군.’

상인이나 사업가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커피를 홀짝이는 그는 사실 동양의학의 모든 것을 익힌 천재였다.

먼 동양의 고국에 있을 무렵, 그는 워낙 출중한 실력 덕에 숨만 쉬고 있어도 황제 전담 어의 자리를 보장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웬은 야반도주해 연고도 없는 서방으로 향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황제의 주치의라는 명예만을 위해 삶을 바칠 생각은 조금도 없어.’

제국의 지존을 모시는 일은 영광 그 자체였으나 달리 말하면 영광뿐이었다. 황실에 암투의 조짐이 보이면 가장 먼저 갈려나가는 것도 어의였다.

‘내 의술을 발휘하기 위해 누군가의 아래에서 굽실거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얼마 전 일국의 황제를 모시는 영광을 주겠다는 베르들레반 드 하일의 심부름꾼에게 퇴짜를 놓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오웬에게 의술은 제 모든 것이자 자존심이었다. 정해진 주인을 모실 것이 아니라, 의술로써 제 삶에 자유를 불어넣고 싶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의사로 활동한 경험이 전무하니 병원에 취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에게 꿈이 있다면 위급한 환자를 받을 작은 병원이나 하나 개원하는 것이었다. 자신만의 공간에서 자신만의 의술을 펼치리라.

하지만 병원을 개원하려면 모름지기 돈이 필요한 법.

‘하일의 사업가들이 먼 동양의 이방인에게 돈을 빌려줄 리 없으니 내가 버는 수밖에 없겠군.’

오웬은 한숨을 푹 쉬곤 다시 하일 타임스를 읽기 시작했다. 앤 스미스의 칼럼을 반복해 읽으면 돈의 흐름을 보는 눈이 트인다는 누군가의 조언 때문이었다.

똑똑똑―

다시 집중하려는 찰나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오웬은 별 의심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가 크게 당황했다.

좋은 직업을 가진 게 뻔한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여럿. 대형 병원의 의사인 듯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도 한 무리였다.

바짝 긴장한 오웬은 침착하게 심호흡을 했다. 무리 중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의사 하나가 악수를 청해왔다.

“오웬 장.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차이엘드 병원의 병원장, 폴 레미안이라고 합니다.”

“차, 차이엘드 병원이라면 제국에서 제일가는…….”

“그렇습니다. 대 차이엘드 공작 전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의술을 펼치는 곳이 차이엘드 병원이지요.”

폴이 방금 한 말을 듣고 가슴 뛰지 않을 의사가 있을까. 오웬은 부러움과 두근거림 사이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폴 레미안이 전하는 다음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오웬 장, 우리의 차이엘드 공작 전하께서는 당신과 함께하시기를 원합니다.”

“……나는 한 가문에 딸린 주치의로 살 생각이 없소.”

“가문의 주치의 자리를 제안하는 게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의술을 높이 사시어 차이엘드 병원의 동양의학 전문의 자리를 제시하셨습니다.”

“그, 그런……!”

“당신이 제안을 승낙한다면 차이엘드의 건축가들이 즉시 동양의학 전문 병동을 세울 겁니다. 당신의 이름이 새겨진 명패도 있겠지요.”

갑작스런 제안에 오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토록 달콤한 제안이 또 있을까.

폴 레미안은 그가 달콤함을 음미할 시간을 주지 않고 차이엘드식으로 쐐기를 박았다.

“오웬 장. 이것은 차이엘드 공작 전하께서 당신께 보이는 자그마한 성의입니다. 당신이 받게 될 연봉의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금액이겠지만.”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나무 궤짝 몇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뚜껑까지 넘치도록 차 있던 금화가 사방으로 떨어졌다.

거절하기엔 너무나도 큰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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