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오웬 장이 차이엘드와 함께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카일은 그가 도착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하일드. 아직입니까?”
“방금 마차가 정문을 통과했다고 하니 30분만 더 기다리시면 될 듯합니다.”
이놈의 공작저는 쓸데없이 넓다고 생각하려던 카일은 곧 마음을 바꾸었다. 아내는 광활한 차이엘드 공작저를 좋아했으니까.
곧 오웬을 비롯한 의사들이 카일의 집무실에 당도했다. 국가기밀을 논하기라도 하듯 문이 닫혔고, 집무실에 남은 건 차이엘드에 뼈를 묻은 자들뿐이었다.
“오웬 장. 반갑습니다. 당신을 부른 것은 확인하고픈 게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일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야 할 겁니다.”
차이엘드 공작의 목소리는 상대를 존중하는 듯하면서도 확실한 위압감을 풍겼다. 오웬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은 하일드와 폴, 오웬을 차례로 바라보다 신중하게 운을 뗐다. 막상 입 밖으로 내려니 만감이 교차했다.
“……제 아내가 아이를 가졌는지 진단해주십시오. 그녀 몰래.”
“……!”
방 안에 있던 자들 모두가 깜짝 놀라는 것은 당연지사. 그들은 누나 님이 아이를 껴안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하일드는 회임의 징조를 미리 눈치채고 알리지 못한 고용인들을 탓했으며 레미안은 즉시 그녀의 영양 상태를 분석해 주방장과 공유하겠다고 했다.
“아직 확실한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카일의 목소리도 어딘가 흥분에 젖어 있었다. 오웬은 그리하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과 평화 작전에 이어, 차이엘드에 또 다른 작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카일. 미안한데 잠깐 낮잠을 자도 될까요? 요즘 자꾸 졸립네…….”
“그렇게 하십시오, 누나.”
카일은 그녀에게 짧게 입 맞춰준 뒤 이불을 덮어 주었다. 부쩍 잠이 많아진 아내는 금방 깊은 잠에 빠졌다.
‘드디어 잠드셨군.’
카일은 비장한 손길로 주머니에서 실뭉치를 꺼냈다. 거미줄만큼이나 가느다란 실을 그녀의 팔목에 묶는 것은 쉬웠다.
정말 실을 통해 전해져 오는 맥박으로 임신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밑져야 본전. 그는 실을 살살 풀며 옆방으로 향했다.
그곳엔 바짝 긴장한 하일드와 폴, 오웬이 있었다. 카일은 오웬에게 실의 끄트머리를 넘겨주었다.
“잠시 집중하겠습니다.”
오웬은 가부좌를 틀고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가 실을 살살 잡아당겼다 풀었다 할 때마다 모두의 입이 바싹 타들어갔다.
특히 카일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오웬이 쥐고 있는 게 제 명줄인 것 같았다.
잠시 후, 오웬이 호흡을 갈무리하며 눈을 마주했을 땐 시간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공작 전하. 축하드립니다.”
“……!”
“귀부인께서는 임신 초기입니다. 아기씨의 맥이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아기…….”
카일은 말을 잇지 못하고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정신이 아득했다. 행복감이 밀려와 눈가가 뜨거워졌다.
“정말입니까?”
“예. 무척 건강한 상태인 듯싶습니다. 다만 초기이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참을 새도 없이 눈가가 뜨거워졌다. 카일은 고용인들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방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다.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
“…….”
하필 레이디 클레어와 마주쳤다는 게 문제였지만.
클레어는 답지 않게 질질 짜는 카일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체통은 지키는 편인 그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얼굴을 하는 이유라면 뻔했다.
“……아멜에게 무슨 일이라도?”
“…….”
카일은 늘 그렇듯 싸늘한 레이디 클레어의 눈을 보고 차츰 평정을 되찾았다.
저는 기뻐 미칠 것 같다. 당장 아내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등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런데 아멜은?
‘……원치 않는 아이를 갖게 된 것이라면 이런 눈을 하시겠지.’
싸늘하고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는 눈을.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사지가 추욱 처지는 기분이었다.
한편, 클레어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아멜의 방으로부터 길게 늘어진 실. 병원장과 의료인으로 보이는 남자. 차이엘드 공작저의 살림을 맡아 보는 하일드 웨일.
결정적인 증거는 미친놈처럼 방방 뛰다 시무룩해지는 공작이었다.
“……아멜이 아이를 가진 겁니까?”
눈치와 머리만을 가지고 살아남은 클레어 차이엘드를 속이는 일은 불가능했다. 카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어는 그의 반응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기뻐하다 마시는 겁니까. 공작 전하께서는 아멜이 아이를 갖기를 줄곧 원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내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한 말투에서 그의 고뇌가 드러났다. 얼굴까지 수척해진 걸 보니 밤새 이 문제로 고민한 모양. 하지만 클레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아멜이 아이를 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클레어는 그간 아멜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곤 대충 이유를 파악했다. 상황이 꽤나 재미있지 않은가.
그에게 걱정일랑 말고 어서 아멜에게 희소식을 전하라는 말을 해줄까 싶었지만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언니, 미안해요. 어제 늦게 잠들어서…….”
“죄송해요. 카일이 일찍 퇴근하는 바람에…… 다, 다음 티타임에는 꼭 참여할게요!”
“클레어 언니. 정말 면목이 없어요.”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아멜을 독점한 채 자신에게 보내주지 않았다. 클레어는 2인용으로 준비된 티타임을 홀로 쓸쓸히 보냈던 나날들을 떠올렸다.
‘차이엘드 공작이 마음고생 하는 꼴 좀 보고 싶군.’
그녀의 입가에 인위적이고 산뜻한 미소가 걸렸다.
“아멜의 임신 소식이라니. 차이엘드에는 더할 나위 없는 복이군요.”
마치 아멜 개인에게는 그닥 좋은 일이 아니라는 듯한 말투였다.
클레어는 버림받기 직전의 강아지처럼 울먹거리는 카일을 유유히 지나쳤다.
잠시 후, 차이엘드 공작저의 고용인들에게 엄포가 떨어졌다.
적절한 상황이 오면 직접 말할 것이니 공작 부인의 임신 소식을 누구도 입 밖에 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기분이 상쾌했다. 요 며칠, 감기 기운도 아닌 것이 속이 답답했는데 말이다.
가볍게 기지개를 켜곤 눈을 뜨자 카일이 보였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당히 수척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눈빛은 또 왜 이렇게 애절한지. 소싯적 내가 도망을 일삼을 때도 이런 눈빛을 보이진 않았다. 제발 버리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 같아 푸스스 웃음이 났다.
“카일. 위로 올라오지 왜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어요?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
이 반응은 뭘까. 정말 죄라도 지었는지 카일의 눈가에는 촉촉이 물기가 어렸다. 그 모습이 나라를 잃은 가련한 왕자님처럼 보여 내 음심을 자극했다.
“안 되겠다. 이리 올라와요.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해도 용서해줄 테니까.”
뺨을 쓸자 카일은 홀린 듯 침대 위로 올라왔다. 나는 그의 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매끈한 허리를 손으로 쓸었다.
내가 원하는 것처럼 그도 나를 원할 것이라 생각했건만. 카일은 입술에 자잘하게 입을 맞춰 주곤 엉뚱한 제안을 했다.
“누나, 마침 좋은 식재료가 들어왔다고 하니 조금 이르긴 하지만 식사부터 하는 게 좋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아멜리아 호수 옆에 테이블을 두고 식사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어디든 좋으니 일단 식사부터…….”
왜인지 붉은 눈동자가 어떻게든 내게 뭔가를 먹이겠다는 의지로 활활 불탔다. 내가 영양실조로 죽는 꿈이라도 꾼 것일까.
“아니에요. 저녁은 생각 없어요. 어제 과식을 해서 그런가? 속이 좋지 않아서.”
“……속이 좋지 않으십니까?”
“요즘 야외 활동을 하지 않고 계속 잠만 자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지금은 다른 게 더 끌리는데.”
흠칫 놀라는 카일이 오늘따라 더욱 예뻐 보였다. 눈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서는 마른침을 삼키는 얼굴이라니.
나는 손을 뻗어 모양 좋은 입술을 지분거렸다. 엄지로 길게 쓸기도 하고, 입꼬리를 어루만지며 그와 거리를 살짝씩 좁혔다.
그럴 때마다 카일은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된다고 말하듯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나를 피하던 그의 등이 침대 헤드에 닿았다.
“어떡하지? 이제 도망갈 곳도 없는데. 오늘 왜 이렇게 피해요, 응?”
“누나, 잠깐만…… 읍.”
나는 무언가 이유를 대려는 그의 입술을 가로막았다. 처음엔 거부하듯 굳게 닫혔던 입술이 차츰 벌어졌다.
조심스레 키스에 응하는 입술과 달리 그의 팔은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이런 일을 벌이면 안 된다는 듯이. 그런 거부가……
‘이거 생각보다 짜릿한데?’
씩 웃음 짓자 카일이 몸을 더욱 움찔했다. 나는 일부러 더욱 거칠게 그에게 침범했다. 입안의 뜨거운 살결을 건드리자 그가 나를 완전히 밀쳐냈다.
“……지금은 안 됩니다.”
세상에나.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한 번만 봐 달라고 애원하는 카일이라니. 이런 모습을 보면……
“왜 안되는지 누나가 알아듣게 설명해 봐, 응?”
그저 짜릿할 뿐.
내가 능글맞게 반응하자 카일은 시선을 피하며 이불을 틀어쥐었다. 반응이 너무 순진해 내가 엄청나게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좋으면서 왜 피해요, 응?”
“…….”
“그거 알아요, 카일? 나 지금 엄청 나쁜 짓을 하는 기분인데.”
“지금은 예쁘고 좋은 생각만 하셔야…….”
“난 다른 생각 하는데.”
나는 그의 귓가에 대고 내가 하고 있는 온갖 나쁜 상상들을 조곤조곤 말해주었다. 카일은 순결한 어린 양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누나. 생각을 좀 건전하게…….”
“우리가 언제 건전한 생각 좋아했다고 그래요. 카일은 뭐 하고 싶어요?”
그의 팔에 돋은 힘줄을 매만지며 물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
“영양소가 골고루 배치된 한 끼를 함께한 다음, 날이 선선한 저녁에 같이 산책하고 싶습니다. 돌아와서는 미지근한 물로 각자 씻은 다음 손만 잡고 내일 아침까지 푹 자는 게 좋겠습니다.”
“……응?”
설마 결혼 1주년을 넘기자마자 욕망이 사라져버린 건가. 나는 우주에 떨어진 것처럼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