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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20화 (120/134)

#4

처음엔 그저 부끄러워 농담을 한 줄로만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카일이 정말 욕망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일은 정말로 나를 성대한 식탁에 데려가 이것저것을 먹였으며, 속이 불편하지는 않은지 수시로 체크했다.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가 있어서 레드와인을 한 병 부탁했을 땐, 내 손을 꼭 잡은 다음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애원했다.

“누나…… 술을 꼭 드셔야겠습니까?”

순식간에 알콜 중독자가 된 느낌이라 술 생각이 싹 사라졌다. 평소라면 같이 한잔 했을 텐데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이상한 것은 카일뿐만이 아니었다. 목욕 시중을 들던 고용인들도 평소보다 몇 배로 조심스러웠다.

아기를 목욕시킬 때나 사용할 법한 부드러운 천에 거품을 내는가 하면, 몸에 바를 향유를 고를 때에는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했다.

평소대로라면 고용인을 물리고 슬쩍 욕조에 들어왔을 어린 남편은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침대에선 더한 일이 벌어졌다.

정성스레 머리를 말려주는 그의 손길이 뜨거워 내심 기대한 바가 있었다. 지금까지 보인 금욕적인 모습들이 이 순간을 위해서일 것이라고.

카일은 나를 눕힌 다음 얼굴을 쓰다듬어주며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듣는 것만으로도 사르르 마음이 녹는 목소리를.

“누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릴까 합니다. 옛날 어느 산속에 아빠 곰, 엄마 곰, 아기곰이 살았습니다.”

나는 단번에 확신했다. 카일이 이제 둘째 아기곰을 만드는 이야기를 해주려는구나, 하고.

하지만 카일의 이야기는 곰 세 마리가 한 집에서 사이좋게 꿀을 나눠 먹는 것이 전부였다. 끝까지 후끈하기는커녕 훈훈하기만 했다.

‘그래. 그동안 욕망을 탈탈 끌어다 쓰긴 했지.’

욕망이라는 것이 이리도 빨리 소진되는 것인지 몰랐다.

카일이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간다고 해도 나는 그를 사랑할 테지만, 하루아침에 사람이 달라진 건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했다.

***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미칠 노릇이었다. 결국 어제 그녀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사자에게 중요한 사실을 숨겼다는 죄책감이 거대한 폭풍처럼 몰려왔다. 그 와중에 누나가 자꾸 술과 제 몸을 원하니 어찌해야 할지 난감해 죽을 맛이었다.

‘왜 자제해야 할 때만 적극적으로 나오시는 걸까.’

그녀가 저를 원하는데 거부하는 건 젖먹던 힘까지 짜내야 가능한 일. 그 일을 하루에 몇 번이나 해대니 기가 빨렸다.

참기 힘들었다.

아멜리아 차이엘드는 원래도 사랑스러웠다. 그런 그녀가 제 아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제는 온종일 껴안고 보듬고 싶었다.

얼른 그녀에게 사실을 고한 다음 함께 기뻐하고 싶었다. 그녀가 같이 기뻐해 줄 때의 문제이긴 하지만.

‘……같은 여성인 레이디 클레어의 반응이 걸리는군.’

임신 소식이 아멜리아 차이엘드의 영광이 아니라 차이엘드 공작가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듯했던 그 음성이 잊히지 않았다.

여러 고민들이 겹겹이 쌓였다. 아멜이 가장 행복해할 때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가도, 아내가 싸늘한 얼굴을 할까 봐 두려웠다.

‘내가 행복해하는 것만큼만 기뻐해주셨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결국 아이를 품는 것도, 출산의 고통을 겪는 것도 그녀였다. 문득 그녀가 마냥 기뻐해주기만을 바라는 게 파렴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임신 초기는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다. 격한 움직임도 피해야 하고 먹는 것도 신중해야 했다.

일단 임신 사실을 알리고 나면, 그녀는 저처럼 마냥 행복해하진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길 바라는 마음이 이기적인지도 몰랐다.

‘……얼른 사실을 알리고 남편인 내가 보호해줘야 하는데.’

기회가 오지 않으니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카일은 오늘 검토해야 할 서류들을 신속히 마무리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에 집중해야만 하는 공작이라는 자리가 허무하게 느껴졌다.

“하일드. 아내는 오늘 식사를 잘 했습니까? 낮잠은?”

“속이 좋지 않으신 듯하여 잘 익은 과일을 갈아 냈습니다. 이후 짧게 낮잠을 주무셨다 보고받았습니다.”

보고의 내용은 그럭저럭 괜찮았으나 카일은 염려를 지우지 못했다. 그의 눈가에 작은 주름이 졌다.

시종이 없는 집에서 자라온 탓인지 아멜은 고용인들에게 제 불편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속이 좋지 않다고 해도 참았으리라.

“허브티라도 함께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지금 공작부인은 어디 계십니까.”

“그것이…… 말을 타러 가셨다고 합니다.”

“뭐?”

철렁한 카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얹힌 것도 없는데 속이 온종일 속이 꽉 막힌 듯했다. 마음이 답답하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린 나는 주저 없이 마구간으로 향했다.

차이엘드의 멋진 백마 중 한 마리를 골라 아멜리아 호수 근처를 내달리면 속이 뻥 뚫리리라.

아버지가 기사인지라 나는 말을 타는 데 익숙했다. 단순히 낙마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웬만한 성인 남자만큼은 말을 다룰 수 있다고 자부했다.

차이엘드의 고용인들도 내가 종종 승마를 즐긴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구간지기는 벌벌 떨며 시선을 피했다.

“누, 누나 님! 말들은 현재 점검 중입니다!”

“마차도 아니고 말을 점검한다니…….”

다소 어이가 없어진 나는 마구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늠름한 자태를 자랑하던 차이엘드의 백마들이 하나둘 휘청이기 시작했다.

‘마구간에 역병이라도 도는 거 아냐?’

어째 말들이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꾀병을 부리는 것 같았다. 전에도 종종 느낀 거지만 차이엘드의 말들은 사람 말을 알아듣는 눈치였으니.

게다가 카일까지 헐레벌떡 달려와 나를 막았다. 고작 말을 타려던 것뿐인데 병원장님까지 데려온 걸 보면 건강 염려증이 또 도진 모양이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카일. 제 건강은 제가 챙길 수 있으니까. 말들 상태가 좋지 않다니 일단 돌아갈까요?”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주방장에게 일러둘 테니 맛있는 간식도 드시고. 질 좋은 허브티가 들어왔으니 티타임을 갖는 건 어떠십니까?”

“간식은 나중에요. 잠깐 황궁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일순간 카일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누가 보면 내가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던전에 가겠다고 말한 줄 알겠네.

“거긴 왜 가시는 겁니까.”

“리엔 공주님께서 대화 상대가 필요하니 심심할 때 들르라고 하셨거든요. 마차를 타고 다녀오면 금방이니 산책 겸 다녀오려고요.”

“그러다 마차 사고라도 나면……”

“죽는 거죠, 뭐.”

예상대로 카일은 벼락을 맞은 얼굴이었다. 충격을 받아 멍해지는 모습이 귀여워 더 놀리고 싶었다.

“어차피 사람은 다 한 번씩 죽게 되어 있어요. 오늘 마차 사고로 죽는 게 제 운명이라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왜 그런 소리를 하냐며 그가 내 몸을 꽉 끌어안았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는 목소리는 은근히 중독성이 있어서 자꾸 걱정시키고 싶었다.

“……하일드. 레이디 클레어에게 가 황궁까지 이동의 아레테를 사용해줄 수 있냐고 묻도록.”

카일은 그럴 여지를 주지 않았지만.

클레어도, 카일도 내가 어련히 걱정되는지 황궁까지 따라오겠다고 하는 걸 겨우 뜯어말렸다.

아레테를 쓰니 확실히 편하긴 했다. 황궁까지 눈 깜짝할 새에 도착이라니. 클레어는 이동수단을 자처하려는지 때가 되면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나는 입궁을 알려달라 청했다. 이제 리엔 공주님은 켈트만의 공주가 아니라 하일 제국의 황후였기에 마음대로 만날 수 없었다.

“차이엘드 공작부인, 어서 와요. 마침 심심하던 차였는데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분명 그래야 하는데. 일국의 황후인 리엔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나를 맞았다. 그녀의 곁에 있던 시녀들도 하나같이 내게 머리를 조아렸다.

“황후 폐하께선 차이엘드 공작부인이 입궁하시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셨답니다.”

리엔은 내게 상담하고픈 일이 많다며 티타임을 준비하게 했다. 한 무리의 시종들이 번쩍거리는 마도구를 가져온 건 그즈음이었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확인해보시라 하여 들르게 되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내 지금 차이엘드 공작부인과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나. 거기 두고 물러가게. 나중에 부르지.”

“……예, 폐하.”

주변인들을 모두 물린 리엔은 테이블 위에 놓인 마도구를 한동안 째려보다 한숨을 쉬며 내 손을 잡았다.

“아멜. 우리는 절친한 친구지요? 친구끼리는 어떠한 고민도 나누는 법이고요.”

이름을 부르며 간절한 목소리로 묻는 걸 보니 어떤 이야기를 할지 대충 감이 왔다.

“그러합니다, 폐하.”

“하아…… 황제 폐하 때문에 미칠 것 같아요.”

역시나. 약 한 달 전쯤에 결혼식을 올린 리엔은 요즘 베르드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다거나 하는 로맨틱한 문제는 아니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조금의 배려도 없이 자신의 기분대로만 행동하세요. 저를 좋아해주시는 건 알겠는데…… 솔직히 아무런 감흥도 없다고요.”

“아…….”

일순간 바바리맨처럼 앞섬을 풀어 헤치는 베르드가 생각나 머리가 아팠다. 리엔은 한참이나 베르드의 불능 증세에 대해 털어놓았다.

“이래서는 영영 아이를 갖지 못할 거예요.”

“황후 폐하께서 아이를 원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타국에서 시집온 황후에게는 여러모로 아이가 필요하죠. 저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귀족 여성들이 후사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요.”

“아…….”

“이것 봐요. 잠자리를 가진 후에는 늘 회임을 진단하는 마도구를 보낸다니까. 공작부인이 돌아가면 전 시녀들 앞에서 마도구를 사용해야 할 거예요.”

리엔은 신경질적으로 마도구를 건드렸다. 그녀의 손이 닿자 무색이던 마도구에 검은빛이 일었다.

나는 신기하게 생긴 그것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이 마도구는 어떻게 사용하는 거예요?”

“그냥 만지기만 하면 돼요. 아이를 가진 여성의 손이 닿으면 노란빛을 띤다고 해요. 마도구를 보낼 거면 밤에 잘 좀 하던가…… 어?”

투덜거리던 리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도구로 시선을 내린 나도 얼빠진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도구가 병아리를 연상시키는 선명한 노란빛을 머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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