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리엔 과 나는 한동안 물음표가 가득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아이를 가진 여성이 손을 대면 노란빛을 띤다는 마도구가 내 손에서 샛노란 빛을 내고 있다. 확인차 리엔이 손을 댔을 땐 다시 검은빛을 냈다.
‘고장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곰곰이 생각해보니 마법의 사탕을 가져오겠다는 카일을 벽으로 몰아붙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그가 씻고 있는 욕실 문을 박력 있게 열어젖히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싱긋 웃은 적은 또 얼마나 많던가.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니잖아!’
나만큼이나 당황한 리엔은 내 손을 덥석 잡고 물었다.
“아, 아멜. 마지막에 달거리 한 게 언제였어요?”
“……지지난달에요.”
“아니, 차이엘드 공작저의 주인마님 되신 분께서 달거리를 빼먹었는데 여태껏 아무런 검사도 안 받아봤단 말이에요? 그 혈기왕성한 공작을 남편으로 두신 분이?!”
“폐하의 결혼식을 돕느라 바빠서 주기가 틀어진 줄 알았는데…….”
나는 다시 마도구를 바라봤다. 리엔이 퍼붓는 잔소리가 아득히 먼 곳의 소음처럼 느껴지며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차올랐다.
언젠간 카일과 나 사이에 아이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상상하던 기분은 막연한 행복이었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건 울렁거림과 가슴을 뜨겁게 하는 무언가, 그리고 카일이 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나는 축하를 건네는 리엔에게 카일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뜨거운 것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손등으로 눈물을 훑다 조심히 배를 쓸어보았다.
이전과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는 듯했지만 이 안에 그의 피를 이어받은 아기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 동시에 아무것도 실감 나지 않았다.
“아멜. 경사인데 왜 울어요. 그렇게 좋아요?”
“기분이 이상해요…….”
“공작저에 사람을 보냈어요. 어의도 불렀으니 정확한 진단을 받아보는 게 좋겠어요.”
리엔은 떨리는 내 손을 꼭 잡아주며 어의를 불렀다. 소식을 전해 들은 베르드가 헐레벌떡 뛰어온 것은 얼마 후의 일이었다.
***
한편, 차이엘드 공작저는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카일이 공작저의 고용인들을 죄다 불러 세세한 업무를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우렁찬 대답이 로비에 울렸다. 고용인들은 카일 못지않게 흥분 상태였다.
“누나 님께서 회임을 하셨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군.”
“산모를 위한 레시피를 개발해두길 잘했지. 부디 음식을 맛있게 드셔주셔야 할 텐데.”
“이런 경사가 또 있을까. 역시 차이엘드의 한 줄기 빛이야.”
“조만간 축제가 벌어지겠어!”
모두가 훈훈한 웃음을 머금던 그때, 벌컥 로비의 문이 열렸다. 헐레벌떡 달려온 것은 차이엘드 공작저의 정문을 지키는 고용인이었다.
“큰, 큰일 났습니다. 황실의 문장을 지닌 심부름꾼이……!”
“……!”
고용인들은 물론이고 방으로 돌아가려던 카일도 일순간 철렁했다.
평소라면 황실이 망하든, 피습을 받아 다급히 지원 요청을 하든 차이엘드는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황궁에는 차이엘드의 한 줄기 빛, 아멜리아 차이엘드가 가 있었다.
‘급히 심부름꾼을 보내 알릴 일이라면…… 다치신 건가?’
카일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근처의 기둥에 기대 카일이 말을 마치기를 기다리던 클레어는 더 놀랐다.
급히 말 한 필을 가져오라 명하려던 카일의 손목을 클레어가 잡아챘다. 이동의 아레테는 폴과 오웬, 하일드도 차례로 집어삼켰다.
리엔의 심부름꾼이 도착했을 땐 로비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차이엘드 공작부인. 몸은 좀 괜찮은가? 불편한 덴 없고?”
“예, 폐하.”
“차이엘드의 경사는 곧 하일 제국의 경사지. 정말 축하하네. 불편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내게 말하게.”
아멜은 소식을 듣자마자 나타나 과한 관심을 보이는 베르드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제일 불편하다고.
리엔이 몇 번이나 눈치를 줬음에도 베르드는 꿋꿋이 아멜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피검사를 마친 어의들을 재촉했다.
“어의는 어서 차이엘드 공작부인의 상태에 대해 보고하라.”
“경, 경하드립니다! 공작부인께선 임신 초기이십니다. 말을 타는 등의 격한 움직임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또한 영양 섭취와 스트레스 관리에 각별히 신경 쓰셔야 합니다.”
“임신 초기…….”
아멜이 홀린 듯 따라 중얼거릴 무렵이었다.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차이엘드 일행이었다.
그중 카일은 어의들에게 둘러싸여 저를 올려다보는 아멜을 보고 얼빠진 표정을 했다. 아멜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주저앉았으리라.
“카일…….”
그녀가 엷은 미소를 머금은 탓에 카일은 어의들이 나쁜 소식을 전하고 있던 게 아님을 알았다. 아니, 눈물 맺힌 웃음을 본 순간 아내가 무슨 소식을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멜은 리엔과 베르드의 배려로 소파에 길게 기대 쉬고 있었다. 카일은 떨리는 걸음으로 다가가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아멜은 아무런 말 없이 그의 손을 끌어 제 배 위에 얹었다.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전해지는 순간 카일은 코끝이 찡해졌다.
아직 태동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슴이 달리기를 마친 것처럼 쿵쿵 뛰는 이유는 그녀의 손이 제 손 위로 겹쳐졌기 때문이리라.
“카일. 요즘 피곤하다고 했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봐요. 제가 당신의 아이를 가졌대요.”
아내가 제 아이를 가진 건 미리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내가 그 사실을 직접 전하는 건 상상 이상으로 벅찬 일이었다.
모든 감정을 뒤로한 채 카일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걱정이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속이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괜찮아요. 죽을병에 걸린 게 아니니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그게 아니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카일은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아이 이야기를 꺼리던 당신인데, 내 아이를 가진 건 정말 괜찮은 거냐고.
그는 소리 없이 아멜을 껴안았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아멜에게 클레어가 슬쩍 다가와 카일 몰래 약혼반지를 끼워주었다.
아멜의 장신구나 옷에 관한 일은 곧잘 클레어에게 일임하던 카일이었다. 반지는 전문가들의 손길을 거쳐 더욱 광이 났다.
그리고 여과 없이 들려오는 차이엘드 공작의 속마음.
「누나는 아이 얘기를 꺼냈을 때 한 번도 밝게 웃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 나 때문에 애써 웃는 건 아닐까.」
「후계니 가문이니 하는 문제로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내 아이를 가져서 기쁘다고 말하면 이기적인 거겠지.」
아멜은 카일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과거의 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이지만, 저는 좋은 아버지가 될 자신이 있습니다.”
“네? 카일, 그…… 괜찮겠어요? 아이?”
공작저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의 기억이었다. 기억 속 아멜리아 다이앤의 얼굴은 굳은 것을 넘어 거의 경악에 가까웠다.
영상 속의 카일은 그 얼굴을 슬쩍 보곤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제가 아이에게 쌀쌀맞게 굴까 봐 걱정하긴 했습니다. 제 아버지처럼. 하지만 당신이 낳은 아이에게 어떻게 쌀쌀맞게 굴겠습니까. 지금도 당신을 바라보면 웃음부터 나는데.”
“…….”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이가 생긴다면 사랑해줄 겁니다. 누나를 닮았다면 더더욱.”
오래전 나누었던 대화를 회상한 아멜은 왜 그가 제 임신 사실에 미안해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멜은 그의 뺨을 쓸어 주며 웃었다. 아내와 관련된 일에는 한없이 조심스러워지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카일리안 차이엘드. 전 당신의 아이를 갖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에요.”
“하지만…….”
“물론 카일이 뭘 걱정하는지도 알아요. 당신 속마음은 다 엿봤으니까.”
맞닿은 몸이 움찔 굳었다. 거짓말을 들킨 어린애를 보는 기분이라 아멜은 푸스스 웃었다.
“제가 아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굳었던 건, 카일이 차이엘드의 계승을 트라우마로 생각하고 있을까 봐 그랬던 거였어요.”
“…….”
“아이를 보면 어렸을 때의 기억이 생각날 것 같아서. 그런데 괜한 걱정이었네요.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 할 줄은 몰랐어요.”
아멜은 머쓱함에 혀를 살짝 깨물었다.
그의 뺨을 감싼 제 손 위로 그의 큰 손이 겹쳐졌다. 사랑하는 것들을 충분히 지켜낼 따뜻한 손이었다.
“……저를 걱정해주신 겁니까.”
“본의 아니게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요. 신혼을 더 즐기지 못한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전 항상 카일을 닮은 아이를 갖고 싶었어요.”
“정말?”
“응.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니까요.”
폐부를 사르르 녹이는 듯한 달콤한 목소리였다. 카일은 그녀를 깊이 껴안았다.
깊은 구렁텅이에 빠진 기분이었다. 빠져나올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깊은 곳에 갇힌 듯 매 순간이 아득했다.
이 수렁에서 조금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부디 감당할 수도 없을 만큼 커다란 이 행복에서 오랫동안 허우적거리기를 바랄 뿐.
카일은 한참이나 아내를 놓아주지 않고 그녀의 호흡과 맥박을 느꼈다.
문득, 지금까지 이불을 차고 서류에 얼굴을 파묻으며 혼자 차곡차곡 쌓아온 행복 속으로 그녀를 초대하고 싶었다.
“집무실 서랍에 아이들 이름을 미리 지어 적어 둔 종이가 있습니다. 남자 이름 스무 개, 여자 이름 스무 개. 우리 아이 이름이니 누나가 직접 지어주는 것도 좋습니다.”
“……아이 이름을 그렇게나 많이 지어뒀다고요? 언제부터?”
“처음 아이 이야기를 나눴을 때부터.”
카일이 홀로 쌓아둔 행복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를 만들어 줄 부지를 매입해뒀습니다. 아이들은 뛰어놀면서 크는 게 좋다고 배웠습니다.”
“배웠다고요? 어디에서요?”
“<아이를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한 조언>과 <행복한 가족 만들기>에서.”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대체 그런 말랑말랑한 책들이 왜 차이엘드의 서가에 넘치도록 있는 거예요?”
“서가에 넘치도록 있는 게 아니라 제가 찾아 읽는 겁니다. 행복하게 해 드리고 싶으니까.”
아멜은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아이를 기다리는 날들도 힘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