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22화 (122/134)

#6

카일이 당신과 배 속의 아이를 위해 차이엘드의 모든 것을 동원하겠다고 말했을 당시, 아멜은 그 말이 그저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선가 들려오는 웅장하면서도 감미로운 교향곡을 들으며 눈을 뜰 즈음 그녀는 깨달았다. 남편이 제게 하는 약속은 언제나 진심이라는 것을.

‘왜 이 아침부터 창밖에 오케스트라가…….’

이 남자는 지금 태교를 위해 모닝콜로 교향곡을 선택한 것이다. 무려 오케스트라를 동원해서.

아멜은 할 말을 잃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차이엘드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누나 님! 차이엘드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 요한 아리데우스가 인사드립니다. 활기차고 건강한 하루를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덕분에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침부터 좋은 연주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곡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부디 즐겁게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차이엘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직접 작곡한 <아멜리아 송가>를.”

“아멜리아 송가? 찬송가 할 때 그 송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가진 것뿐인데 어째 하룻밤 사이에 영웅이 된 기분. 아멜이 넋을 놓을 즈음 그의 팔이 뒤에서부터 부드럽게 감겼다.

“좋은 아침입니다, 부인. 우리 아가도.”

카일은 꿀통에 오래 절여둔 듯한 목소리로 속삭이곤 입을 맞추었다. 고개를 돌려 마주한 그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선율이 마음에 드십니까?”

물론 제국 최고의 작곡가가 손수 작곡한 노래가 듣기 싫을 리 없었다. 제목이 <아멜리아 송가>인 것도 낯간지럽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고.

하지만 지금 엄지를 척 세워보였다가는 남은 임신 기간 동안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한층 업그레이드된 돈지랄을 펼칠 게 뻔했다.

그렇다고 해서 선물에 난색을 표하면 조금이라도 기분이 상하기 마련. 나는 카일의 양 뺨을 감싸곤 뺨을 조물거리며 말했다.

“카일, 정말 고마워요. 특별대우를 받으며 일어나니 아이를 가진 게 조금은 실감 나는 기분이에요.”

예상대로 카일은 당장 추가 작곡을 의뢰할 것처럼 눈을 빛냈다. 내게 뭔가를 해주려는 마음은 고마웠지만 차이엘드 스케일의 보답을 계속 받았다간 부담스러워 죽으리라.

“그런데 전…… 카일이 소곤소곤 깨워주는 게 더 좋아요. 예전처럼 뽀뽀도 해주면서. 우리 아가도 오케스트라보다는 아빠 목소리를 들으면서 일어나는 걸 더 좋아할 거예요.”

카일의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이런 반응을 보이리라 예상하고 한 말이었지만 생각보다 더 행복해하는 것 같아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방금 날 제일 좋아한다는 말을 돌려서 하신 건가.」

「분명 그랬어.」

「……우리 아가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해.」

「정말 아빠 목소리를 좋아해줄까.」

「오케스트라는 특별한 날에만 부르는 게 좋겠군.」

목적 달성 완료. 나는 오케스트라는 저녁 만찬이나 기분전환을 하고 싶은 날에만 부르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물론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감사 편지와 꽃다발을 보내는 일도 잊지 않았다.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확실히 축하받은 기분이었으니까.

눈물 젖은 편지지에 곧 태어날 차이엘드를 위한 송가를 새로 작곡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답장을 받을 때쯤, 나는 식당에 와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누나 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해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임신 중에는 음식에 예민해지실 테니…… 내키시는 것만 골라 드시면 됩니다.”

대체 몇 시부터 식사 준비를 하신 걸까. 늘 균형 잡힌 식사가 순서대로 서빙되던 차이엘드의 식탁에는 임금님 수라상보다 더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생각해주셔서 감사해요, 주방장님.”

“영, 영광입니다!”

다양한 음식들을 조금씩 맛보는 것도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아직은 입덧 증세가 없어 속이 답답한 것만 빼면 크게 불편하지 않았으니.

“부인, 맛있게 드십시오. 불편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시고.”

카일은 식당 종업원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싹싹한 태도로 내 식사를 관찰했다. 나는 그의 입에 카나페를 넣어 주며 속마음을 읽었다.

「맛있게 드시는 음식들을 외워뒀다가 나중에 참고해야겠어.」

「즐겁게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니 요리사 서른 명을 추가 고용한 보람이 느껴지는군.」

「우리 아가가 먹을 이유식 레시피도 미리미리 개발해두는 게 좋겠지.」

「……드시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

들려오는 속마음에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계승 전쟁을 겪으며 괴물 소리를 들은 탓에 그가 저를 닮은 아이를 꺼릴 것이라는 건 내 완벽한 착각이었다.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전한 게 어제인데 그는 진심으로 행복해하고 있었다. 아이를 얼마나 원한 것인지 관련 지식이 나보다 풍부했다.

‘내 막연한 걱정이었구나.’

남편님께서는 올해 스물다섯. 이 세계에서는 완벽한 성인이지만 내 머릿속의 스물다섯 남자는 자격을 모두 갖춰 놓고도 취업을 준비하느라 대학교 졸업을 계속 유예하는 나이였다.

남자 동기들이 아이가 생겼다며 배시시 웃으면 미쳤냐고 등짝을 때렸을 것이다. 네 앞가림도 못 하는데 무슨 소리냐고 물으면서.

하지만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달랐다. 그는 임신 사실을 안 후로부터 수시로 불안해지는 내 마음을 넉넉히 달래주고도 남았다.

「……누나가 왜 이렇게 빤히 보시는 거지.」

「아직 안정기가 아니라 격한 애정행각은 피해야 하는데…….」

혈기왕성하신 건 여전하지만.

나는 그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준수하다 못해 빛이 나는 얼굴을 내 앞에 대령했다.

“왜인지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아이 아빠가 이렇게 노력해줘서 괜찮아졌어요. 고마워요.”

“아이를 가진 아내를 안심시키는 건 남편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몸이 변화하는 일이니 당연히 불안할 테지만 카일의 산뜻한 웃음을 보니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일이 내 선량한 감사 인사를 잘못 알아들었다는 사실을 잠시 후에 알게 되었지만.

「준비한 것들이 마음에 드셨나 보군.」

「곧 심심함을 달래드릴 화원도, 다른 건물들도 완성될 테니 그것도 좋아해주셨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지금쯤 레이디 클레어가 누나가 가장 좋아하실 선물을 공수하고 있겠군.」

마지막 속마음은 조금 의문스러웠다. 클레어 언니가 날 위해 무슨 선물을 공수하고 있을까?

***

용병단 아레티스트 소속의 열 살짜리 심부름꾼 오즈는 화단에서 꽃을 꺾어 갈무리하고 있었다.

꽃다발을 받아들곤 우아한 음성으로 ‘고마워, 오즈.’하고 말하며 미소 지을 보스의 얼굴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보스의 시중을 들게 된 건 내 인생 최고의 영광……!’

오즈는 첫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얼굴로 황홀함에 젖었다. 역대 최강의 아레테 보유자라 불리는 보스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별 볼 일 없던 용병단 아레티스트를 반년 만에 대륙 최고의 위치까지 끌어올렸다. 보스의 초월적인 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성과.

보스는 돈만 좇는 다른 용병단 단장들과 달랐다. 입버릇처럼 사랑과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던가.

그런 가치관 때문인지 그녀는 내로라하는 수도의 귀족들도 손을 바르르 떨며 겨우 고용해야 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몸값을 자랑했다.

‘그것도 초기의 일이었지. 요즘 보스는 직접 임무에 들어가는 대신 연구에만 매진하시니까…….’

보스는 최근 아레테 연구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다. 무슨 연이라도 있는지, 관련 연구 자료는 무려 대 차이엘드 공작저에서 받아 왔다고 했다.

‘여러모로 대단하신 분이야.’

오즈는 꽃다발을 다듬으며 빙긋 웃었다.

보스는 월등한 실력이나 올곧은 가치관으로도 유명했지만, 여신의 후손이라고 해도 믿을 우아한 외모로도 명성을 떨쳤다.

아름다운 백금발을 휘날리며 빛의 채찍을 휘두르는 그녀를 본 단원들은 너도나도 충성을 맹세하곤 했다. 오즈도 그들 중 하나였다.

“섬광의 지배자, 바네사 메이브란테…….”

보스의 이름을 작게 읊조리며 얼굴을 붉히는 오즈의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맞게 찾아온 것 같군.”

새카만 머리카락과 붉은 눈이 고혹적인 귀족 아가씨였다. 보스의 손님인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권능이 서려 있었다.

오즈는 헙 하고 놀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언젠가 보스가 해주었던 지인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혹, 혹시 마녀 뺨치게 성질이 더럽고 한 사람에게만 친절하지만 돈지랄 하는 모습만은 한없이 너그러운 클레어 님?”

“…….”

클레어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바네사라면 저를 그렇게 평가했을 테니.

아직 어려 눈치가 조금 부족한 오즈는 손님의 이름을 맞췄다는 흡족함만을 느끼며 그녀를 보스에게 안내했다.

클레어는 뒤따라 걸으며 아레티스트 건물을 둘러보았다. 웬만한 귀족들의 저택보다 실내가 훨씬 호화로웠다.

‘짭짤하게 벌었나 본데.’

클레어와 바네사의 관계를 알 리 없는 오즈는 콩콩콩 문을 두드렸다. 곧 들어오라는 우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쩜 보스께서는 목소리마저 아름다우실까. 오즈는 클레어에게 문을 열어주면서도 보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손님을 마주한 보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오랜만입니다, 레이디 클레어.”

“바네사, 인상이 많이 바뀌었군. 역시 주변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옳아.”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오즈, 주방에 차를 내오라고 전하렴.”

클레어는 움직이는 여신상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고아한 바네사의 몸짓을 보다 픽 웃었다. 고작 1년 사이에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라니.

티타임이 준비되자 바네사는 고도의 교육을 받은 귀부인보다 더 고상한 자태로 차를 마셨다. 오즈가 탄성을 흘리며 인형 같은 모습을 바라볼 때였다.

“바네사. 경호 일을 의뢰하고 싶은데.”

클레어가 말했다. 바네사는 잠시 생각해보다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클레어. 최근엔 아레테 연구를 최우선으로 삼고 있어서요. 내후년쯤에 기사단을 꾸리는 게 목표라 그 일에 집중하고 싶어요.”

“아멜이 아이를 가졌어.”

툭.

바네사는 들고 있던 포크를 떨구곤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순간 오즈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허물을 벗는 도롱뇽처럼 보스의 우아함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뭐라고요? 마님이 아이를요? 얼, 얼마나 됐어요? 임신은 초기가 제일 위험한데! 왜 진작 찾아오시지 않은 거예요? 그런 일이라면 당장 사람을 보내거나 전령매를 보내거나 하셨어야죠! 우리 마님이 다치시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일단 자리엔 좀 앉지 그래? 우리도 어제 처음 알았어. 보수는 넉넉히 책정할 테니…….”

“보수라뇨. 다른 분도 아니고 우리 마님이 아이를 가지셔서 저를 애타게 찾으신다는데 돈이 문제인가요? 차이엘드 스케일로 성의의 표시 정도면 돼요. 아, 공작저에 가는 김에 아레테를 이용해 제작한 마도구들도 좀 챙겨가야겠어요. 우리 마님께 도움이 될 만한 것들로다가…….”

바네사는 한참이나 마님, 마님 소리를 늘어놓았다.

클레어는 이런 반응일 줄 알았다는 듯 픽 웃었으나 오즈는 충격을 받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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