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마님, 축하드려요!”
“바네사! 오랜만이에요!”
클레어가 저를 위해 공수했다던 선물이 바네사 메이브란테일 줄이야. 아멜은 반가운 마음에 쪼르르 다가가 그녀를 껴안았다.
친밀하던 친구와 1년 만에 재회한 기분. 한참 바네사의 등을 두드려준 그녀는 조금 뾰로통한 얼굴로 그녀를 추궁했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요? 아레티스트 건물로 사람을 몇 번 보냈는데 놀러 오지도 않고, 답장도 없고. 한 번쯤 들러줬어도 괜찮았잖아요.”
“마님…… 그렇게나 제가 보고 싶으셨어요?”
“그럼요. 아레테 연구 때문에 바쁘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마감 기한이 있는 연구라 급히 진행하는 거예요?”
바네사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레테를 이용해 마님이 원하는 사랑과 평화를 수호하는 기사단을 꾸리는 게 목표라곤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를 그리워했다는 마님에게 맨입으로 미안하다는 소리를 할 수는 없는 일. 바네사는 두둑이 챙겨온 선물을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이게 다 뭐예요, 바네사?”
“아레테를 이용해 마도구를 제작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거든요. 이건 그 결과물들이고요. 아이를 가지셨다고 해서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챙겨왔어요.”
바네사는 보따리 상인처럼 물건을 하나씩 설명했다. 수하들에게 급히 산모가 필요한 것들을 물어 챙겨온 것들이니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이건 미약하게나마 중력을 조종할 수 있는 아레테 보유자의 도움을 받아 만든 컵이에요. 거꾸로 엎어도 내용물이 쏟아지지 않는답니다.”
“나중에 아가가 태어나면 유용하게 쓰일 것 같네요. 아기들은 컵을 곧잘 놓치니까요.”
물론 그건 아이가 어느 정도 큰 후의 이야기였다. 바네사는 ‘정말요?’하고 크게 기뻐하다가 설명을 이어갔다.
아멜은 새삼 세상에 별의별 아레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닿은 자의 속마음을 읽는 제 아레테가 무척 귀하다는 것도.
이유 없이 놀러와 주지 않는 줄 알고 조금 섭섭했었는데 이제야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바네사는 연구로 정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줄 몰랐어요. 조금만 더 지나면 엄청난 부자가 되겠는걸요?”
“그렇게 되면 좋겠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은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하거든요.”
바네사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었다.
***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지 이틀 차.
아멜은 다이앤 영지에 있는 다이앤 백작저에서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다.
기존에 다이앤 백작 부부가 거주하던 백작저는 총기사단장이었던 다이앤 백작의 통근을 위해 황궁과 가까웠지, 차이엘드 공작저와는 꽤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아멜이 차이엘드 공작부인이 된 얼마 후, 다이앤 백작 부부는 아멜이 황실 백합 훈장과 함께 받은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연대보증으로 인한 빚도 완전히 상환했겠다, 그간 가르친 영식들이 슬슬 사교계에 모습을 비추기 시작했겠다.
영지와 멋들어진 백작성까지 있으니 다이앤 백작가의 명예는 이전보다 드높아졌다. 다이앤 백작 부부의 안색이 좋아진 가장 큰 이유는 다른 것이었지만.
“아멜, 먼길 오느라 고생 많았다. 어서 들어오렴.”
“아니에요. 클레어 언니가 도와주셔서 금방 왔어요.”
“이 애비가 애플파이를 만들어두었단다. 네가 어렸을 때 참 좋아했는데…….”
“여보, 울지 말아요. 공작 전하께서도 오셨잖아요.”
아멜은 아버지의 등을 두드려주며 안으로 들어섰다. 어제 소식을 듣고 한바탕 눈물을 쏟으셨는지 눈가가 퉁퉁 부어 있었다.
요리도 곧잘 하시던 전직 총기사단장이 애플파이를 만드는데 왜 이리 손이 많이 베이셨을까.
‘애플파이가 짤지도 모르겠네.’
아멜이 픽 웃었다. 일행은 안내를 따라 고급 카페를 연상시키는 유리 온실 안으로 이동했다. 애플파이를 비롯한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들이 한 상 가득했다.
다이앤 백작 부인은 폭신한 쿠션이 깔린 자리에 아멜을 앉히고 직접 허브차를 따라주었다. 딸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사랑이 가득했다.
“네가 내 배 속에 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참, 아이 태명은 지었니?”
“태명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제 태명은 뭐였어요?”
아멜의 질문을 들은 다이앤 백작 부부는 잠시 눈을 맞추곤 웃었다. 배를 쓸며 태명을 부르던 것이 떠올랐다.
“튼튼이.”
“……튼튼이요?”
의외의 태명에 카일은 웃음을 참았다. 다이앤 백작은 딸을 건강하게 키워 제 뒤를 잇는 기사로 만들 계획이라도 세우셨던 것인가.
하지만 다이앤 백작 부인의 설명은 어딘가 애틋했다.
“내가 지은 게 아니라 이이가 지은 태명이야. 우리 가문 여인들이 임신 때문에 고생을 꽤나 했다는 걸 알고 이런 태명을 지어왔더구나.”
“외가의 여성분들이요?”
“응. 원래 아이가 잘 들어서지 않아 손이 귀하…… 단다.”
아멜은 호호 웃으며 어머니가 머뭇거린 이유를 추리해냈다.
외가가 손이 귀한 건 외가의 문제였고, 정작 페르슈와 다이애나 다이앤은 ‘차 마시고 갈래요?’ 효과로 인해 단번에 속도위반에 성공하셨다는 이야기.
“저는 엄마를 닮은 것 같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차를 마시기 전에 기도하는 게 좋겠구나. 그렇죠, 여보?”
짧은 기도를 위해 맞잡은 아버지의 손을 타고 우울한 속마음도 들려왔다.
「차이엘드 공작 전하께선 서랍 가득하던 사탕들을 정녕 다 드신 것인가…….」
「딸을 아껴주는 것 같으니 다행이지만.」
「아이까지 가진 내 딸을 속상하게 하면 그 순간 결투다.」
다이앤 백작은 오늘도 세계관에서 가장 잘난 사위의 빈틈을 열심히 노리는 것 같았다.
새 생명을 보살펴 달라는 내용의 기도가 끝난 후, 대화 주제는 다시 아이의 태명으로 돌아왔다. 아멜은 카일을 지그시 바라보다 물었다.
“카일. 태명은 정해준 거 없어요? 아이 이름은 마흔 개씩이나 정해뒀다고 했잖아요.”
카일은 노련하게 장인어른의 시선을 피하며 같이 정하는 게 좋을 듯해서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답했다.
“음……”
아멜은 카일이 태명을 부르는 장면을 생각해보았다. 입만 벙긋거려도 귀여운 그였지만 사랑스러운 태명을 읊조린다면 더욱 귀여우리라.
“부인께선 아가를 어떻게 불렀으면 좋겠습니까?”
마침 그가 내뱉은 말 중 꽂히는 단어가 있었다. 안 그래도 대 차이엘드 공작이 저런 단어를 쓰는 게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방금 그건 어때요?”
“……아가 말입니까?”
“응. 카일이 그렇게 말하는 거, 엄청 듣기 좋아요.”
“아가…….”
아멜은 카일에게 슬쩍 접촉했다. 그는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아가? 정말 아가를 아가라고 부르고 싶으신 건가?」
「튼튼이보다야 낫지만…….」
「부인님께서 듣기 좋다고 하셨으니.」
「……그렇게 말하는 내가 좋다고도 하셨고.」
부인에게 사랑받기 위해 작명 센스를 눈감아주기로 하는 과정이 눈물겨웠으나 무조건 좋다고 말하는 듯한 미소와 목소리만큼은 산뜻했다.
“귀여운 태명입니다.”
“……정말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 맞죠?”
카일은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태명이 아가 차이엘드가 되는 순간이었다.
***
작명 다음에는 다이앤 백작 부부의 딸 사랑이 길게 이어졌다. 걱정과 사랑을 받으니 어느덧 늦은 밤인지라 아멜과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멜이 부모님과 포옹을 나누는 동안 카일은 선반 위에 놓인 액자를 바라봤다.
다이앤 백작 부부의 취미 중 하나는 집안의 액자를 장식하는 것이었는데, 매주 주제를 정하고 그에 맞는 아멜의 초상화를 골라 끼우는 것 같았다.
‘이번엔 누나가 어렸을 때 모습들이군.’
젖살이 통통하게 오른 아멜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화가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토실토실한 밀가루 반죽처럼 나온 그림들이 대부분이었다.
곧, 카일은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처럼 눈을 반짝 떴다. 토끼들에게 둘러싸여 배시시 웃는 아기 아멜의 초상화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자세히 보려 액자로 손을 뻗는 순간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다이앤 백작이었다.
“제가 가장 아끼는 그림입니다. 눈으로만 감상하시지요, 전하.”
카일이 시선을 떼지 못하자 다이앤 백작이 액자를 스윽 치우려 했다. 카일은 웃으며 그 액자를 꼭 쥐고 놓지 않았다. 힘겨루기를 하느라 두 사람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미술가를 불러 사본을 만든 다음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희소성이 떨어져 안 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머니의 어릴 적 모습을 보고 싶어 할 것 같은데.”
“할애비 집에 와서 보면 되지 않습니까. 손주를 위한 간식을 항상 마련해 두겠습니다. 그러니 이리 주시지요.”
다이앤 백작은 보송보송한 토끼들에게 둘러싸인 아멜 그림에 무척이나 집착했다. 카일은 수긍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곤 물러났다.
다이앤 백작은 아기 아멜만은 빼앗기지 않았노라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친히 조사할 것이 있으니 집안의 액자들을 모두 들고 입궁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기 전까지 말이다.
충실한 기사인 그는 마차 두 대에 나누어 아멜 컬렉션을 싣고 황궁으로 향했다. 알현한 황제도 어째 어이없어하는 얼굴이었다.
“폐하. 제가 가진 액자들은 모두 딸아이에 관한 것뿐입니다.”
“아, 그것 때문이겠군. 난 또 뭐라고.”
“예?”
“아닐세. 간단히 조사해야 하니 여기에 전부 두고 가게. 내 며칠 후 사람을 시켜 돌려주지.”
“제 딸아이 초상화로 무슨 조사를…….”
“황실 예산과 관련된 일이니 협조해주게. 복직했으니 자네는 하일의 충실한 총기사단장이 아닌가. 황제에게 충성해야지.”
베르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수하들에게 액자들을 옮기라 명했다.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갑자기 부탁할 것이 있다며 찾아왔을 때부터 공작부인과 관련된 일이리라 짐작하긴 했다. 그런데 이 정도일 줄이야.
‘고작 부인의 어렸을 적 모습이 담긴 그림을 구하려고 내년 황실 예산을 두 배로…… 그 정도는 돈도 아니라는 건가.’
베르드는 쓰게 웃었다.
다이앤 백작의 머릿속에 아멜을 껴안은 채 사악한 웃음을 짓는 사위의 얼굴이 떠오른 건 잠시 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