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우욱…….”
아멜은 얼굴을 팍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하다는 듯 차이엘드의 만찬은 정지되었으며 카일은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가 저지당했다.
“오지 말아요.”
“…….”
구역질에 고통스러워하던 아멜은 한참 후에야 입을 헹굴 수 있었다. 입덧이 시작된 지 어느덧 한 달. 그녀는 기력이 없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아…… 고마워요, 카일.”
물러나지 않고 곁에서 기다리던 남편이 붙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리되었으리라. 아멜은 저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카일의 뺨을 톡 건드렸다.
이런 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러나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아멜은 눈에 띄게 핼쑥해져 있었다. 미미한 현기증과 울렁거림이 그녀를 더욱 힘들게 했다.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카일의 속은 그야말로 바싹 말라갔다. 새콤달콤한 과일들을 구해다 주는 것 외엔 정말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어떤 남자들은 부인의 입덧을 대신 한다던데 나는 왜 해당 사항이 없는지.’
아멜은 되려 자신 때문에 남편의 비위가 상했을까 봐 걱정했다. 그런 건 식사는커녕 음식 냄새도 제대로 못 맡는 그녀가 걱정할 게 아닌데도.
카일은 아가 차이엘드에게 태어나서 아빠를 마음껏 괴롭혀도 되니 지금 엄마를 조금만 봐 달라고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힘들어하는 부인을 두고 혼자 배부를 생각이 없어 만찬을 정리하라 이르려 하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일, 미안해요. 조금 쉬고 싶으니 먼저 올라갈게요. 나중에 고용인들에게 물어볼 거니까 꼭 식사 다 마쳐요.”
“많이 먹어서 괜찮습니다. 같이 올라가겠습니다.”
“안 돼요. 내일 아침 일찍 황궁에 입궁해야 하잖아요. 일하려면 든든히 먹어둬야죠.”
아멜은 엄포를 놓고 계단을 올랐다. 카일은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 작게 말했다.
“하일드. 식사를 계속할 생각이 없으니 정리하라 이르십시오. 씻을 테니 신속히 목욕을 준비하고.”
하일드는 주인이 보통 잠들기 전에 씻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너무 이른 시간이다. 주군의 저의를 눈치채지 못했으나 일단 고개를 숙인 그였다.
***
목욕을 마친 카일은 고용인들이 가져다준 옷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아까 입고 있던 것과 디자인이 같으면서도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당분간은 제 옷이나 물건에 향을 입히지 마십시오. 아내가 냄새를 힘들어합니다.”
짧게 명한 공작은 옷을 꿰어 입고 곧장 아멜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미리 준비해두라 이른 으깬 감자와 모둠 과일 한 접시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상대로 그녀는 침대에 베개를 껴안고 앉아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일은 애써 웃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요기를 못 하신 것 같아서. 제 몫은 다 먹고 왔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하십시오.”
식사를 마치고 오긴 무슨. 비누 냄새가 폴폴 나는데. 아멜은 픽 웃으며 그가 포크로 콕 찍어 내미는 과일을 받아먹었다.
음식 생각이 없었지만 그녀는 천천히 카일이 먹여주는 과일과 으깬 감자를 모두 먹었다. 그의 다정함이 고마웠다.
“카일이 아가 아빠라서 다행이에요. 이렇게 음식까지 떠먹여주는 남편이 어디 있어.”
“그런 남편에게 왜 못 기대실까.”
“…….”
“화를 내셔도, 투정을 부리셔도 되니 제게 의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제가 아가 아빠니까.”
“카일…….”
“누나, 조금이라도 더 아내의 기분을 헤아리고 싶은 마음을 이해해주십시오.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인데 한 사람만 힘든 건 말이 안 되니까.”
아멜은 간질간질 저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그를 껴안았다. 콧잔등이 뜨거워지며 고마움과 서러움이 구분되지 않고 왈칵 쏟아졌다.
힘들었다. 아주 많이.
아이가 생겼다는 두려움과 불안 같은 것은 뒷전이었다. 그런 건 넘치도록 받은 사랑으로 진정시킬 수 있었다.
입덧이 시작된 지금, 남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훌쩍거리게 할 정도로 아멜을 서럽게 하는 것은 단 하나.
“……떡볶이가 먹고 싶어요.”
바로 빙의 전 그녀의 소울 푸드였던 떡볶이였다.
카일은 처음 듣는 ‘떡볶이’라는 단어에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으나 아멜은 이름을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였다.
“아니에요. 못 들은 걸로 하세요. 잡지를 너무 많이 봤나…….”
“외국 음식입니까?”
“말하자면 그런데 재료를 구하기 힘들 거예요.”
아니, 불가능한 수준이겠지. 아멜은 다시금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슬픈 생각은 들지 않았다. 머릿속은 이미 며칠 전부터 떡볶이가 점령하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좋아하는 떡볶이는 밀떡과 고춧가루로 만든 동네 분식집 스타일이었다. 투박한 국자로 퍼서 비닐봉지에 포장해주는 떡볶이.
먹고 싶은 마음이 오죽 컸는지 자주 가던 분식집 할머니의 얼굴이 꿈에 나오기까지 했다. 순대나 튀김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떡볶이면 되는데!
‘한국 작가가 쓴 소설이니 이 세계관 어딘가에도 떡볶이가…… 젠장. 생각하면 더 먹고 싶어지니까 포기하자.’
아멜은 작게 한숨을 내쉬곤 그의 자잘한 키스와 쓰다듬을 받았다. 부디 떡볶이 생각에도 시간이 약이길 바랐다.
***
그날 밤. 차이엘드 공작저의 고용인들은 소집 명령을 받았다. 주체는 주인인 차이엘드 공작이었으며, 용건은 무척이나 괴이했다.
“떡볶이를 아십니까?”
공작의 어투는 어째 광장에서 음산하게 걸어 다니다 사람을 붙잡고 ‘도를 아십니까?’하고 묻는 사내와 비슷했다.
대부분의 고용인들이 웅성거리며 고개를 젓는 가운데, 아멜을 가까이에서 보필한 몇몇이 기억을 떠올려냈다.
“떡볶이라면 누나 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인 줄 압니다. 마차에서 영애들에게 설명하시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구해다 드리진 못했지만…….”
“마님이 엄청 좋아하시는 매운 음식인 것 같아요. 살짝 달콤한 맛이 있으면서도 색깔은 먹음직스러운 붉은색이라고 들었어요.”
이런 식의 진술이 이어졌다. 늦은 시간이었으나 카일은 아멜과 교류가 잦은 영애들의 집에 심부름꾼을 보내 떡볶이에 대한 단서를 수집했다.
‘다행히 못 구할 음식은 아닌가 보군.’
연대보증 이전, 다이앤 백작은 내로라하는 기사였으므로 아멜이 어릴 적 맛본 타국의 음식을 지금까지 기억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했다.
카일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행복해하는 아멜을 떠올렸다. 원하던 것을 먹으면 아내의 기분도 나아질 것이다. 아가도 좋아하겠지.
‘남편인 나를 믿고 어려운 부탁을 해주셨으니 꼭 음식을 마련해야 해.’
곧 심부름꾼들이 도착해 떡볶이라는 것에 대한 진술을 쏟아냈다. 카일은 단서를 종합하는 탐정처럼 그것들을 하나씩 메모했다.
“긴 모양의 떡이라는 것과 고운 고춧가루로 양념해 끓여내는 음식으로, 삶은 계란과 생선의 살을 발라 네모나게 튀긴 것이 함께 들어간다는데…….”
다행히 발음부터 어려운 ‘떡’이라는 것의 정체는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동양 출신의 오웬 장이 눈을 빛내며 설명해주었기 때문이다.
“떡이란 제 고국의 별미 중 하나였습니다. 곡물가루를 찐 다음 치대 모양을 만드는 것이지요.”
“오웬. 떡 조리법을 자세히 적어 주방에 넘기십시오.”
카일은 메모를 다시 들여다봤다. 아멜이 언급하지 않은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떡볶이에는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소스가 중요할 것이다. 카일은 고춧가루라는 재료를 빤히 바라보다 하일드를 불렀다.
“하일드. 드디어 아멜리아 식물원이 빛을 발할 때입니다.”
아멜리아 식물원은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카일이 그날 저녁부터 짓기 시작한 거대한 식물원이었다.
<임신 중인 아내를 위하여>와 <내 아이를 위한 태교>를 비롯한 책들에서 아내의 입덧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게 시작이었다.
산모들은 새벽에 구하기 힘든 음식들, 특히 과일들을 먹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누나가 뭘 먹고 싶어 할지 모르니 모두 대비해두는 게 옳았다. 그래서 대륙과 외국에 존재하는 식용 식물들을 모두 사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꽃과 분재를 수집하는 아멜리아 화원은 아직 준비 중이니까…….’
아무튼, 아레테 보유자들을 고용해 힘을 쓴 덕에 아멜은 제 이름을 딴 식물원이 있는 줄도 몰랐다. 나란히 있는 아멜리아 양식장과 아멜리아 목장의 존재 또한.
“하일드. 주방장을 데려가 매운맛을 내는 붉은 열매들을 고르십시오. 적당한 가공을 거쳐 가루로 만들려면 시간이 빠듯할 겁니다.”
하일드와 주방의 고용인들이 결연히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매운맛을 내는 열매는 약 스무 개. 조리법을 모르니 떡볶이라는 것을 적어도 백 번은 만들어 봐야 할 터.
하지만 누나 님과 아가 차이엘드를 위해서 그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
다음 날 저녁. 오늘도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지 못한 아멜은 요거트 속에 든 딸기를 깨작거리고 있었다.
일단 한 번 먹고 싶은 음식이 생기니 그것 말고 다른 음식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몸에서 안 받기도 하고. 의무감으로 음식을 먹는 일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차이엘드 공작저에서 부족함을 느끼게 될 줄이야. 배가 불러도 너무 불렀어.’
한숨을 폭 내쉬며 다시 스푼을 들려는 찰나 어디선가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멜은 문을 두드리는 누군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카일과 하일드 집사장, 바네사를 비롯한 모두가 시험을 앞둔 수험생처럼 긴장한 얼굴로 들어왔다.
사람보다도 커다란 트레이에 실려 오는 무언가에 눈길이 갔다. 은색 반구형 덮개에 덮여 있는 것을 보니 음식인 듯한데, 가짓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이게 다 뭐예요?”
“누나 님, 이것들은 떡볶이입니다. 정확한 조리법을 몰라 임의대로 만들어 본 것이니 하나씩 맛보시고 어느 것이 가장 입에 맞는지 일러주십시오.”
“떡볶이를 만드셨다고요?”
“그러합니다. 조리법과 재료가 조금씩 달라 메뉴판을 만들었으니 원하시는 것부터 골라 맛보시지요.”
주방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덮개가 일제히 열렸다. 헛구역질이 나긴커녕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붉은색.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대체 어묵이 들어가는 건 어떻게 안 거지? 삶은 계란도 있네?’
의문보다 기쁨이 앞섰다. 경우의 수만큼 조리된 떡볶이들을 하나하나 맛보는 일은 무척 즐거웠다.
페퍼론치노로 만든 떡볶이, 붉은 피망으로 만든 떡볶이, 할라피뇨로 만든 떡볶이. 세상엔 참 맵고 붉은 재료가 많은 듯했다.
‘흘리듯 한 말이었는데 이렇게 생각해주실 줄이야. 아무리 차이엘드라고 해도 청양고추는 못 구했을…… 어?’
별 기대 없이 다음 떡볶이를 맛본 아멜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20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분식집을 하셨다던 떡볶이집 할머니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멜은 홀린 듯 떡 몇 개를 더 우물거렸다. 사 먹던 것보다 확 고급스러워진 느낌은 있으나 놀라울 정도로 흡사했다.
“주방장님, 이 재료는 어떻게 구하신 거예요? 쉽지 않으셨을 텐데.”
“매콤한 맛을 내는 소스와 떡을 만드는 데 쓰인 곡물은 모두 아멜리아 식물원에서 가져왔습니다.”
식물원의 이름에 또 제 이름이 붙어 있자 아멜은 반사적으로 카일을 바라봤다. 그는 뜨끔했는지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부인이 심야에 드시고 싶은 게 있는데 시간이 늦어서 속상해하는 상황은 없었으면 해서.”
카일은 아내가 돈을 펑펑 사용하는 걸 그리 달갑지 않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건만.
아내는 어느 때보다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일…… 카일은 정말 최고의 남편이에요!”
고용인들은 알아서 고개를 돌렸다. 그를 와락 껴안은 아멜은 나무를 쪼는 딱따구리처럼 그의 뺨에 사정없이 입 맞췄다.
금광이나 섬을 받았을 때보다 배로 격한 반응에 카일의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