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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25화 (125/134)

#9

떡볶이 사건 이후, 아멜은 즐겨 먹던 한국 음식의 레시피를 정리해 주방장에게 찾아가곤 했다.

대 차이엘드의 주방장은 아멜리아 식물원의 재료들을 이용해 그녀가 원하는 요리를 뚝딱 만들어냈다. 아멜이 알던 것보다 고급스러운 버전으로.

오징어 튀김과 순대 간이 먹고 싶었던 아멜은 떡볶이에 굴과 새우튀김, 푸아그라를 곁들여 먹게 되었지만 맛이 있으니 장땡이었다.

활동량은 줄어드는데 음식 섭취량은 느니 살이 찌는 건 당연했다. 임신했을 때는 당연히 체중이 증가하는 것이니 개의치 않던 아멜은 눈살을 찡그렸다.

[임신 중인 아내를 둔 그는 외도의 이유가 둔하고 살이 오른 아내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그녀가 읽고 있는 건 평민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통속 잡지의 과월호였다. 고용인들을 통해 구한 이 잡지에는 그야말로 뒷목 잡게 하는 이야기가 많았다.

세상엔 참 살 가치도 없는 놈들이 많다. 아멜은 혀를 츳츳 차며 잡지를 내려두었다. 그녀의 배에 손을 대고 아가의 태동을 느끼고 있던 카일이 반응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웃기지도 않는 변명을 읽어서요. 카일도 볼래요?”

임신 중인 아내를 두고 외도한 남자의 변명을 읽은 카일은 다소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아내가 제 아이를 가졌는데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오는 건지 모르겠군. 더 돌봐줘야 할 때 배신해놓고 이런 변명이라니.」

「태교에 안 좋으니 잡지는 폐간시키는 게 좋겠어.」

「게다가 살이 오른 아내가 뭐 어때서.」

「……예쁘기만 한데.」

임신 5개월 차를 넘긴 아내도 당연히 살이 올랐다. 껴안으면 탄탄한 감이 있던 몸이 어느샌가 보드랍고 말랑해졌다. 입덧으로 수척해졌던 때를 생각하면 감사함마저 들었다.

카일은 얼마 전, 목욕을 마치고 나온 아내가 하늘하늘한 원피스 잠옷을 걸치는 과정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뽀얀 살결 위로 실크가 찰랑이는 모습에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살이 올라 한결 부드러워진 몸의 선은 정신을 아찔하게 했다.

여러 종교의 여신상들이 죄다 풍만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아니, 부인은 어떤 모습으로 있어도 제 취향일 것이다.

게다가 침대에 마주 보고 누운 아내는 꼬물꼬물 다가와 품에 파고들었다. 자연스레 저를 찾는 그녀의 행동에 몸의 피가 빨리 돌았다.

“카일. 왜 그렇게 봐요?”

“……누나. 5개월부터는 안정기라 너무 격하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들은 것 같은데.”

“하지만 카일은 멈출 줄 모르잖…… 흣!”

그날 밤을 회상하던 카일은 곧 깜짝 놀라 현실로 돌아왔다. 손을 대고 있던 아멜의 배 안쪽에서 작은 태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가가 아빠 나쁜 생각하는 거 눈치챘나 보다. 허벅지 생각 그만 해요, 카일.”

“…….”

두 사람에게 들킨 기분이라 배로 뜨끔했다. 카일은 애교로 상황을 무마하려 아멜을 꼭 껴안았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내를 황궁에 들여보내야 한다니.

“역시 공작성에서 쉬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안 돼요. 나디아 공주님께서 특별히 초대해주신 거란 말이에요. 원래는 미혼 영애들을 위한 자리라 저는 못 가요. 아이가 태어나면 영애들이랑 어울릴 기회도 줄어들 거고.”

카일은 남편과 어울리면 되지 않냐고 투덜거리려다 꾹 삼켰다. 아가가 보고 있으니 어른스럽게 행동해야 하리라.

“저는 회의가 진행되는 본궁에 있을 겁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사람을 보내십시오.”

“영애들과 차를 마시는 자리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겠어요? 나디아 공주님이 티타임을 한두 번 주최하신 것도 아니고. 이제 슬슬 출발하는 게 좋겠어요.”

카일은 아쉬운 얼굴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로 나간 그는 하일드를 불러 낮은 목소리로 명했다.

“아내의 외출 준비를 도울 고용인들을 불러주십시오. 저 불순한 잡지는 당장 폐간시키도록 하고.”

***

오늘 자리는 차이엘드 공작부인이 임신 사실을 알린 후 참여하는 첫 공식 모임이었으므로 나디아 공주는 평소보다 더 많은 공을 들였다.

아멜이 앉을 자리에는 카페인이 없는 차를 배치했으며 의자도 편안한 것으로 바꾸었다. 티푸드 또한 그녀의 취향에 맞추었다.

무엇보다 영애들에게 질척거리려 어떻게든 티타임 장소 안으로 들어오려는 남자들을 차단하는 데 힘썼다. 그들 중 누가 실수로 차이엘드 공작부인에게 접근하면 피바람이 불 게 뻔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주님.”

“아니에요. 오랜만의 자리이니 편하게 즐기시길 바라요.”

나디아는 아멜이 평안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만일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차이엘드 공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아멜은 즐거운 마음으로 영애들과 어울렸다. 아직 어린 영애들은 날아갈 듯 가벼운 목소리로 각자의 연애 사업에 관해 떠들었다.

아멜 또한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해 목이 탔고, 자연스레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몇 잔 더 찾게 되었다. 그 결과야 당연했다.

‘화장실에 잠깐 다녀와야겠는데.’

그녀는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궁의 구조는 익숙했기에 지름길로 화장실을 찾았다.

일을 보고 나와 다시 티타임 장소로 향하려는데, 남자 여럿이 대화를 나누는 게 들렸다.

“그레첼 영애는 다 좋은데 조금 더 파인 드레스를 입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예쁜 쇄골을 왜 자꾸 감추는지…….”

“여성들이 노출이 있는 드레스를 입도록 공주님이 먼저 모법을 보이셔야 할 텐데 말야.”

킥킥대는 목소리가 무척 불쾌했다. 아멜은 인상을 찡그린 채 그들의 얼굴을 살폈다. 모두 아까 티타임에서 영애들을 기웃거리던 중년의 노총각 귀족들이었다.

‘양심 없이 딸뻘인 영애들을 기웃거리는 걸로도 모자라 아주 품평회를 하시네.’

얼굴과 신분을 기억해두었으니 적당히 기회를 봐서 벌을 주리라 다짐한 그녀는 잠시 후 굳어버렸다.

“그나저나 다이앤 영애 말이야, 살이 꽤 찌지 않았나? 가슴과 엉덩이가 한층 풍만해져서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풍만한 게 나쁘지 않다니. 여인은 자고로 허리가 잘 빠져야지.”

“어허, 이 사람아. 차이엘드 공작부인이라고 해야지. 애를 뱄으니 그 가문에 일평생 눌러앉아 단물을 빨아먹을 텐데.”

“다시 다이앤 영애로 돌아온다면 어떻게든 한번 해보는 건데.”

아멜은 저를 모욕해놓고 낄낄 웃는 그들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분노로 손이 바르르 떨렸다. 바네사가 이를 으득 갈며 말했다.

“마님. 제가 조용히 암살할게요. 저 이제 그런 거 잘해요.”

하지만 아멜은 고개를 작게 저었다.

***

황제의 궁에 딸린 회의실. 쉬는 시간이 되자 카일은 쪼르르 창문으로 다가갔다. 혹 아내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이 되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베르드는 천하의 차이엘드 공작이 주인을 기다리는 새끼 강아지처럼 행동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대체 자네는 왜 그렇게 아내를 걱정하는 건가? 공작부인은 다른 귀족 여성들과 달리 물리적인 싸움도 꽤 하잖나. 더군다나 여긴 근위병들이 지키는 황궁이라고.”

“이 정글 같은 황궁에 아이를 가진 아내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더더욱 자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군. 차이엘드는 정글의 포식자잖나.”

카일이 도끼눈을 하던 그때였다. 차이엘드 소속의 고용인 하나가 백마 한 필을 급히 몰아오는 게 보였다.

카일과 하일드를 비롯한 차이엘드 사람들은 모두 철렁해 문 쪽을 바라보았다. 곧 급히 달려온 고용인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헉, 헉…… 누나 님, 누나 님께서…….”

“내 아내가 왜.”

“속상해하셨습니다!”

“……!”

그 한 마디에 차이엘드의 모두가 깜짝 놀라 회의실에서 튀어나갔다. 차이엘드는 정말 아멜리아에게 미쳤군. 베르는 어이없는 광경을 보며 눈만 끔뻑거렸다.

카일은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 아멜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누나가 속상해하셨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깊은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말을 모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속이 상해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을 그녀를 상상할수록 더욱.

그러나 저 멀리 복도에서 보이는 아멜의 모습은 의자에 앉아 시무룩하게 기가 죽어 있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바네사가 아레테를 이용해 네다섯 명의 남자들을 공중에 매달고 있었다. 아멜은 복도에 장식되어 있던 검을 쥐고 칼집으로 그들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뚫린 입으로 다시 한번 말해 보십시오. 내가 다이앤 영애로 돌아가면 어떻게 한번 해보겠다고? 뭘 어떻게 할 건데?”

“죄, 죄송합니다…… 부디 목숨만은……!”

“딸뻘인 영애들을 노리는 걸로 봐선 판단력이란 게 없는 거 같지만, 지금은 목숨이 달린 상황이니 잘 판단하시길. 쓸데없는 말을 하면 혀를 잘라버릴 거니까.”

“히익!”

“마침 보는 사람도 없는 으슥한 복도…… 어?”

아멜은 그제야 카일과 차이엘드 고용인 일행들을 발견했다. 그녀에게 응징당하고 있던 중년의 남성들은 그들을 발견하고 반색을 헸다.

‘아무리 아멜리아 다이앤이라도 차이엘드 공작 앞에선 얌전을 떨겠지.’

‘차이엘드 공작도 아내의 괴팍한 모습을 보고 정이 털렸을 거야.’

‘어쩌면 아내를 꾸짖고 우리에게 사과할지도 모르겠군.’

그 증거로 차이엘드 공작이 굳은 얼굴로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무척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

“누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거꾸로 매달린 중년의 남성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카일의 행동을 반겼다. 그러나 카일의 다음 말은 그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건 좋지만 잔인한 장면을 보면 우리 아가가 많이 놀랄 겁니다. 예쁘고 좋은 것만 보여드리고 싶은 제 마음도 조금은 헤아려주십시오.”

“카일…….”

“제가 확실히 처리할 테니 칼은 이리 주십시오. 아이를 가진 상태로 무거운 것을 자꾸 들면 손목에 무리가 갑니다. 차를 드시고 계시면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흠…… 알았어요. 바네사는 두고 갈게요.”

아멜은 그에게 칼을 넘겼다. 카일은 아멜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소름이 끼치도록 차가운 얼굴을 하고 그들을 바라봤다.

그중 두어 명은 거꾸로 매달린 채 오줌을 지렸다. 카일은 악취에 인상을 쓰며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바네사. 내 아내가 이들에게 어떤 모욕을 당했지?”

“마님이 다시 다이앤 영애로 돌아온다면 어떻게든 한 번 해보겠다고 한 게…… 제일 왼쪽 놈이었던 것 같아요.”

푹―!

그의 검이 가차 없이 박혔다. 바네사가 친 빛의 장막 때문에 주변엔 피가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아, 죄송해요. 그 말을 했던 건 오른쪽에서 두 번째 놈이었다. 뭐, 그놈이 그놈이니 상관없죠?”

“사, 사, 살려주십시오, 제발…… 귀부인을 모욕한 일을 일평생 속죄하며 살겠습니다. 제발……!”

공중에 매달린 육중한 몸들이 바들바들 떨렸다. 카일은 그들이 뱉은 말을 곱씹다가 건조한 얼굴로 검을 내려두곤 물러났다.

목숨을 건진 줄 알고 기뻐하던 그들이 괴물이라 불리는 차이엘드 공작을 다시 만난 것은 며칠 후, 자신들의 거처에서였다.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황제의 증표를 지니고 수도 근처의 성 몇 개에 쳐들어갔다. 역모를 꾀했다는 죄목 아래, 가주의 방에 있던 모든 서류들이 조사를 위해 반출되었다.

“폐하. 몇몇 귀족들이 불충을 드러내려 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폐하의 충실한 하인인 제가 대신 처리해드릴까 합니다.”

“……자네 일전에 군사들을 평화유지군이라고 부르지 않았었나?”

“제 평화유지군들이 지키는 것은 아멜리아 차이엘드의 평화입니다.”

사방에서 매캐한 연기와 화약,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손발이 묶인 식솔들이 가주에게 애원의 눈빛을 보냈다.

“공, 공작 전하! 이 무슨……! 귀부인을 모욕한 일이라면 그때 끝난 이야기가 아닙니까!”

“말했잖나. 황명이라고. 그리고…….”

그는 무표정으로 검을 한 번 더 휘두르곤 유감이라는 듯 덧붙였다.

“귀부인을 모욕한 건 속죄하는 걸로는 안 돼. 우리 아가도 들었을 테니까.”

검이 한 번 더 커다란 반원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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