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결코 만만한 주인이 아니었다. 그는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였으며, 대부호 가문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지배력을 갖춘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 차이엘드 병원장인 폴 레미안을 바라보는 카일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병원장의 말은…….”
“지금부터 마님께서 무사히 출산하실 때까지 잠자리는 금지입니다.”
“…….”
카일은 애써 수긍의 뜻을 보이려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의 눈빛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기에, 폴은 다시 한번 설명을 시작했다.
“임신 말기의 격하고 잦은 관계는 조산의 위험이 있습니다.”
“격하고 잦은 적 없…….”
“참고로 격하고 잦다는 것은 전하의 기준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질문지에 답변해주신 빈도와 시간은 산모의 입장에서 매우 격하고 잦은 것에 해당합니다.”
“…….”
그렇게 참고 참고 또 참았건만 그것마저 기준 이상이었다. 카일은 억울한 마음이 드는 스스로가 한심해 교회에 가서 회개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 다시. 마님께서는 두 달 뒤에 출산이 예정되어 계십니다. 도감에 나온 것보다 배가 나오지 않은 것은 첫 아이이기 때문이지요.”
폴은 아멜의 건강검진 결과 차트를 조목조목 짚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결과상 큰 문제는 없으나 더위가 길어지고 있어 특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마님께서는 안 그래도 더위에 약하시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
“전하. 송구하오나 이는 동의를 구할 문제가 아닙니다. 안전한 출산을 위한 일이니 협조해주시길 바랍니다.”
침실은 시원한 편이었지만 카일은 철없는 남편이 되고 싶지 않았다.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카일은 절대 그녀를 안지 않겠다 대답했다.
‘참을 수 있어.’
아내는 아이를 열 달이나 품고 있으면서 수많은 불편함을 감수하는데, 욕망을 고작 두세 달 못 참겠다는 건 철없는 소리이리라.
이건 사랑하는 아멜리아 차이엘드와 아가를 위한 일이었다. 카일은 자신의 자제력을 믿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
그리고 정확히 3일 후.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자괴감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병원장에게 아멜을 놔주라고 선고받은 이후로 하루가 억겁보다 길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가 허락한다고 해서 무리한 행동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그야말로 아이에게도, 아내에게도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문제는 믿긴커녕 조금도 발휘되지 않는 자신의 자제력이었다. 지금은 아멜의 짧은 키스만으로도 이성을 잃을 수 있겠다 싶었다.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 심리인지, 병원장에게 아멜을 당분간 푹 재우겠노라고 다짐한 후로부터 갑자기 그녀의 체향이 더 달콤해졌다.
배가 불러온 탓에 잠들 때마다 그녀를 뒤에서 껴안아야만 했는데, 당연하게도 카일은 잠들지 못했다. 안정감 있게 아내를 안아주면서도 제 몸이 닿지 않게 하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었다.
‘……자세가 묘하기도 하고.’
각방을 쓰거나 한 침대 위에서라도 떨어져 자면 될 일이었지만 그러긴 죽기보다 싫었다.
부푼 배를 감싸 안은 제 손 위로 보드라운 아내의 손이 겹치기라도 하면 몸이 단단하게 굳었다. 손을 쓰다듬는 버릇에 대해 진작 이야기를 나눴어야 했다.
가장 힘든 건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마음을 읽는 아레테가 있는 것도 아니라 제 품에 안긴 부인이 웃고 있을지, 그저 얼른 잠들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조금도 힘들지 않기를 바랐지만, 살갗을 비비고 체온을 나누고 싶어 안달이 난 게 저 혼자는 아니길 바라는 마음도 컸다.
‘미쳤군.’
카일은 눈을 잠시 감았다 뜨는 것으로 생각을 지워 내려 애썼다. 눈꺼풀이 닫히는 순간 보여야 할 까만 화면은 온데간데없고, 아내의 녹갈색 눈동자만 아른거린다는 게 문제였다.
“카일, 괜찮아요? 잠깐 졸다 악몽이라도 꾼 거예요?”
카일은 생기 넘치는 음성에 눈을 반짝 떴다. 코앞에 아멜이 눈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차이엘드 공작 부부는 병원장의 조언을 따라 종종 공작저 안을 가볍게 산책하곤 했고, 지금도 산책을 하다 잠시 쉬는 중이었다.
아멜은 장인이 가공한 가죽 의자와 캐시미어 방석을 이젠 제법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카일은 무심결에 생각했다. 편안하게 앉아 있는 그녀의 뒤로 가서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준 다음 새하얗게 드러나는 목선에……
“카일?”
“……!”
카일은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덜컥 놀랐다. 뜨거워진 낯에 대한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바라본 아내는 덥기도 하고, 공작저 안이기도 해서 여름용 얇은 드레스를 입어 몸의 선이 다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상냥하게 웃으며 제 안부를 묻는 붉은 입술을……
“카일?”
“……!”
카일은 망했음을 직감했다. 도무지 착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는 부산한 마음만 들어 당황하는데, 아멜이 손을 잡아주었다.
계속 허브차가 든 잔을 쥐고 있어서인지 그녀의 손은 뜨거웠다. 손끝은 꽃물이 물든 양 불그스름했다. 저 뜨거운 손으로……
‘미쳤군. 이번엔 절대 안 돼. 이상하게 생각하실 게 뻔해.’
카일은 주먹을 꼭 쥐고 잔잔한 바다와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돛이 팽팽히 펴지고, 아무도 없는 뱃머리에서 아내와 단둘이……
툭―
카일은 손에 힘이 풀려 들고 있던 동화책을 떨어트리고야 말았다. 그전까지 이런 것을 들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던 그였다.
카일은 진심으로 좌절했다. 정작 아멜은 왜 그러냐고 물으며 사슴처럼 순진한 눈망울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여지도 주지 않았다. 아내의 눈길과 손길, 목소리를 선정적으로 느끼는 건 순전한 제 탓이었다.
“우리 남편이 왜 이러실까. 열이라도 나나?”
그 와중에 아내는 못난 남편을 걱정해 열을 재 주려 하고 있다. 수천 번도 넘게 저를 쓰다듬었던 손이 이마의 머리카락을 걷어냈고, 아멜은 점점 얼굴을 가까이했다.
“누나. 제발…….”
카일은 이마와 이마를 맞대 열을 재려는 그녀에게 애원했다. 지금쯤 그녀의 뱃속에서 아가가 피식 비웃음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일은 살그미 다가오는 그녀에게 대항력이 없었다. 자제력 앞에 굴복하는 수치스러운 짓을 했다는 자각도 들었으나 이게 최선이었다.
아멜은 흥분했을 때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그의 눈가와 귀 끝을 바라보다 말했다.
“공작 전하께서 몸이 좋지 않으신 듯하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네요.”
그녀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을, 카일은 보지 못했다.
***
사람을 일부러 놀려먹는 건 나쁜 일이었다. 아멜은 자신이 요즘 일상처럼 하는 행동들이 무척 악질적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그런 귀여운 반응을 계속 보이는데 어떻게 그만둬.’
처음에는 그저 장난이었다. 귀부인들과의 티타임에서 우연찮게 한 백작부인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게 시작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와 정을 통했다고 했다. 백작부인은 자책하며 남편의 마음이 변한 것을 진작 알아채지 못한 스스로를 힐난했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며 귀부인들이 흘린 충고가 아멜의 귀를 쫑긋하게 만들었다. 암시 정도로 가볍게 스킨십을 했을 때 상대의 반응을 보라는 것이었다.
마음이 떠났다면 마음은 물론 심장 박동도, 혈기도 동하지 않을 테니 상대의 의중을 알아낼 수 있다고 했다.
‘속마음을 읽는 아레테를 가진 나랑은 관련 없는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튿날, 고용인들을 통해 카일이 금욕을 선언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날 밤엔 정말 아무런 생각 없이 그의 손을 조물거렸다.
그러자 뒤에서 저를 껴안고 있던 그가 움찔하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침 삼키는 소리가 귓가에 훤히 들릴 정도로 동요하는 게 느껴졌다.
「안 돼. 참을 수 있어. 」
「왜 첫날부터 이런 시련이 닥친 건지.」
「……내가 원하는 만큼 누나도 나를 원할까. 그랬으면 좋겠다.」
왜일까. 그의 동요를 들을 때마다 안심이 되었다. 일부러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거나 달콤한 향유를 발랐다. 그의 곁에 머물며 살짝씩 그를 건드렸다.
나쁜 취미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펄쩍 놀라줄 때마다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조금 놀린 것뿐인데……
‘인정하자. 혈기왕성한 남편을 농락하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은 세상에 없어.’
아멜은 악동처럼 웃으며 그가 침실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곧 흰 셔츠의 단추를 꼭꼭 끝까지 잠근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순진한 어린 양을 꾀어내 잡아먹는 늑대가 느끼는 게 이런 희열일까. 아멜은 슬그머니 옆자리로 옮겨 눕곤 저가 누워 있던 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카일이 추울까 봐 자리를 덥혀 놨어요.”
비록 지금은 무더운 여름이었으나 그는 크게 동요했다. 움직이는 목울대를 보며 쾌감을 느끼는 걸 보니 중증도 중증이구나 싶었다.
아멜은 그의 팔을 베고 나란히 천장을 보고 누워 있다, 잠깐 몸을 틀어 굳게 잠긴 단추를 툭툭 풀었다. 예상대로 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덥지 않아요? 잘 때는 편하게 입고 자요.”
“……뒷목에 거품이 남은 것 같아서 헹구고 오겠습니다.”
카일이 후다닥 냉수마찰을 하러 도망갔다. 아멜은 졸린 줄도 모르고 키득키득 웃으며 그를 기다렸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악마가 따로 없었다.
‘오늘은 이쯤 해야겠다.’
곧 카일이 다시 돌아왔다. 그의 곁에 누우니 죽부인 따위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아멜은 시원한 그의 가슴팍을 쓸며 속삭였다.
“사랑해요. 뜬금없는 고백이지만 카일이 언제나 절 원하는 게 좋아요. 저도 같은 마음이고.”
「지금 사랑한다는 말을 해 주면 어떡해.」
「일단 아가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리자. 기다린 다음…….」
「……어쨌든 듣기 좋다. 참긴 힘들지만.」
카일은 속마음을 꾹꾹 참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자 아멜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사랑한다고 말 안 해줄 거예요? 아가가 듣고 싶대요.”
“……사랑합니다.”
“흐음…… 정말?”
“……욕실에 두고 온 게 있어서 다시 다녀오겠습니다.”
아멜은 도주를 시도하는 그를 꼭 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시원한 피부와 폴폴 풍기는 비누 향이 마냥 좋았다.
“카일. 힘들어 보이는데 누나가 도와줄까?”
“……!”
어린 남편 놀리는 게 제일 재미있는 아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