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27화 (127/134)

#11

내 출산 예정일이 임박하자 차이엘드 공작저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차이엘드 병원 소속 의사 대여섯 명이 공작저에서 숙식하기 시작했으며, 바네사는 내가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내가 평소에 그렇게 덜렁댔나?’

이동의 아레테를 가진 클레어는 더했는데, 아예 별궁에서 본궁으로 잠시 거처를 옮기곤 하루의 절반 이상을 나와 함께했다.

부쩍 커진 아가의 태동과 불러온 배를 보면 나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지만 대비가 이렇게 잘 되어 있으니 큰일은 안 나겠구나 안심이 들었다.

“아가야. 곧 만날 수 있겠다.”

작게 중얼거리며 배를 쓸자 아가가 툭 움직였다. 나는 배를 살살 쓸며 다시 펜을 들었다.

임신 중기 즈음, 달달 떨면서 출산일을 기다리면 불안감만 커질 게 분명해 프링글스 사장님께 제안한 일이 있었다.

이 세계의 평범한 시민들은 경제나 경영에 대한 지식이 아예 없는 게 보통이었다. 상인이거나 무역항에서 자란 사람들만 알음알음 전해 듣는 정도였지 체계적인 교과서가 없었다.

해서 기본적인 경제 상식을 예시와 함께 설명하는 쉬운 교과서를 집필하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배웠던 것들을 짜깁기해 한 권으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 세계는 은근히 다른 점이 많았다.

신문을 보며 사례를 정리하고 다양한 경제 이론을 다루는 것은 번거로우면서도 뿌듯한 작업이었다.

‘프링글스 사장님이 이 책을 찍어내 보급하면 뭣도 모르고 주식을 사 전 재산을 탕진하거나 돈을 잃어버릴까 봐 땅에 파묻어두고 위치를 잊어버리는 일은 줄어들겠지.’

부지런히 펜을 놀려 오늘 분의 작업을 완료했을 즈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방문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배를 한 손으로 감싸고 조심조심 내려갔다.

“근처를 지나던 차에 잠깐 들렀단다. 아멜, 몸은 괜찮은 게냐?”

“이이도 참…… 새벽부터 아멜에게 가봐야겠다고 했으면서.”

오늘도 사이가 좋은 다이앤 백작 부부였다. 웃고 있었지만 그들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무얼 걱정하시는지는 뻔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를 낳는 거지 죽으려는 게 아니니까.”

“네가 의연하니 다행이구나. 아멜, 이리 오렴.”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온기에 걱정이 절로 풀어졌다. 그 위로 잠시 손을 얹었던 아버지는 또 눈물이 터지신 건지 눈가를 매만지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

다이앤 백작은 궁상맞게 눈물을 닦으며 잠시 공작저 앞으로 자리를 피했다. 갓 태어난 아멜을 처음 품에 안아본 게 엊그제 같은데, 그 아이가 출산을 앞두고 있다니.

‘기분이 이상하군. 우리 아멜이 잘 견뎌야 할 텐데…….’

한껏 걱정이 들어 또다시 눈물을 콕콕 찍어 닦을 즈음, 멀리서 한 무리의 대신들을 이끌고 돌아오는 차이엘드 공작이 보였다.

“하일드를 제외하고 다들 먼저 들어가 계십시오. 다이앤 백작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예, 전하.”

다이앤 백작은 카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위는 두려움이라는 게 없는 얼굴이었다.

매번 아멜 앞에서 강아지처럼 구는 얼굴만 봐서 잠시 잊고 있었다. 그가 세계를 주무르는 대 차이엘드의 수장이라는 것을.

“공작 전하. 의연하시니 다행입니다.”

“…….”

카일은 지금 당장이라도 장인의 손을 잡고 ‘출산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묻고 싶었다. 병원장의 말로는 며칠 내로 진통이 시작될 거라던데, 경험이 없으니 두려웠다.

하지만 남편 된 자가 벌벌 떨면 아내를 비롯한 여럿이 불안해하리라. 그래서 카일은 젖먹던 힘까지 짜내 침착한 척하고 있던 것이었다.

“다이앤 백작. 제가 특별히 신경 써야 할 것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신경 써야 할 일이라…… 잠시 걸으시겠습니까?”

가볍게 던진 질문이건만 다이앤 백작은 뒷짐을 잡으며 무거운 걸음을 뗐다. 긴장한 카일은 침을 삼키며 그의 뒤를 따랐다. 곧 백작은 뜬금없는 물음을 내뱉었다.

“공작 전하. 제 머리카락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머리카락…… 말입니까?”

카일은 한 번도 세심하게 본 적 없는 장인의 헤어스타일을 눈여겨보았다.

결혼을 일찍 한 그인지라 출산을 앞둔 딸이 있다고 해도 흰머리가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머리숱이었다.

갈색 머리카락은 빽빽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탈모라고 칭하기엔 풍성한 감이 있었다.

“탈모의 조짐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머리숱이 풍성한 것도 아니지요. 전하, 외람된 말씀이지만, 아내와 결혼할 무렵 제 머리는 이보다 배로 풍성했습니다. 일련의 사건을 겪기 전까진 그랬지요.”

사건? 카일은 귀를 쫑긋 세웠다. 누나가 좋아하는 새카만 머리카락을 모두 잃고 대머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제 아내는 아멜을 출산할 때 무려 여덟 시간이나 진통을 겪었습니다. 아내의 어머니도, 아내의 자매들도 모두 그러했지요.”

“……!”

“당시 아내는 고통을 견디기 위해 제 머리채를 잡았습니다. 저는 순순히 머리카락을 내주었지요. 아내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 싶기도 했고, 제 어머니께서 아이란 한 시간 만에 쑥 나오는 것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이앤 백작은 무려 여덟 시간 동안 머리를 뜯겼다. 여덟 시간. 카일은 상상을 초월하는 진통 시간에 움찔 굳었다.

“당시 하일 제국 최신 유행 스타일대로 제 머리카락은 한 뼘 정도 길이였습니다. 아내는 제 머리카락을 야무지게 반 바퀴 감아쥐더군요.”

“…….”

“무슨 이유인지 그때 뜯겨나간 머리카락은 세월이 흘러도 다시 자라지 않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마칠 무렵 카일의 얼굴은 창백했다. 머리채를 잡히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그간 읽어온 많은 책들이 여성의 몸은 보통 어머니를 닮는다고 했다.

‘누나가 여덟 시간 동안 진통을 한다고?’

아내가 고통에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지를 그림을 생각하니 눈앞이 새하얘졌다. 어쩌면 여덟 시간 동안 진통을 하고도 아이를 낳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통은 진통대로 다 겪고 결국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는 사례가 꽤 많다는 것을 폴이 귀띔해주지 않았던가.

“공작 전하. 저는 이만 아멜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저는 잠시 들를 곳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십시오.”

카일은 맥없는 걸음을 옮겼다. 그가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은 차이엘드의 가주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문을 열자 찬란한 빛과 함께 역대 차이엘드 가주들의 초상화가 양옆으로 걸려 있었다.

차이엘드는 친아들들의 계승 전쟁을 통해서만 후계자를 선정해왔으니 이들은 모두 자신의 조상인 셈이었다.

카일은 1대 차이엘드 공작의 초상화 앞에 서 시선을 두발에 빤히 고정했다. 얼굴은 오십 대 정도로 보였지만 새카만 머리카락은 놀랍도록 풍성했다.

‘……가발은 아니겠지.’

의구심에 2대, 3대를 비롯한 모든 차이엘드 공작들의 두발을 본 후에야 가발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카일은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 서서 제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제 손으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이리저리 들춰보자 풍성한 모발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셋째까지는…….’

그는 무심결에 한 생각을 헙 삼켰다.

***

며칠 후. 차이엘드 공작저는 예정된 비상상태에 돌입했다. 책상에 앉아 펜을 놀리던 아멜이 진통을 호소했기 때문이었다.

태어난 아기를 확인할 차이엘드의 귀족들과 다이앤 백작 부부에게 연락이 갔다. 상시 대기하던 의료진은 곧바로 조치를 시작했다.

진통 간격이 긴 처음에는 어느 정도 여유를 부린 그녀였지만, 곧 식은땀이 나고 표정이 일그러졌다.

“카일…… 윽!”

아멜은 침대 시트를 줴뜯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출산을 위해 마련된 방에 따라 들어가려던 카일은 입구에서 저지당했다.

“전하. 뒷일은 저희에게 맡겨 주시고 바깥에서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누나 님과 아가 님은 괜찮으실 겁니다.”

병원장의 얼굴은 어딘가 급한 감이 있었기에 카일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문 바로 바깥에 놓인 의자에 앉아 아멜이 지르는 비명을 듣고 있자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주먹을 꽉 쥐고 있음에도 몸이 떨리고 침착함을 잃어갔다.

차라리 아내의 옆에 꼭 달라붙어 머리채라도 내줬으면 이렇게 불안하진 않았으리라. 방 안에 들어간 의료진들이 웅성거릴 때마다 뱃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카일…… 아흑……!”

아내의 비명에는 간간이 섞여 있는 제 이름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덜컥 멎었다. 비명과 밀려드는 혼란함 속에 어쩔 줄 모르는 카일의 손을 다이앤 백작 부인이 잡아주었다.

“아멜은 강한 아이예요. 괜찮을 테니 공작 전하께서도 마음 굳게 먹고 자리를 지켜 주세요.”

“……알겠습니다.”

카일은 옆을 슬쩍 바라보았다. 다이앤 백작 부인처럼 따뜻한 말을 건네주리라 예상했던 다이앤 백작은 이미 눈물 콧물을 다 흘리며 혼비백산이었다.

아멜이 또 한 번 고통에 몸부림치자 두 남자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을 초조하게 서성였다.

진통이 시작된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넘었을 뿐이다. 앞으로 일곱 시간이나 더 누나가 고통을……

“응애―!”

“……!”

카일은 물론이고 로비를 꽉 채우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아기 울음소리만이 또렷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누나 님.”

“마님, 고생하셨어요……!”

긴박한 소음이 끊이지 않던 방 안도 긴장이 풀린 게 느껴졌다. 카일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가 찬찬히 내뱉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살짝 열렸다. 병원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카일에게 다가왔다.

“차이엘드 공작 전하. 귀한 공주님을 얻으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

커다랗게 확장된 카일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는 문을 열고 아내가 있는 방으로 조심히 들어갔다.

“카일…….”

자그마한 핏덩이를 품에 안은 아멜은 무척이나 지친 얼굴이었다. 식은땀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었으며 호흡도 조금 빨랐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때보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카일은 곧장 그녀에게 다가가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머리카락을 정리해준 다음 조심히 아내를 끌어안고 보듬었다. 눈을 마주하자 긴장이 사르르 풀려 실없는 소리가 나왔다.

“누나, 조금 늦었지만 머리채 잡으시겠습니까?”

아멜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푸스스 웃으면서도 한 손으로 카일의 머리채를 꽉 쥐었다 놓았다.

이례적으로 진통이 짧았길래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남편을 대머리 독수리로 만들었으리라.

「……진짜 잡으시는 걸 보니 정말 힘드셨나 보군.」

아멜은 픽 웃으며 그의 머리를 다시 매만져주었다.

“카일. 절 가장 먼저 위해주는 건 좋은데 우리 아가한테도 관심 좀 가져줄래요? 처음 듣는 아빠 목소리가 머리채 잡겠냐는 말이긴 했지만…….”

아멜은 흰 천에 싸인 아가를 카일에게 내밀었다. 탯줄을 갓 자른 아가는 불그스름하고 쪼글쪼글했다. 결코 예쁜 모습이 아닌데도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이렇게 예쁜 아기는 처음 봅니다.”

카일은 한동안 아기를 품어 안고 지그시 바라봤다. 방금 세상에 나온 아이는 작았다. 그런데도 이 작은 몸속에 심장이 뛰었고, 앙증맞은 이목구비와 손발도 있었다.

압도될 정도로 크나큰 감동 앞에서, 그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뿐이었다.

“부인, 사랑합니다. 이제 가족이 세 사람이 된 게…… 믿기지 않습니다.”

카일은 아가를 조심히 껴안은 채 몇 번이나 더 사랑을 속삭였다. 아멜도 한동안 그의 손을 꼭 잡고 온기와 맥박을 느꼈다.

사랑의 결실을 품에 안은 차이엘드 공작 부부는 오늘도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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