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차이엘드 영애가 세상에 나던 날, 차이엘드 공국에는 참으로 많은 일이 일어났다.
고아원에는 고기와 치즈, 빵과 우유가 보급되었으며 노숙자들은 다가오는 추위를 대비할 외투와 따뜻한 수프를 받았다.
공국 내의 모든 광장은 차이엘드 2세의 탄생을 축하하는 가렌더를 장식하고 특보를 나눠주었다. 축제를 위해 즉시 바비큐와 폭죽, 종이꽃이 배달되었음은 물론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죄를 저지른 생계형 범죄자들이 특별 사면되었고 아가의 생일이 된 10월 10일에 맞추어 1010명의 병사들이 특별 유급 휴가를 받았다.
‘누나 님이 태어나셨을 때 128명에게 휴가증을 뿌린 다이앤 경은 약과였군.’
하일드는 허허 웃으며 고용인들에게 특별 보너스가 두둑이 담긴 돈 봉투를 나눠주었다.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이라면 모두 아가 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있었지만, 돈 봉투를 받는 순간에는 축하하는 마음이 절정에 이르렀다.
“아가 님께서 건강하시길.”
“마님이 얼른 몸을 회복하시길.”
역시 진심을 움직이는 데에는 돈 만한 것이 없었다.
황궁에 드나드는 공작의 하수인들에게는 조금 더 두둑한 돈 봉투와 정체불명의 서류가 함께 지급되었다.
“자네들은 어서 가서 이 서류를 황제 폐하께 전하게.”
“하일드 님, 이게 뭡니까?”
“공작 전하의 육아 휴직 신청서네.”
하일 제국의 역사에 육아 휴직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고용인들은 사명감을 띠곤 곧바로 마구간으로 향했다.
잠시 후,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득녀를 축하한다는 황제의 친서와 함께 제국 최초로 육아 휴직을 받은 남자가 되었다.
***
“으음…….”
깊은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일은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나는 들려오는 멜로디에 청각을 집중했다.
‘오늘은 다시 아멜리아 송가구나.’
아가를 낳은 지 어언 열흘. 이젠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웅장한 음악을 들으며 일어나는 게 일상이 되었다. 나는 일어났다는 것을 알리려 창밖으로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오늘 연주도 감사해요. 덕분에 기분이 산뜻하네요.”
“누나 님! 아침 공기가 차가우니 부디 창문을 열지 마십시오. 오늘도 아침을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정말 날씨가 쌀쌀해 침대로 다시 들어가려는데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배에 손을 얹고 아가의 방으로 향했다.
“마님, 마님! 숄이라도 두르고 가시지, 몸 상하시면 어쩌시려고……!”
“고마워요, 바네사. 카일은 아가 방에 있죠?”
“네, 거기서 나오실 생각을 안 하세요.”
나는 고용인들에게 검지로 입가를 가려 보인 뒤 살금살금 아가가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카일이 아가가 누워 있는 흔들 침대를 아주 작게 흔들어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찌나 경건한 자세인지 기도를 한다고 해도 믿으리라.
‘아무리 옆에서 기다려도 열여섯 시간은 잔다니까.’
예전에 어디에선가 어항을 바라보는 고양이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TV를 보는 것처럼 고양이가 네모난 어항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물고기를 보며 눈을 반짝이는 사진이었다.
요즘 카일의 상태가 딱 그랬다.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는 아가가 깨어났을 때의 모습을 보려 거의 항상 아가의 침대를 지켰다. 그런다고 깨어날 리 없는데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는지 아이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망울엔 항상 웃음이 서려 있었다. 어쩌다 깨어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세상을 다 가진 얼굴을 했다.
“이클릿…….”
내가 온 것을 모르는지 그가 아가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세상 다정한 모습에 얼굴이 절로 풀어졌다.
이클릿은 이 세계의 고어로 빛이라는 뜻이었다. 클레어의 이름과 같은 뜻이기도 하고, 발음도 비슷해 지어준 이름이었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다 보면 남남처럼 지내는 클레어와 카일도 사이가 조금씩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면서.
참고로 클레어는 내가 아이를 낳은 다음 날, 여행 가방 여러 개를 들고 울먹이며 내 앞에 나타났다.
“아멜. 산후 우울증에 걸리는 가장 큰 이유가…… 시누이래. 그러니까 나는 이만 사라져줄게…… 흡, 아가랑 같이 건강하고…… 부디 행복하게…….”
“무슨 소리예요, 언니! 우리 아가 이름도 이클릿이라고 지었는데!”
나중에 이유를 듣고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클레어의 양손을 꼭 잡고 언니가 내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한 시간 동안이나 설파했다.
“우웅…….”
내가 딴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이클릿이 작게 옹알거렸다. 정말 작은 소리였으나 카일은 이클릿 쪽으로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했다.
마치 ‘방금 아빠 부른 거니?’하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딸의 반응을 원하는 모습이 미칠 듯이 귀여워서 나는 결국 그에게 손을 댔다.
“애 아빠가 이렇게 귀여우면 어떡해요, 응?”
“누나, 일어나셨습니까?”
카일은 소곤소곤 말하며 일어나 나를 뒤에서 꼭 껴안았다. 행복에 찬 그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어떻게 이렇게 귀여울 수 있지? 자는 것도…… 세상에. 방금 입술이 살짝 움직였어.」
「숨 쉬는 것도 사랑스러우면 아빠는 어떻게 일을 하라고…… 맙소사. 방금 손가락을 움직였어.」
「누나를 조금 더 닮았다면 좋았을 텐데…… 말도 안 돼. 방금 얼굴을 움직였어.」
카일은 아가가 살아 움직이는 게 무척 신기한 모양이었다. 자그마한 반응에도 깜짝깜짝 놀라 저 사랑스러운 것 좀 보라는 듯 나와 눈을 마주했다.
물론 나라고 해서 아가의 반응에 초연한 것은 아니었다. 내 눈에도 우리 아이는 무척이나 귀여웠다.
차이엘드의 피를 이어받아 흑발에 적안이었으나 카일은 아가의 솜털만큼 난 머리카락이 날 닮아 곱슬거린다고 주장했다.
‘내 눈엔 아가 머리카락도 잘 안 보이는데…….’
이클릿은 유모들도 놀랄 만큼 순해 나와 카일을 깜짝 놀라게 했는데, 카일은 그 점도 나를 닮은 것 같다고 했다. 사람을 경계하지 않아 나중에 아빠 마음을 아프게 할 것 같다나.
아무튼, 외적으로 아가는 나보다 카일을 닮아 있어서 나는 둘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보면 괜히 웃음이 나왔다. 둘 다 귀여워.
“카일. 이리 와 봐요.”
나는 카일에게 보여주듯 검지를 세우곤 반쯤 벌어진 아가의 작은 손에 조심스레 얹었다. 그러자 아가가 스르륵 내 손가락을 감아쥐었다.
“……!”
“귀엽죠?”
카일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아가의 반대쪽 손에 제 손가락을 얹었다. 자그마한 손이 손가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자 황홀경에 빠진 모습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지.」
「우리 이클릿…….」
「어떡해…… 너무 사랑스러워.」
「이 애를 두고 내가 어딜 가.」
이클릿이 양손으로 카일과 내 손가락을 하나씩 잡고 있어서인지 카일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이건 조금 신기한데.
출산 직후, 나는 아레테를 이용한다면 이클릿의 속마음을 읽어내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척척 깨닫는 육아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갓 태어난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단어나 형상과 연결할 줄 몰랐다. 그러니 들려오는 것은 카일의 속마음뿐이었다.
「……벌써 둘째 아이가 갖고 싶은데 어떡하지.」
「안 돼. 누나가 몸을 회복할 때까진 참을 수 있어. 부인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 보고 결정해야 해.」
「아가가 둘이면 두 배로 귀엽겠지…….」
「한심한 생각이군. 아직 부인이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 끝냈는데.」
「나도 두 아이 아빠…….」
벌써 일주일째 지속되고 있는 내적 갈등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나는 카일의 머리카락을 슥슥 쓸어보곤 말했다.
“음…… 이 정도면 셋째까진 괜찮겠는걸요?”
“……!”
카일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가을인데 어디선가 봄꽃이 피어나는 그림이 보인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라, 나는 시선을 슬쩍 피하며 덧붙였다.
“물론 카일이 아내를 사랑해줄 때의 이야기…… 읍.”
곧바로 입을 맞춰 오는 걸 보니 괜한 말을 덧붙인 것 같다.
***
카일은 침대에 오르자마자 기절하듯 잠든 아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산후조리에 가벼운 요가가 좋다고 하여 강사를 붙여주었는데 무척 열심히 하는 것을 보니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무리하시면 안 되는데.’
아멜이 짧은 요가 수업을 듣는 동안, 카일은 유모들을 불러다 아이를 키우는 데에 유용한 기술들을 배우곤 했다.
예를 들면, 커다란 속싸개로 아기를 돌돌 싸매는 일 같은 것.
“…….”
마침 아내가 새하얀 이불에 누워 있지 않은가. 학구열 가득한 학생인 카일은 실습의 욕구를 느끼곤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실습한 대로 척척 이불을 접어 아내를 싸매기 시작했다. 너무 느슨하게 싸면 안 된다고 했으니 배운 대로 제법 짱짱하게 마무리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짱을 끼고 이불에 핫도그처럼 돌돌 말린 아내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얌전히 누워 있는 것을 보니 숨이 턱 멎었다.
‘이클릿이 엄마 닮아서 귀여운가 보다.’
카일은 침대 위로 올라가 번데기처럼 말린 아멜을 껴안았다. 나중에 꼭 아가를 싸매 아멜의 옆에 나란히 두고 싶었다.
‘아가가 누나를 조금만 더 닮았어도 좋았을 텐데.’
아멜은 저를 닮았다며 무척 좋아했지만 카일은 조금 아쉬웠다. 이클릿은 유독 저만 빼닮았다.
‘지금도 너무 귀엽지만 엄마를 조금만 더 닮았으면. 이렇게 예쁜데…….’
그가 아내를 향한 넘치는 애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뺨에 입술을 갖다 댈 즈음이었다.
누군가가 계단을 다급히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한둘이 아닌 것으로 보아 큰일이 난 모양.
카일은 본능적으로 그들이 저를 향해 오고 있음을 알아채곤 방문을 열었다. 모두가 아가의 방에 배정된 자들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공작 전하! 당장 아가 님께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헉, 헉…… 아가 님께서, 아가 님께서……!”
카일은 숨죽이고 그녀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말아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입술이 바싹 마르던 그 순간.
“아가 님께서, 누나 님과 똑같은 보조개를 가지고 계십니다!”
“……!”
차이엘드 공작령의 이클릿 탄신 축제가 일주일 더 연장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