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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29화 (129/134)

#13

카일은 등에 쿠션을 대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다음 갓 목욕을 마치고 나온 딸을 품에 안았다. 베이비파우더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이클릿.”

카일은 아이의 이름을 작게 발음해보았다. 세상에 난 지 한 달밖에 지나지 않은 몸이 제 가슴팍에 찰싹 달라붙어 규칙적으로 움직일 때마다 평화가 찾아왔다.

카일은 제 것과 똑같은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는 이클릿을 간질이며 물었다.

“이클릿. 목욕하니까 기분이 좋습니까?”

“꺄―!”

“이클릿…….”

카일은 항복 선언을 하듯 이클릿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웃을 때면 아멜과 똑 닮은 보조개가 푹 패는 것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보송보송하게 난 머리카락도 누나를 닮아 구불거리는 것 같다. 그의 눈가에 절로 흐뭇한 웃음이 피었다.

“카일. 그렇게 좋아요?”

카일은 옆에 누워 질문을 던진 아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클릿 목욕 작전에 함께 투입된 그녀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으면서도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지금 이클릿이 보이는 보조개와 똑 닮은 것이 아멜의 얼굴에도 드러났다. 카일은 강렬한 햇빛처럼 내리쬐는 행복감에 어쩔 줄 몰랐다.

「으아아…….」

「보조개가 두 쌍이면 두 배로 행복해지는구나.」

「둘 다 예뻐서 어떡하지.」

이렇게 사랑스러운 둘을 오늘 저녁, 모두와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 슬프게 느껴질 정도였다. 모두라고 해 봤자 가까운 지인들일 뿐이지만.

오늘 저녁, 차이엘드 공작저에서는 가벼운 만찬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목적은 물론 세상에 열심히 적응하고 있는 이클릿 차이엘드를 인사시켜 주는 것이었다.

다이앤 백작 부부와 바네사를 포함한 아멜의 지인들, 카일이 초대한 소수의 사람들이 초대장을 받았다.

‘어떡하지. 이렇게 귀여운 걸 세상 사람들이 알면 다 데려가려고 할 텐데.’

카일은 심각하게 고민하며 이클릿과 아멜을 품어 안았다. 소중한 두 여자에게 누군가가 손을 대려 한다면……

“카일. 세상은 뭐라고 했죠?”

“사랑과 평화입니다.”

아멜은 오늘도 깔끔하게 파멸의 싹을 잘라냈다.

***

자고 일어난 아멜은 만찬 준비가 한창인 로비를 거닐다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코델리아. 못 보던 얼굴들이 많네요?”

하일드와 함께 차이엘드 공작저를 돌보게 된 코델리아는 인자한 미소를 띠며 답했다.

“이클릿 님이 태어나시고 얼마 후, 공작 전하께서는 나이가 차 고아원에서 내쫓기기 직전인 자들을 고용하라 명하셨습니다. 저들은 그 일을 계기로 공작저에서 일하게 되었지요.”

“카일이 그런 일을 했나요?”

“공주님의 탄생을 보고 생명과 사랑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신 듯합니다.”

“잘됐네요. 일이 손에 익을 때까지 코델리아가 잘 돌봐주세요.”

아멜이 말을 마친 그때였다. 무언가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그곳으로 향한 그녀는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새로 온 어린 고용인이 실수로 차이엘드의 가보를 깨부순 모양이었다.

‘저건…… 전전대 차이엘드 공작이 손수 만들었다는 금 촛대잖아?’

부서진 촛대의 파편들이 튀어 바닥과 유리창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촛대 자체도 완전히 망가져 쓸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보물의 값어치를 아는 고용인들은 놀라 말을 잇지 못했으며 촛대를 실수로 넘어뜨린 당사자는 벌벌 떨며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아멜은 그 모습에 인상을 찡그렸다.

‘나도 처음 아르바이트할 때는 서툴렀었지.’

그때 괜찮다고 감싸준 사장님이 아니었다면 아마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아멜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코델리아. 저 아이의 이름이 뭐예요?”

“레나입니다. 열다섯 살이지요.”

아멜은 반쯤 정신이 나간 레나에게 다가갔다. 바닥이 날카로운 조각투성이인데도 레나는 주인마님의 앞에 무릎을 꿇으려 했다.

“레나. 그러지 말아요. 안 다쳤어요?”

“죄,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다치지 않았다면 괜찮아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도 있으니까.”

아멜은 레나의 머리를 쓸어준 뒤 코델리아에게 보냈다.

“레나가 놀랐을 테니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마시게 하세요. 아직 만찬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준비는 다시 하면 돼요.”

“마님, 촛대는…….”

때마침 파열음을 들은 카일이 사건 현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멜은 레나에게 걱정 말라는 듯 짧게 웃어주었다.

“무슨 일입니까.”

카일이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용인들을 바짝 긴장하게 할 정도로 차가운 음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다. 웃음기라곤 없이 낮게 깔린 살벌한 목소리로 조목조목 혼낸 다음 최소 근신 처분이나 해고 통지였다.

“죄송해요, 카일…… 제가 돌아다니다가 실수로 촛대를 깨트렸어요.”

“촛대가 나쁩니다.”

그러나 그는 아내에 관한 한 한없이 관대해지는 남자였다. 사람이니까 당연히 실수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누나.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응. 미안해요.”

“고작 저런 것 때문에 제게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촛대를 진작 옮기지 않은 제 잘못입니다.”

게다가 실수를 자신에게 수습해달라고 부탁하는 누나라니. 이건 자신을 남편으로 생각하고 도움을 구한다는 뜻이었다.

‘당연한 일인가. 난…… 이제 누나와 아이까지 둔 남편이니까.’

사랑의 결실을 떠올린 그의 입가가 자부심 가득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가 곤란한 얼굴을 하며 이것저것을 부탁할 때마다 카일은 차이엘드의 넘치도록 막대한 부가 이 순간을 위해 축적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원래 재물의 타락성을 경멸했지만 아멜이 돈을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부터 자신의 경멸은 사소한 감정 취급했다.

“미안해요, 카일. 할아버님이 만드신 거라고 들었는데……”

“전전대 공작이라면 얼굴도 본 적 없습니다. 사이도 별로 안 좋았을 테고.”

카일은 조상을 빠르게 배신했다. 그는 지금 촛대가 부럽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자리를 지날 때마다 아내는 촛대를 생각할 테니.

“그보다 파편에 긁힌 상처가 있는지 확인해야겠습니다.”

그는 뻔뻔하게 말하곤 아멜을 안아 올렸다. 방으로 가 새하얀 발목에 났을지도 모르는 미세한 상처를 찾아봐야 했다.

자고로 파편이란 어디로 튈지 모르기 마련. 그는 꼼꼼히 아내의 살결을 확인해줄 생각이었다. 아직 손님이 오기까지 시간도 넉넉했다.

공작부부가 자리를 뜬 후, 노련한 고용인들은 손바닥 뒤집듯 변하는 카일의 태도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역시 마님께서는…….”

“아가 님의 성정이 누굴 닮아 온화한가 했더니.”

상대는 누나 님이었으니까.

***

만찬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대망의 시간이 다가왔다.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갈 즈음 아멜과 카일이 속싸개에 돌돌 말린 아이를 안고 내려온 것이다.

얼굴만 빼꼼 나온 이클릿을 본 모두가 작은 감탄사를 흘렸다.

“어쩜…… 요정처럼 귀여워요!”

“가만히 있을 땐 공작 전하를 쏙 닮았는데, 웃는 걸 보니 부인과 판박이네요.”

카일은 건드리지 말고 눈으로만 보라는 무언의 압박을 풍기며 좌중을 한 바퀴 돌았다. 모두가 소심하게 손만 흔드는 가운데, 우람한 팔 두 개가 뻗쳐 왔다.

“이클릿. 이 할애비 품에도 안겨 보고 싶지 않으냐?”

이미 손녀의 눈웃음에 흐물흐물 녹은 다이앤 백작이었다. 카일은 이클릿을 꼭 안고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꺄―!”

하지만 이클릿은 할아버지를 알아보기라도 한 것인지 눈을 반짝였다. 카일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갔다.

‘아가가 누나를 닮아서 너무 영특해. 벌써 할아버지를 알아보다니…….’

카일은 하는 수 없이 장인어른에게 딸을 넘겨주었다. 이클릿은 널찍한 품이 편안한지 작게 방싯거렸다.

충실한 집사장 하일드는 허허 웃으며 절대 꺼내지 말았어야 할 말을 내뱉었다.

“다이앤 경의 품에 안기니 아가 님께서 한결 편하신가 봅니다.”

“……?”

곧 차가운 카일의 시선이 하일드를 콕콕 찔렀다. 한결? 그렇다면 아빠한테 안겨 있던 방금까진 덜 편했다는 이야기인가?

힐긋 본 장인어른은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카일은 엉큼한 사위 타이틀은 받아들일 수 있어도 부족한 아빠 타이틀은 견딜 수 없었다.

“이클릿. 아빠 볼까?”

상냥하게 말한 카일이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곤 활기차게 양손을 벌리며 말했다.

“까꿍!”

전직 괴물 공작의 발랄함에 몇몇 손님들이 경악했다. 도전장을 정면으로 받은 다이앤 백작 또한 총기사단장다운 승부욕으로 눈을 빛냈다.

“공작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저는 이미 아멜을 훌륭하게 키워낸 몸입니다.”

‘경험의 차이가 크니 도전은 그쯤 하시지요’하고 넌지시 말한 그는 품에서 앙증맞은 비장의 무기를 꺼내 살랑 흔들었다.

딸랑―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나자 이클릿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이앤 백작은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딸랑이를 얄밉게 흔들어 보였다.

“다이앤 백작, 그건…….”

“아멜이 어릴 적 좋아하던 딸랑이입니다. 오직 저만이 구할 수 있는 물건이지요!”

카일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클릿은 타들어가는 아빠 마음도 모르고 딸랑이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게다가 장인어른의 품은 평소보다 배로 펑퍼짐했다.

“우리 손녀. 이것도 보겠니?”

“우아―!”

페르슈 다이앤의 품속에서는 아기의 관심을 끌 만한 장난감이 화수분처럼 나왔다. 맞춤형 선물 공세라니. 카일은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물량 공세로는 질 수 없는 남자였다.

그는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딸에게 잘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이의 덜 발달된 시각으로 봐도 근사한 얼굴이었다.

“이클릿. 갖고 싶은 게 있습니까? 아빤 이클릿이 갖고 싶은 거라면 뭐든 줄 수 있는데.”

그러니 저런 딸랑이에 넘어가지 마.

하지만 카일의 깊은 속을 알 리 없는 이클릿은 요상한 옹알이만 계속할 뿐이었다.

“따아!”

그는 민첩하게 반응했다.

“땅?”

“가아아!”

“강도 갖고 싶습니까?”

“구우우!”

“궁전도?”

카일은 해맑게 웃으며 딸의 주문들을 외웠다.

“땅과 강이라니…….”

“차이엘드는 대체…….”

그를 제외한 모두가 차이엘드식 선물의 스케일에 전의를 상실했음은 물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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