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30화 (130/134)

#14

나는 다시 판판해진 배를 쓸어보았다. 출산이 몸에 남기는 여파는 상당했다. 한동안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 곳곳이 쑤셔 신음을 삼켜야만 했다.

피로도 상당해서 산후조리에 필요한 운동 이상을 하지 못하고 잠을 자며 체력을 보충했다. 아이를 돌봐줄 사람들과 카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아가도 유달리 얌전하고.’

배부른 소리인 것을 알지만 이렇게 사는 것도 나름의 답답함이 있었다.

행동반경이 좁아지고 이전과 달리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져 자존감이 쭉쭉 깎여나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나는 침대에서 가뿐히 몸을 일으키며 내 몸이 완전히 돌아왔다고 확신했다. 출산 후 8주나 지났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외출하고 싶다!’

나는 걱정 가득한 카일의 허락을 받아내기 위해 다시 침대에 누웠다. 밤늦게까지 이클릿이 숨 쉬는 것을 구경하던 카일이 무척 행복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나는 그의 귓가에 대고 조심스레 속삭였다.

“여보.”

“……!”

카일이 눈을 번뜩 뜨고 ‘이게 꿈이야 생시야’하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자고 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빠른 반응.

“누나, 지금 저를 부르신…… 아니,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잘 못 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만 그렇게 불러주시면 안 됩니까?”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말이었지만 나는 기꺼이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여보.”

“……네, 부인.”

“여보오…….”

약간의 콧소리를 섞어 말하자 카일은 어쩔 줄을 모르다 새빨개진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 나는 카일을 와락 껴안은 다음 속삭였다.

“저 오늘 잠깐 어디 좀 다녀와도 될까요?”

“어디든 좋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함께 거닐기 좋을 테니까.”

역시나 이번에도 카일은 같이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산뜻하게 웃으면서 내 몸 안에 저장된 애교를 싹 긁어모아 말했다.

“으음, 아니에요. 여보는 여기 이클릿이랑 계시고, 저는 혼자 광장에 다녀올래요.”

“알겠습니다. 저는 여기 이클릿이랑 계시고…… 혼자?”

잠시 홀린 듯 내 말을 그대로 따라 하던 카일이 퍼뜩 놀랐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이었다.

“공작저에만 있으려니 답답해서요. 응?”

“왜 같이 안 가시고…….”

쿠궁. 카일은 말을 하다 말고 멍해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보니 내 마음 좀 들여다보소, 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한 것 같았다.

「설마, 설마…… 나랑 함께 다니기 싫으신 건가.」

“울 것 같은 얼굴 하지 말아요. 그런 거 아니니까. 사람은 가끔 혼자 보내는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누나가 혼자 돌아다니시다 다치시기라도 하면 나는…… 차이엘드와 우리 아가는…….」

“바네사랑 같이 갈…… 카일?”

카일은 주섬주섬 옆에서 자고 있던 아가를 안아 보였다. 갑자기 들어 올려진 이클릿은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우웅……?”

“누나. 이렇게 예쁜 우리 이클릿을 봐서라도…….”

“카일. 제가 외출을 한댔지 언제 이혼을 하자고 했…… 미안해요. 방금 말은 그냥 예시였어요. 진심이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았으니 그런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 하지 말아요.”

“…….”

“요즘 잡지를 너무 읽어서 그런가? 마음에도 없는 말이 자꾸 나오네……. 역시 같이 나가는 게 좋겠죠? 우리는 부부니까.”

나는 처연한 얼굴로 이클릿을 껴안는 카일을 살살 달랬다. 아무래도 혼자 외출하기는 그른 것 같다.

***

금세 기분이 좋아진 카일은 거대한 마차를 불러 부인과 아이가 함께하는 외출을 준비시켰다. 오랜만의 외출 준비에 고용인들의 기분이 덩달아 산뜻해졌다.

마차에 오른 카일과 이클릿이 얌전히 아멜을 기다리는 동안 마차 밖은 소란스러웠다.

“이봐. 쿠션은 넣었나?”

“물론. 아가 님께 필요한 물품들도 모두 챙겼겠지?”

“비상시에 필요할지도 모르는 무기도 넣어두었고…….”

“혹시 모를 상황에도 대비하는 게 좋겠군.”

어느새 외출 마차에는 카일과 아멜, 아가가 일주일 동안 먹을 만큼의 비상식량이 실리게 되었다.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바네사는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여간 차이엘드 사람들은 여전히 마님에게 미쳐 있다니까. 이렇게 크고 푹신푹신한 마차에서 다쳐봤자 얼마나 크게 다친다고.’

바네사는 심드렁한 얼굴로 공작부인을 기다렸다. 잠시 후, 오랜만의 외출에 들떠 볼을 발갛게 상기시킨 아멜이 사뿐사뿐 달려왔다.

바네사는 그만 거품을 물고 쓰러질 뻔했다.

“마님! 구두도 오랜만에 신으신 분이 그렇게 뛰시면 어떡해요! 출산하신 지 두 달밖에 안 지나셨잖아요!”

“두 달이나 지났잖아요. 너무 과보호하지 말아요. 여긴 푹신한 잔디밭이라 넘어져도 별로 안 다쳐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마님이 넘어지셔서 잔디에 베이기라도 하시면 전…… 잠시만요! 계단이 높으니 제 무릎을 밟고 올라가세요. 지금 꿇을게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아멜은 싱긋 웃어주곤 제힘으로 마차에 올랐다. 곧 마차가 출발했다.

오늘 외출의 목적지는 하일 타임스 건물이었다. 아멜이 그간 집필한 경제 교과서의 초판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멜은 창문을 활짝 열고 무르익은 오후의 공기를 들이쉬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마차의 속도는 조금 느렸지만 오랜만에 마시는 공작저 바깥의 공기는 달콤했다.

이클릿을 안아 들고 바깥의 조형물들을 설명해주던 아멜은 금방 지쳐 수면욕을 느꼈다. 아무래도 출산 후, 체력이 바닥이 된 듯했다.

그래서 잠깐 자도 되냐고 물으려 했건만. 뒤를 돌아보니 카일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카일? 할 말이라도 있어요?”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 말투.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니라면 뭐……’하고 넘어갔겠지만 아멜에게는 오해를 사전에 차단하는 아레테가 있었다.

“손 이리 줘요.”

“싫습니다.”

카일은 완강한 거부 의사를 표현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해 상황을 방치할 아멜이 아니었다. 그녀는 구두코로 카일의 구두를 톡 건드렸다.

「누나가 왜…… 몰라주시지.」

「할 말이 있냐니.」

「그렇게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

「키스하고 싶어서 다가갔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잖아.」

미치겠다. 아멜은 창밖을 보는 척 몸을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진지한 얼굴로 조심조심 다가와서 무슨 생각을 하나 했더니.

‘귀여워……!’

아멜은 푸스스 웃으며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무척 빠른 심장박동이 그녀의 기분을 한층 즐겁게 했다.

‘몸도 회복되었다고 했으니까.’

아무래도 오늘 밤은 그냥 넘기기 힘들 것 같았다.

***

“공작 전하께서 친히 방문해주시어 영광입니다! 이분이 대 차이엘드의 귀여운 2세…… 윽!”

카일과 아멜을 보고 반갑게 인사하던 프링글스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클릿이 둥그렇게 말린 그의 수염을 잡아당긴 탓이었다.

“죄송해요, 사장님. 이클릿, 그러면 안 돼. 어서 놓아드려.”

프링글스는 차이엘드의 2세를 사로잡기 위해서라면 수염이 아니라 수족도 희생할 수 있는 사업가였다.

하지만 이클릿은 재미난 것을 가지고 놀 수 없다는 사실에 무척 상심한 듯했다.

“흐잉…….”

이클릿은 아쉬운 듯 손을 쥐었다 폈다. 아멜은 아이를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러자 이클릿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유달리 순한 이클릿은 한 번 울기 시작하면 그칠 줄을 몰랐다. 아멜과 카일은 본능적으로 소란이 일 것을 예상했다. 그의 동작이 조금 더 빨랐다.

“이클릿은 제가 달래고 올 테니 이야기 나누고 계십시오.”

카일은 능숙하게 이클릿을 안아 들곤 자리를 비웠다. 너무도 빠른 동작이었던지라 아멜은 그와 함께 나가지 못했다.

배려에는 사랑으로 갚아주면 되는 법. 아멜은 경제 교과서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기 전, 잠시 바네사를 불러 귀엣말을 했다.

“그런 아레테가 깃든 물건도 있어요?”

“있긴 한데…… 필요하세요? 두 분 상태를 생각하면 저언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데?”

“얼른 가져오세요. 아레티스트 건물이 이 근처잖아요.”

바네사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히며 몰래 건물을 빠져나갔다. 아멜은 그녀를 기다리며 여유롭게 교과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신경 써 제작한 경제 교과서는 판형과 종이의 질, 글씨의 크기까지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아멜은 소장용으로 몇 권을 챙긴 뒤 말을 이었다.

“책은 넉넉하게 찍어 민간에도 무료로 배포하는 게 좋겠어요. 프링글스 사장님도 힘써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특히 고아원과 학교, 어린아이들이 많이 일하는 곳 중심으로 배포했으면 좋겠어요. 저도 제 선에서 최선을 다할게요.”

프링글스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면서도 궁금증을 숨길 수 없었다. 눈앞의 공작부인은 이제 모든 부와 명예를 갖추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돈을 벌어 가난에서 벗어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을 돕고 싶기 때문이에요. 스스로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어요.”

그의 마음을 읽은 아멜이 답했다. 이것은 그녀가 줄곧 원해오던 것이었다.

책은 어려운 투자법이나 성공적으로 자금을 유치하는 방법 등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았다.

그저 연대보증이 무엇인지, 남의 말만 듣고 투자하는 것이 왜 위험한지, 금리가 높은 현시대에 돈을 어떻게 굴려야 하는지 등의 초보적인 방법이 소개되어 있었다.

‘물론 경제 이론 부분에서 욕심을 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누군가에겐 이미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전 처음 듣는 정보일 수도 있었다. 특히 돈에 대한 교육이라곤 받아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는.

“결국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이 올 거예요. 거시적인 돈의 흐름을 볼 줄 아는 자가 승리하겠죠. 저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에서 기회를 찾기를 바라요.”

자본주의라는 위대한 네 글자를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채 아멜이 웃었다. 프링글스는 오늘도 그 의미심장한 웃음을 해독할 수 없었다.

***

한편, 카일과 이클릿, 고용인들이 자리한 카페테리아는 초상이라도 난 듯한 분위기였다. 카일은 이클릿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왜…… 왜 누나가 요즘 날 가만히 두는 거지.’

출산 후 관계를 지양해야 할 시기는 이미 지났다. 그것도 이틀이나. 카일은 아멜이 산부인과 전문의에게 그 소견을 전달받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길래 아내가 이전처럼 저를 탐하지 않는 것인가. 카일의 머릿속은 그 문제로 복잡했다.

마차에서 아내는 분명 속마음을 읽었을 터였다.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 마음을 읽었다면 당장 입술을 겹쳐 오는 게 그녀였다.

아니, 그는 아내가 속마음을 읽는 방식부터가 걸렸다.

‘예전에는 손을 내밀기 싫다고 하면 허리나 배에 먼저 손을 대셨는데.’

속마음 읽기를 위한 접촉을 핑계로 곧잘 사심을 채우던 아멜이었다. 어떤 때는 아예 셔츠 안으로 손을 불쑥 집어넣기도 했다.

그런데 구두와 구두를 맞대 속마음을 읽다니. 이건 문제가 있어도 심각하게 있는 것이었다.

이쯤 되자 카일은 몹시 침울해져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 끔찍한 가정이 들었다.

‘설마 내게 더 이상 매력을…… 못 느끼시는 건가.’

카일은 등골이 서늘해져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얼마 전 모 잡지에서 봤던 기사가 떠올랐다.

출산 후, 남남이나 다름없어졌는데 아이만 보고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파파, 마마……!”

“아니야, 이클릿. 엄마는…… 돌아올 거야.”

카일이 처연하게 중얼거렸다. 마침 아멜이 시킨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바네사는 그와 일행이 아닌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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