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31화 (131/134)

#15

나들이를 마치고 집무실에 돌아온 카일은 더욱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녀 하나가 아멜의 명을 받고 버리던 잡지 때문이었다.

카일은 가주의 권한을 십분 활용해 그 잡지를 제 집무실로 가져왔다. 그리곤 경악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부인이 아이를 낳아줬는데 외도를 한다고? 누나는 왜 이런 글을 보고 계신 거지?’

그는 충격을 받아 삶에 염증을 느낄 지경이 되었다. 어떻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낳아줬는데 외도를 한다는 것인가.

‘말도 안 돼.’

출산을 겪은 남편이 아내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정은 카일에게 생경한 외국어 문장과 같은 말이었다.

카일은 아멜이 속싸개에 돌돌 말린 이클릿을 껴안고 똑 닮은 웃음을 보일 때마다 주변이 흐릿해지는 경험을 했다.

“카일. 이리 올래요? 이클릿이 아빠가 보고 싶은가 봐요.”

“꺄―!”

부름을 받고 다가가면 아멜에게는 항상 달콤하면서도 관능적인 향이 났다. 카일은 그럴 때마다 그녀의 목 언저리에 입술을 파묻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회복될 때까지는 그녀를 괴롭힐 수 없었다. 해서 욕망을 운동이라는 건전한 수단으로 승화시켰다.

임신 말기부터 아멜의 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카일은 자신의 아래에 있는 모든 병사들과 한 번씩 대련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근육이 더 붙었음은 물론이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어쨌든 열심히 몸까지 만들어 두었건만.

카일은 잡지를 보고 또 봤다. 제게 문제가 없으니 반대의 경우일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가정이 기울었다.

아멜이 저를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남편이 더 이상 남자로 보이지 않는다거나.

‘성욕 감퇴? 누나가……?’

카일은 속상해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려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곧 속단하기엔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멜과 관련된 일에 한없이 긍정적이었으므로.

아내가 저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는 일단 필살의 유혹을 해보고 결정해야 할 일이었다.

다행히 아직 잠들기까지 시간이 꽤 있었다. 카일은 아멜이 좋아하던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기 시작했다.

‘돈을 좋아하시니 침대에 지폐와 금화를 깔아두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군.’

꽃이나 땅, 감미로운 음악이나 주식이 차례로 생각났으나 모두 적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을 고민하던 카일은 문득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면……

“하일드. 제 벗기 쉬운 셔츠, 어디에 있습니까?”

역시 자신이었다.

***

카일은 늦지 않게 방을 유혹의 미궁으로 꾸밀 수 있었다. 시작은 화사하게 핀 장미꽃을 근사하게 띄운 유리 욕조였다. 욕실에 은은한 사향을 입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기서 같이 씻고…….’

동선을 체크하는 그의 시선은 곧바로 침대로 향하지 않았다. 옷장. 정확히는 옷장 앞에 있는 커다란 전신거울에 진득한 시선이 머물렀다.

언젠가 거울 앞에서 키스할 때, 거울을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희뿌연 자국을 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상상만으로도 야릇하니 분명 좋아할 것이다.

‘그다음엔…….’

그의 시선이 부드러운 새 시트가 깔린 침대로 향했다. 살갗에 닿으면 탄성이 절로 나오는 부드러운 것이었다.

‘완벽하군.’

카일은 눈웃음을 짓는 그녀를 상상하며 마지막으로 방을 조망했다. 그의 시선은 테이블 위, 아롱거리는 촛불과 함께 준비해둔 와인으로 향했다.

침실로 올라오는 선반에 있기에 별생각 없이 가져온 것인데, 생각해보니 아내에게 와인은 아직 이른 듯했다.

아내는 술에 취하면 자신의 유연성과 체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움직이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카일은 그녀를 잡아먹고 싶었지 아프게 하고 싶진 않았다.

‘……조금만 맛볼까.’

다른 와인이었다면 그다지 감흥이 없었겠지만 이 와인은 무려 아내의 이름이 붙은 아멜리아 와인. 달콤하면서도 풍부한 맛이 아멜을 절로 연상시킬 것이다.

카일은 그제야 자신이 와인잔을 챙겨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내는 퇴폐적인 모습도 마다하지 않으니 코르크 마개만 따고 들이켤까 했다.

‘……저런 게 원래 있었나?’

그런 그의 눈에 예쁜 컵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요정이 크리스탈을 세공해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이 들어간 물건이었다.

어차피 컵이니 사용한 뒤 씻어두면 상관없으리라. 퇴폐미의 영역을 개척하는 것보다 체통을 지키는 편이 낫겠다고 결론 내린 그는 달콤한 와인을 잔 가득 따랐다.

순간 잔이 엷은 빛을 냈으나 아롱거리는 촛불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카일은 잔을 작게 흔들어 감미로운 향을 먼저 음미한 뒤 입으로 가져갔다.

“……!”

한 모금을 야심 차게 들이켠 그는 반사적으로 잔을 내려두었다. 목구멍이 녹아내릴 듯 뜨겁기를 잠시, 그 열기가 몸의 끝자락까지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게, 무슨…….”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카일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어떤 상태에 빠진 것인지 눈치챘다. 이건 암살을 위한 독약이 아니었다. 술에 취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왜…… 미약을 먹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심장이 한 번 수축할 때마다 몸이 과할 정도로 뜨거워졌다. 이미 얼굴은 물론 뺨과 귀 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입고 있는 옷이 제 피부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소름이 돋고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벌써 땀이 셔츠를 적셨을지도 몰랐다.

“대체 왜…… 크윽…….”

카일은 절대 웃지 못할 상황에 빠져 이를 악물었다. 고통스러운 신음은 잇새로 빠져나왔다.

그는 일단 튀어 오르듯 요동치는 심장을 어떻게든 진정시키고 싶었다. 차가운 물을 온몸에 뒤집어써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으나 떠오르는 방법이 그것뿐이었다.

카일은 조심조심 욕조로 향했다. 휘적휘적 걸었다가는 옷감이 스치는 느낌 때문에 다리에 힘이 풀릴 게 뻔했다.

“크윽……!”

그런 그가 크나큰 난관에 봉착했다. 차이엘드 특제 ‘벗기기 쉬운 셔츠’가 장식물에 걸려 미끄러지듯 제 자리를 이탈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된 옷이 팔과 어깨, 목에도 걸쳐지지 않고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졌다. 부드러운 옷감이 상반신을 훑고 지나가자 카일은 더 걸을 수가 없었다.

“미치겠…… 윽…….”

그는 삶은 문어처럼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인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아내에게 보였다간 수치스러운 정도가 아닐 것이다.

‘누나가 이클릿이라도 안고 들어오면 난…….’

어쩌면 지금의 기억이 일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아 이클릿에게 귀여운 동생들을 만들어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카일은 그런 상황만은 막아내겠다는 강철과도 같은 의지로 힘겹게 걸음을 내디뎠다. 어쩌다 먹게 된 미약은 상당한 양이었는지 갈수록 정신이 혼미해졌다.

직접 골라온 와인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잔이? 아무래도 좋으니 달아올라 터지기 직전인 몸부터 어떻게 해야 했다.

카일은 지팡이를 짚는 노인보다 느린 속도로 겨우 욕실에 다다랐다. 찬물을 맞으면 물이 흐르는 감각 때문에 필시 주저앉게 될 것이니 욕조에 찬물을 받을 생각이었다.

‘미치겠군. 일단 욕조 마개부터…….’

침착하게 몸을 수그려 욕조 바닥의 마개를 움켜쥐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첨벙―!

문제는 다리에 힘이 풀려 뜨거운 물이 넘실거리는 욕조 안으로 미끄러졌다는 것이었다. 체온이 올라가니 미약의 효과가 더 증폭되었다.

“흐읍…….”

카일은 찰랑이는 물결에 숨을 들이쉬었다. 달아오른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하의가 젖어 쩍쩍 달라붙는 것마저 아찔하게 느껴지는 것이 한심스러웠다.

그는 부디 제 몸이 멀쩡해질 때까지 욕실 문이 열리지 않기를 바랐다.

***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밤이 찾아왔다. 나는 가릴 곳만 가린 간소한 옷차림 위에 두툼한 목욕가운을 두른 뒤 방으로 향했다.

‘바네사가 분명 침실에 놔뒀다고 했지.’

내가 그녀에게 부탁해 받은 물건은 ‘사랑의 잔’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마도구였다.

물이든 술이든 상관없이 잔 안에 들어오는 액체에 미약 효과를 부여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만큼 미약의 효과가 강력하게 발휘된다고 했다.

‘효과가 너무 강해도 곤란하니 입술에 찍어 바르는 정도로만 써야겠다.’

나는 처음부터 액체를 삼킬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입술에 바르면 키스할 때 적당히 섞일 테니 카일에게도, 내게도 색다를 것 같았다.

“카일, 누나 왔…… 음?”

하지만 벌컥 연 침실은 평소와 달랐다. 로맨틱한 살인사건 현장이라고 하면 어울릴까. 바닥에는 와인이 담긴 잔이 엎어져 있었고 문들은 죄다 열려 있었다.

‘잠깐. 이 잔은……’

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바닥에 떨어진 차이엘드 특제 벗기기 쉬운 셔츠가 이정표 역할을 했다. 욕실 문도 닫혀 있을 뿐, 안에서 잠겨 있지 않았다.

“카일!”

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욕실 문을 열었다. 수증기가 문밖으로 빠져나가며 흐릿하던 시야가 점점 선명해졌다.

“누나. 들어오지 마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고열을 앓는 사람처럼 헐떡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가 그렇게 떨리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카일. 괜찮…… 세상에.”

욕조에 더 들어선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언젠가 예술품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감상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말을 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의 카일은 그 감상법을 적용해야 마땅했다.

“카일, 괜찮아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세상에, 저런……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어머나, 신이시여…….”

나는 떠오르는 대로 마구 유감을 표하며 그를 외울 듯 바라봤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야 뻔하다. 아멜리아 와인의 코르크 마개가 없었고 사랑의 잔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으니.

그는 미약의 효과에 몸을 못 가누고 있었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길래 저만큼이나 강력한 효과에 농락당하고 있는 것일까.

“……다가오지 마십시오.”

게다가 자신의 모습을 무척 수치스럽게 생각하는지 발긋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돌렸다. 목덜미와 이마가 이미 땀으로 축축했다. 그 모습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였다.

‘이것 참, 내가 미약을 쓴 건 아니지만 미안하네. 미안하긴 한데…….’

죄책감 따위는 나중에 느끼기로 하고 욕조로 다가갔다. 물결도 버거워하는 그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며 반응을 지켜보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미칠 것 같아. 일단 이 상태에서 좀…….」

「욕조 안으로 끌어당기면 미친놈 보듯 하실까?」

「유혹 작전은 완전히 실패군.」

「다시 날 남자로 봐줬으면 했는데…….」

방을 예쁘게 꾸며둔 이유는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남자로 봐줬으면 했다니. 이 무슨 망언인가.

“카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이런 몸과 얼굴을 가지고 남자로 안 보일 걱정을 하다니…… 네? 출산 후 성욕 감퇴? 그런 건 남편이 이렇게 예쁘고 요망한 연하가 아닐 때나 가능한 일이죠. 제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나는 그의 턱을 쥐고 가볍게 입술을 핥아냈다. 그가 들이켠 아멜리아 와인의 맛과 동시에 단단한 몸이 전율하는 게 느껴졌다.

“거절하지 말아요. 원래 미약에서는 다 이렇게 빠져나오는 거예요. 자, 눈 감고…….”

나는 그를 마주 안고 입을 맞췄다. 열기가 전염되듯 서서히 내 시야도 어지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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