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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32화 (132/134)

#16

나는 뜨겁다 못해 녹을 것 같은 카일의 입안을 맛봤다. 소극적으로 입맞춤에 응하던 그가 입을 떼곤 거친 숨을 씨근거렸다.

「이런 문란한 모습을 아내에게 보이다니.」

“지금 모습, 보기 좋아요.”

「……어떡하지. 몸이 식을 생각을 안 하는데.」

“벌써 식으면 안 되죠.”

「어지러워.」

“……저도 조금 어지러워요.”

「싫진 않지만…….」

“그럼 좋다고 대답해주세요. 원한다고.”

나는 그의 속마음 하나하나를 받아치며 손가락을 얽었다. 맞닿은 가슴에서 아찔할 정도로 빠른 심장박동이 전해져 왔다.

“……원합니다.”

그는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내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이것밖에는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이. 나는 그의 대답이 만족스러워 농염하게 웃었다.

“카일이 힘들어하는 건 저를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그건 언제나 그랬습니다.”

혼란해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인지 그는 눈을 피하면서도 똑똑히 대답했다. 나는 풋 새어 나오는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저를 사랑하는 만큼 효과가 강력하다고 했어요. 제가 기분 나빠 하거나 질색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는 말이에요. 오히려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보니 감동적인데.”

“웃으면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십…… 윽.”

“몸도 못 가누겠어요?”

나는 욕조를 붙잡느라 힘줄이 불거진 그의 팔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마치 주술을 써 맹수를 제압한 것 같지 않은가.

어쨌든 원인을 제공한 건 나이니 그를 위해 원하는 만큼 움직여줄 생각이었다.

“이만큼이나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카일.”

“…….”

그는 관능적인 눈짓과 목소리에 대한 답으로 찬찬히 눈을 감았다. 땀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과 가지런히 감은 눈이 조화로웠다.

나와의 거리가 반복적으로 가까워질 때마다 내 골반을 붙잡은 그의 양손에 힘이 들어갔다.

***

베르들레반 드 하일은 소박한 차림으로 차이엘드 공작저에 들어섰다. 오늘 그는 황제로서 행해야 할 업무 스케줄이 전혀 없었다.

‘이럴 때 친우의 집에 방문하는 것이지.’

베르드는 내심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차이엘드 공작저에 아이가 태어났다는데 황제인 저가 그 아이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차이엘드 공작의 과잉보호는 차별적이었다. 이미 그의 최측근들은 차이엘드 2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고 했다.

‘항간에서는 이미 이클릿 차이엘드의 웃음을 천사의 미소라고 부르던데.’

차이엘드 공작이 아끼고 아끼는 딸아이를 보여준다는 건 정말 차이엘드의 측근이 되었다는 말이니 향후 백 년은 두 다리를 쭉 뻗고 자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베르드도 천사의 미소를 보고 싶었다. 마침 용건도 생겼다. 황후 리엔이 아멜에게 출산을 축하한다는 편지를 쓰고 있던 것이다. 베르드는 그녀의 집배원을 자처했다.

전갈을 넣고 온 것이 아니라 곤란해하던 베르드는 마침 마당을 쓸던 정원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하일드 집사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일드 집사장. 오랜만이군.”

“폐, 폐하?”

“내 바쁜 몸이지만 오랜만에 시간을 내 친우의 집에 들렀네. 잠시 들어갈 수 있겠지?”

기분 탓일까. 하일드는 감춰야만 하는 엄청난 것을 떠올린 듯 일순간 달달 떨었다. 공작저에 남사스러운 그림을 걸어둔 것도 아닐 텐데.

“하일드 웨일. 황제인 나를 돌려보내진 않겠지?”

“물, 물론입니다. 같이 가시지요.”

그렇게 말한 하일드는 최대한 천천히 정원을 거닐며 황제가 묻지도 않은 정원의 역사를 설명했다. 시간을 끌면서도 헛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장이 공작 전하의 금욕 상태를 해제해줬다고 했을 때 이런 일에 미리 대비했어야 했는데…….’

충실한 집사 하일드는 자신의 무능함에 한숨을 삼켰다. 주인 부부의 금실이 유달리 좋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아니. 금실만 좋았으면 오늘 아침까지 무언가가 들썩거리는 소리를 듣는 일은 없었으리라. 주군은 여러모로 뛰어난 존재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각인되었다.

일단은 사람을 보내 주인 부부를 깨우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집사장. 차이엘드 공작 부부는 황제가 왔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군.”

“그, 그것이…… 공, 공작 전하께선 어젯밤 늦게까지 집무실에서 정무를 보시다가 오늘 아침에야 잠드시어…… 마, 마님은 산책을 나가셨습니다! 그러니 정원에서 차라도…….”

“됐네. 내 차이엘드 공작에게 가지.”

하일드가 예상하지 못한 변수 하나. 선대 차이엘드 공작의 초대를 자주 받았던 베르드는 공작저의 구조에 빠삭했다.

아멜이 바깥에 있다고 급히 둘러댄 것이 실책이었다. 베르드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카일의 침실로 향했다.

***

소식을 빠르게 접한 바네사는 침실에 들어와 발을 동동 굴렀다. 있어야 할 두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욕조에 나란히 잠들어 있을 게 분명했다.

‘내가 미쳐! 안 그래도 멈출 줄 모르는 두 분께 사랑의 잔을 빌려드리는 게 아니었는데!’

황제가 마님의 헐벗은 모습을 보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차이엘드 공작의 민망한 모습을 보긴 싫었다. 그녀는 결국 빛에 메시지를 담아 욕실 안으로 실어 보냈다.

‘……눈부셔.’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갑자기 밝아지는 시야에 당황해 눈을 떴다. 바네사의 도움으로 긴박한 상황을 금방 파악한 그였다.

“윽…….”

문제는 얻어맞은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몸이었다. 아멜이 제 위에서 목욕가운을 덮고 자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간 탐하지 못한 것을 몰아 탐하듯 열을 낸 어젯밤이 문제였다. 차이엘드 공작저의 넓은 욕실을 구석구석 이용하지 않았던가.

경쾌한 새 소리가 들려오던 아침 즈음엔 침실까지 걸어갈 힘이 없어 욕조 안에서 잠들었다. 그러니 몸이 만신창이일 수밖에.

추운 곳에서 굴러떨어진 듯 몸은 성한 곳 하나 없었다. 조금만 움직이려 하면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며 경련했다.

‘……깨어나시면 혼내실 것 같은데.’

하지만 아멜에게 혼나는 것보다 그녀를 황제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카일은 아내를 살살 흔들어 깨웠다.

“아흑…….”

역시나 아멜도 몸이 성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둘은 한동안 앓는 소리를 내다 눈을 마주하고 실없이 웃었다.

“……당분간은 고용인들 얼굴을 못 볼 것 같아요. 카일은요?”

“여전히 절 원하시는 것을 확인했으니 됐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만족한 얼굴이었다. 물론 삭신이 쑤시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자는 곳이 이렇게 중요한 줄 몰랐다.

“제가 나가볼 테니 천천히 쉬다 나오십시오. 시중들 자를 보내겠습니다.”

멀끔한 말투와 달리 카일은 만신창이였다. 그는 커다란 타올 하나만을 걸치고 아내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삐걱삐걱 움직였다.

때마침 하일드의 비명과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베르드였다.

“차이엘드 공작. 안에 있었으면서 왜…… 헙.”

황제는 여러모로 놀라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빛보다도 빠르게 카일을 살폈다.

대체 잠을 어떻게 잔 것인지 공작의 머리카락은 완전히 까치집이었다. 그럼에도 멋쩍은 듯 제 뒷머리를 정리하며 저를 바라보는 붉은 눈에는 색기가 흘렀다.

게다가 몸은 또 어떤가. 기사들이 연무장에서 훈련하는 것을 수없이 봐온 베르드였지만 이런 짐승 같은 몸은 처음이었다. 돌로 깎아 만든 듯한 근육들이 차곡차곡 들어찬 것이 절로 손을 뻗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공, 공작. 상의를 좀…….”

“…….”

얼마나 사랑을 받은 것인지 그의 몸 위로는 여인의 손자국과 정체 모를 붉은 자국들이 가득했다. 하반신에 수건을 두르면서 이것까진 고려하지 못한 듯했다.

“못난 꼴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카일은 답지 않게 민망해하며 바닥에 떨어져 있던 셔츠를 주워입었다. 베르드의 시선은 자연스레 욕실로 향했다.

“……욕실 쪽은 보지 마십시오.”

“그…… 알겠네. 나는 자네 아이를 잠시 보러 가도 되겠나?”

카일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그녀를 올려다보느라 무리한 목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

“큰 마님! 황제 폐하께서 이클릿 님을 보러 오신다는데…….”

“그래서?”

“어젯밤이 그…… 두 분의 봉인이 해제된 날이어서…….”

“…….”

바네사의 보고를 받은 클레어는 곧장 이클릿의 방으로 이동했다. 이 작고 귀여운 아이가 황제와 홀로 대면하도록 둘 수는 없는 일.

사명감을 가지고 도착한 클레어는 요람에서 저를 바라보는 이클릿을 보고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귀여워.’

이클릿은 아멜을 닮아 사랑스러운 웃음을 짓는 아이였다. 아이가 햇살처럼 환한 웃음을 지을 때면 클레어는 이 작고 가벼운 것을 품에 안아도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가, 안녕.”

“꺄아―!”

“예뻐라.”

클레어는 아이에게 닿지 못하고 요람만 쓰다듬는 제 손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이 손으로 얼마나 많은 짓을 저질렀던가.

아멜은 아이를 내밀며 ‘가족이니까 괜찮아요. 안아 보세요.’하고 말했다. 하지만 클레어는 그 말이 더 두려웠다.

절반뿐이긴 하지만 같은 피가 흐르던 가족들을 제 손으로 죽인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으니까.

물론 클레어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감옥과도 같은 별궁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그들이 저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나를 죽인 건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 증명할 방법이 없군.’

자신은 그저 그들이 저를 죽이려 했다 믿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는 편이 스스로에게 더 이로울 테니.

차이엘드의 옥좌를 차지하려거든 상념들을 철저히 숨기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척, 잔인하게 굴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은 클레어 혼자만의 고민이었다.

그간 잘 숨겨왔던 마음이 흔들린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아멜리아 다이앤. 그 아이가 같이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자 조를 때마다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괜히 어두운 얘기를 늘어놓았다간 내가 그다지 유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멜도 알게 되겠지.’

클레어는 그런 일을 원하지 않았다.

곧 황제가 들어왔고, 클레어는 요람에서 방긋 웃는 아가를 잠깐 보여준 뒤 적당히 그를 황궁으로 돌려보냈다.

그녀는 곧장 나가지 않고 이클릿의 요람 옆에 앉았다.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보였다. 똘망똘망한 눈이 제게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자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클릿. 네 이름은 빛이라는 뜻이라고 했지.”

빛은 존재만으로도 이롭다. 주변을 밝히고 따사로운 온기를 부여해준다. 클레어는 빛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받을 환영이 부러웠다.

아이는 어느 곳에나 잘 섞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클릿과 함께하길 원할 것이다. 아이는 홀로 제 정체성을 고민할 필요 없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자신이 누구인지 자연히 깨달을 것이다.

“잘 어울리는 이름이야.”

“아부우…….”

클레어는 용기를 내 귀여운 소리를 내는 이클릿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이클릿이 그녀의 손가락 하나를 꼭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클레어는 아이가 만든 작은 결속을 끊어낼 수 없었다. 얼마나 멍하니 서 있었을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아멜이 들어왔다. 피곤한 기색이 있었지만 표정만은 환했다.

“클레어 언니가 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저랑 카일이…… 큼, 철없는 짓을 할 때마다 수습해주셔서 감사해요.”

“…….”

“언니가 이클릿을 황제 폐하께 보여드린다고 해서 얼마나 안심했는지 몰라요. 일국의 황제를 그냥 돌려보냈다간 찜찜했을 테니까. 그렇다고 우리 딸을 황제 폐하의 앞에 덩그러니 내밀 수도 없고.”

“내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

아멜은 고저 없이 내뱉는 클레어의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클레어는 그녀의 환한 웃음이 이클릿과 똑 닮았다고 생각했다.

“언니가 없었더라면…… 어휴. 생각하기도 싫어요. 바네사도 큰 마님이 안 계셨으면 오늘은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고 거듭 말했어요.”

“…….”

“언니는 제게 도움을 주는 정도가 아니에요. 한 줄기 빛이라고 해야 하나? 앞으로도 많은 도움…… 언니?”

아멜은 클레어의 얼굴을 보곤 말을 멈추었다. 천하의 클레어 차이엘드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아니,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는데 어딘가 행복해 보였다.

‘클레어 언니가 왜…… 어머.’

그제야 이클릿이 클레어의 손가락을 쥔 것을 발견한 아멜이었다. 귀여운 그림. 그녀는 망설임 없이 두 사람의 손 위로 제 손을 포갰다.

「……그래. 내 이름도 빛이라는 뜻이었지.」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행복에 찬 클레어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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