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34화 (134/134)

#18

서로를 경계하며 음식에 독을 타는 형제들. 기미를 보던 하녀의 죽음. 고용인들 사이의 세력 다툼. 기꺼이 가문의 부를 수호하는 짐승이 되라는 아버지의 고함.

카일리안 차이엘드의 열다섯의 일상은 으레 비슷했다.

온통 캄캄하던 시야에 차츰 사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흐릿하게. 그리고 점점 선명하게. 카일은 느릿이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응시했다.

어젯밤, 종교도 없는 그는 늘 하던 것처럼 양손을 꼭 붙잡고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제발 자는 사이에 아프지 않게 죽어버려서 내일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 없도록 해주세요.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또다시 하루를 보내지 않게 해주세요.’

기도에는 주어가 없었다. 구해주기만 한다면 그 주체는 누구이든 상관없다는 듯이.

어머니의 얼굴은 이미 오래전부터 기억나지 않았다. 남의 체온을 느껴본 일도, 누군가가 제 이름을 다정스레 불러주거나 미소를 보여주는 모습도 모두 기억나지 않았다.

카일은 누구이든 좋으니 저를 받아주는 품에 안기고 싶었다. 짐승이 되라 윽박지르는 아버지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와의 충돌은 충돌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패배였다. 그것은 차라리 일방적인 내리찍음에 가까웠다.

‘사랑 같은 건 기대하지도 않으니 다 그만두고 싶어.’

열다섯의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상상할 수 있는 구원의 방법은 죽음 하나였다.

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 따위를 실행에 옮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두려움이나 용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실패하면?’

아버지는 차이엘드에 오점을 남길 리 없는 사람이다. 강박적인 그는 가문의 누가 될 만한 행동의 조짐만 보여도 싹을 잘라냈다.

제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말을 들으면 분명 움직이지도 못하게 전신을 동여매 다락방에 처넣을 것이 분명했다.

조금이라도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일을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그의 우울한 생각은 여기에서 잠깐 끊겼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었다.

“카일리안 님. 공작 전하께서 보내신 음식과 의복입니다. 한 시간 후, 로비로 모이라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를 내려다보는 하일드 웨일의 눈동자에는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아버지는 동정과 연민이 값싸고 질 낮은 감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카일은 동의하지 않았다.

카일은 하일드가 드러내는 안타까움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역산할 수 있었다. 받아서는 안 되는 대우를 받고 있으니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다. 자신은 이런 대우를 받으면 안 되는 하나의 인간이었다.

식성도, 생활 방식도 다른 짐승들을 한 우리에 가둬 넣고 싸움을 붙이는 식의 양육과 세뇌는 옳지 않다. 그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그 사실을 되새길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카일은 테이블에서 허겁지겁 식사를 마치곤 옷을 갈아입었다. 거울 속의 소년은 제국의 중추 역할을 하는 공작가의 막내아들이라기보다는 잘 입혀 놓은 밀랍 인형 같았다.

씻지 못해 얼굴에 구정물이 흐른다거나 머리가 덥수룩한 적은 없었다. 선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인형인 양 제 외관은 항상 단정하고 기품 있게 유지되었다.

‘가기 싫어.’

카일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버지에게 향했다. 다른 형제들이 이미 각 맞춘 자세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 자리인 끄트머리에 선 카일은 신전의 높고 단단한 기둥을 연상시키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당신의 앞에는 커다란 차이엘드의 문장이 놓여 있었다. 당신은 문장의 일부인 양 자연스럽게 짐승들과 뒤섞였다.

“너희들의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보라.”

뼈를 지그시 압박하듯 무게 있는 목소리였다. 차이엘드의 영특한 형제들은 가문의 문장에 대해 장대한 해석을 늘어놓았다.

마침내 카일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당신의 모습이면서, 저의 미래입니다.”

그 대답은 차이엘드 공작을 크게 만족시켰다. 공작은 벽을 더듬거리다 어느 부분을 힘주어 눌렀다. 숨겨져 있던 커다란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희들 중 오직 한 사람만이 이 계승의 공간에 들어가 아레테를, 그리고 차이엘드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것이다.”

본격적인 계승 전쟁의 시작이었다.

***

형제 중 하나가 죽음을 맞았다. 사고로 위장된 암살이었다.

공작저에 비명이 들리는 일이 잦아졌다. 카일은 제 비명이 공작저에 울리는 일이 없도록, 남이 저를 해치지 못하도록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해댔다.

몸도, 마음도 지쳐가던 어느 날, 무언가의 예고처럼 형제 중 하나가 단검을 들고 찾아왔다.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이전처럼 형제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희망을 잃었다. 카일은 좀체 아물지 않는 골반의 상처를 틀어쥐며 자신이 얼마나 안일한 희망을 품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타살은 세뇌로 형성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자살은 두려웠다. 그가 선택한 길은 은둔하며 굶어 죽는 것이었다.

나름의 타협책을 실행에 옮기던 그때, 자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시장하시죠?”

“아…….”

“도련님. 차이엘드를 위해서는 도련님이 살아남으셔야 해요. 원하신다면 제가 돕겠어요.”

“당신이 왜……”

“차이엘드를 위해서.”

아버지와 형제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은 며칠 후였다.

합동 장례식을 하루 앞두고 카일은 다시 로비에 섰다. 앞발을 든 짐승이 여전히 위용을 떨치고 있었다. 살아남은 아들은 자신 하나였고, 저를 도왔던 하녀는 계승에 대한 조금의 욕심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도련님. 계승의 방에 들어가셔야 하는 줄로 압니다. 차이엘드의 가주를 위해 고안된 형체 없는 아레테의 결정을 사용하십시오.”

“…….”

카일은 묵묵히 계승의 공간에 들어갔다. 차이엘드가 아레테의 결정을 독점 매매하며 얻어낸 무형의 힘이 공중에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눈을 감고 가만히 호흡하자 기체가 폐부 깊숙한 곳까지 스몄다. 미온의 공기를 다시 뱉어낼 때, 온몸에 전기가 흐르듯 전율이 일었다.

“공작 전하께서는 아레테를 부여받으신 겁니다. 전하께서 가장 원하는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카일은 저를 도운 하녀에게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고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잠그고 커튼을 친 그는 단검으로 제 손을 내리찍었다.

카강―!

단단한 돌을 찌르기라도 한 듯 칼날이 요동쳤다.

“대체 왜, 대체 왜!”

카일은 여러 번 손을 내리꽂았지만 스스로를 해치려는 동작에 아레테가 더욱 뚜렷하게 발동되었다.

방어.

자신에게 부여된 아레테는 지키는 힘이었다. 아버지가 주문처럼 읊던 염원이 결국 제 아레테가 된 것이라 생각하니 구토감이 일었다.

카일은 위액까지 모조리 게워내고도 스스로가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난 대체 뭘 지키고 싶어서…….’

겨우 계승 전쟁의 끝을 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 무의식은 여전히 비명과 공포로 얼룩진 나날들 속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모순이었다. 죽음을, 구원을 그렇게 원한다고 생각한 제게 방어의 아레테가 부여된 것은 모순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내 욕망이라는 건 고작…….’

아레테를 부여받던 날. 단검의 날이 휘어질 때까지 제 손목을 내리친 카일은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무엇을 지키고 싶어 방어라는 아레테를 얻었는지 깨닫기 전까지는 절대로 아레테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기나긴 시간이 흐른 후에, 아주 긴 시간이 흐른 후에도 답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차이엘드와 함께 자멸하겠다고.

그의 결심은 지켜지지 못했다.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난 탓이었다.

***

창밖으로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장마였다. 아멜은 쉴 새 없이 덜컹거리는 창문보다도 끙끙거리며 자고 있는 카일이 걱정되었다.

‘나쁜 꿈이라도 꾸나 보다.’

그의 악몽은 대부분 암울한 과거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안타깝게도 아멜에게는 과거의 기억을 아름답게 바꾸는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현재라면 얼마든지 그를 기쁘게 해줄 수 있었다. 그녀의 품에는 세 살짜리 이클릿 어린이와 갓 두 살이 된 쌍둥이 아들들이 있었으니까.

“이클릿, 카시엘, 칼리스토. 아빠가 나쁜 꿈을 꾸는 것 같으니까 깨도록 도와드릴까?”

“네!”

“아바바!”

“으꺄!”

이클릿이 아장아장 걸어 카일의 가슴팍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멜은 쌍둥이들을 카일의 양어깨에 차례로 풀어주었다.

그는 숨이 막히는지 얼굴을 확 우그러뜨렸다가 이내 눈을 번쩍 떴다. 처음 이클릿의 잉태를 눈치챘던 날 꾸었던 토끼 꿈이 기억나 헛웃음이 나왔다.

이클릿은 카일의 머리를 헝클이며 발랄하게 물었다.

“아빠. 나뿐 꿈 꿔써?”

“나쁘고 아픈 꿈이었어.”

“힝…….”

카일은 이클릿이 입 맞춰주기를 원했으나 아이는 아픈 꿈은 머리가 아파 꾸는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앙증맞은 손이 카일의 이마를 찰싹찰싹 두드렸다.

아멜은 그 기특하고도 사랑스러운 광경에 풋 웃고야 말았다. 아빠를 위로하라 보낸 아들들은 그의 셔츠를 빨아먹고 있었다.

악몽에 대한 제대로 된 위로를 받지 못한 그에게는 역시 자신이 약이리라. 아멜은 카시엘이 깔고 앉은 그의 손을 끌어 깍지를 꼈다.

“우리 애들도, 저도, 계속 카일 곁에 있을 거예요. 우리 남편이 얼마나 든든한데.”

그녀의 입술이 손등에 닿는 순간 카일은 신기한 경험을 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저를 괴롭히던 과거의 아우성들이 마치 물속에서 소리를 듣는 것처럼 뭉개졌다.

그는 언제 침울해져 있었냐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뼈에 새겨진 과거의 울림들에 대한 답을 비로소 찾은 기분이었다.

‘난 대체 뭘 지키고 싶어서…….’

언젠가 사랑을 만날지도 모르는, 그래서 사랑하고 사랑받을지도 모르는 스스로를 지키고 싶었다.

‘사랑 같은 건 기대하지도 않으니 다 그만두고 싶어.’

지켜야 할 것들이 제 품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토록 저주스러웠던 지키는 힘을 축복이라 생각하는 지금, 자신은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거에 수없이 되새겼던 확신에 대한 반박이 들었다.

‘내겐 죽음만이 구원일 테니까.’

카일은 완전히 틀린 문장을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읊조렸던 어린 자신을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그럴 수밖에 없던 과거의 자신에게 지금이라면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구원이란 애초에 하나뿐이었다고.

“누나.”

“응?”

“사랑한다는 말, 해드리고 싶어서. 물론 누나가 절 사랑한다는 것도 압니다.”

“카일…… 능글맞아졌어요. 예전엔 계속 확인받고 싶어서 불안해했으면서.”

“제가 그랬습니까?”

카일은 뻔뻔하게 말하곤 아멜과 아이들을 크게 끌어안았다. 그녀에겐 이제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남편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지금 속마음 읽고 있는 거, 다 압니다.」

「괴물이던 절 이렇게 만든 건 누나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해.」

그녀의 사랑은 그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구원이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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