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4화 (4/634)

4.

“시나!”

나는 놀라 달려갔다.

탈락자 무리의 가장 뒤편에서 터덜터덜 걸어가던 시나가 다 죽어가는 얼굴로 날 돌아보았다.

“아, 자리에 없어서 인사도 못하고 돌아가게 되나 싶었는데…….”

“뭐야, 떨어졌어?”

“그래, 네가 나가고 나 낙법 하는 거 보더니 도저히 못 써먹을 실력이니 내년에 오라더라.”

“끄응.”

나는 앓는 소리를 냈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물론, 올해는 시나가 시험에서 떨어지는 게 원래 역사가 맞았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훈련한 그가 내년에 합격하는 거겠지.

그렇게 쭉 성장해 미래에 WWF를 이끌어나가는 전설이 되는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시나와는 달리 나라는 레슬러의 역사는 변했다.

나는 애덤의 쿠바 샌드위치를 먹고 설사에 시달리지 않았다.

때문에 내년에 시나와 함께 합격해 GCW의 동기가 된다는 역사는 이뤄질 수 없게 되었다.

‘이를 어쩐다…….’

시나가 올해 시험을 봐서 개꿀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간단한 시험에서 탈락할 줄이야.

‘어떻게든 훈련을 도와주면서 함께 붙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무용지물이었다.

“이제 어쩔 생각이야?”

“살던 동네로 돌아가야지. 마지막으로 네 이름 듣고 가자. 나중에 TV에서 볼 수도 있으니까.”

“준호 킴인데. 내 친구들은 편하게 날 준이라고 부르지.”

“오케이. 중.”

“……준.”

“주느. 잘 지내라.”

“잠깐만 기다려봐.”

나는 발음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나를 불러 세웠다.

“여기까지 뭐 타고 왔어?”

“응?”

“대답해. 시나.”

“어……. 버스타고 왔는데.”

“돌아가서 할일 있어?”

“일단 트레이너 일부터 다시 구해봐야지.”

“그럼 조금만 더 있다 가라.”

“……왜?”

시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 말을 이었다.

“내 TP가 되어줘.”

“TP?”

“그래, 내년에도 시험 보러 올 거라면 전 과정 자체를 미리 봐두는 편이 좀 낫지 않겠어?”

내 제안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시나는 이어 씨익 웃어 보였다.

“나쁘지 않은데?”

TP, ‘트레이닝 파트너’의 줄임말이었다. 프로레슬링은 ‘합’을 맞추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했기에 다들 TP가 한 명씩은 존재했다.

GCW에서도 그것을 배려해 지망생들은 각자 TP를 한 명씩 대동하고 시험을 보는 게 가능했다.

“그럼, 잘 부탁해. 시나.”

“나야말로. 중.”

“…….”

그냥 중으로 부르게 놔두자.

* * *

다행히, 나는 관계자들에게 말해 시나를 트레이닝 파트너로 삼는 것이 가능했다.

속내가 ‘뻔히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바쿠가 날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에 호탕하게 받아주었다.

“같이 시험을 본 친구가 떨어지자마자 TP로 넣다니. 고전적인 수법이로구나. 꼬마야.”

“자잘한 단점은 있어도 재능은 확실한 친구거든요. 한번 경험을 쌓게 해주고 싶습니다.”

“자잘한?”

바쿠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TP로 시나의 이름이 들어간 서류에는 망설이지 않고 사인을 해주었다.

1차 시험의 합격자는 47명.

50명가량이 걸러졌다는 말이다.

물론 시험 시작 전, 바쿠에게 까불었다가 흠씬 두들겨 맞은 멍청이들 몇 명을 더해서 말이다.

그렇게 1차 시험에 합격한 지망생들은 GCW 내의 숙소로 안내되었다. 시나는 내 TP이니 나와 같은 방에 배정받았다.

4층짜리 조립식 건물.

내부는 좋은 말로도 쾌적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넓었다.

벽걸이 선풍기가 털털거리며 죽어가고 있는 가운데, 나는 새삼 과거로 돌아온 것을 실감했다.

브라운관 TV가 있었다.

정사각형 상자 모양의.

“시나, 저녁 먹을 때까지 아직 시간 좀 남아 있지?”

“그래, 좀 쉬어도 될 거야.”

반대편 벽의 침대에 드러누운 시나의 말에 나는 안심하고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침대에 앉아 리모컨으로 TV를 틀자 진한 색깔의 4:3 비율 화면이 나왔다. 나는 채널을 기억하던 대로 돌려 방송을 틀었다.

[생방송으로 펼쳐지는 월요일 밤의 버닝콩! 지금 출발합니다!]

WWF의 주간 방송이자 메인 쇼인 ‘버닝콩’이 방금 시작되었다.

‘조지아에서는 이 시간이었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직전.

고릴라가 우아! 하며 가슴을 두들기는 로고가 떠올랐다. 카메라가 만원인 관객석을 스쳐지나갔다.

그 뒤를 이어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관객들이 열광을 보냈다.

음악과 함께 한 남자가 거들먹거리며 링을 향해 걸어 나왔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TV 화면을 바라보았다.

락콜드 스티비 스틴.

‘정말 엄청나군.’

확실히 자신이 주인공인 시대를 만들어낸 아이콘다운 환호였다.

미래의 숀 시나도, 과거의 캡틴 로건도, 모두가 자신이 주인공인 시대를 만들고 인정을 받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아이콘’이었다. 그 아래의 다른 선수들과는 궤를 달리 하는 위대한 선수들.

2002년은 락콜드가 만들어낸 시대였던 ‘태도 불량 시대’의 황혼기였다. 고질적인 목 부상으로 락콜드는 내년에 은퇴를 한다.

그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온갖 진통제와 약물, 근성으로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락콜드는 정말이지 엄청난 인간이었다.

사석으로는 단 한 번 봤을 뿐이었지만, 그는 확실히 시대를 만들어낸 ‘아이콘’에 걸맞았다.

링 위로 올라간 락콜드가 마이크를 받아 손에 쥐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센스와 경험의 덩어리였다.

관객들은 ‘락콜드! 락콜드!’ 하며 그의 이름을 외쳐댔다.

그런 이들에게 손을 들어 보인 락콜드가 이내 입을 열었다.

“지난 주! 빌어처먹을 더 팍과 바트 맥센이 이 락콜드를 공격했지! 그 개자식들은 나와 정면으로 대적할 용기가 없는 것들이야!”

관객들이 더 팍과 바트 맥센에게 야유를 보냈다. 락콜드는 현재 악역 역할을 수행 중인 그들을 욕하며 TV를 보는 시청자들에게 ‘지금까지의 스토리’를 설명했다.

‘지금 봐도 멋지군.’

완벽한 카리스마였다.

92년부터 현재까지 10여 년간 매주 생방송으로 진행되어온 WWF의 주간 쇼, ‘버닝콩’. 그것은 쉽게 말하자면 스포츠의 형식이 가미된 텔레비전 드라마였다.

각 선수들은 크게 선역과 악역으로 나뉘어 대립을 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치정과 폭력이 난무하는 것이 이 ‘태도 불량 시대’의 특징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쇼를 열광하며 즐겼다.

특히나 저 ‘락콜드’는 실제로 WWF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바트 맥센을 두들겨 패서 시청자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얻었다.

아무리 드라마라고는 해도, 일개 선수이자 사원이 거대 기업의 회장을 엿 먹이고 팬다는 각본이 주된 시청자들이었던 블루 컬러 계층을 크게 자극한 것이었다.

‘반대로 바트 맥센도 밉상 회장님 역할을 너무 잘 수행했으니 락콜드가 그렇게 뜬 거겠지만.’

사람들은 방송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꼈다. 나 역시도 그랬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는 다른 시선에서 락콜드를 보게 되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레슬러였다.

하지만 개중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먼저 몸이었다.

‘팬티 한 장만 걸친 채 힘을 겨루는 근육질의 남자 두 사람.’

일반인들이 프로레슬러에 대해서 가지는 인상은 이럴 터였다.

즉, 프로레슬러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몸을 만들었다.

살을 찌우거나.

근육을 키우거나.

하지만 살을 찌우는 경우는 대부분 오래 가지 못했다. 무릎이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초적인 신체 조건은 나쁘지 않게 타고 난 편이었다.

키 188cm, 체중 78kg.

하지만 아직 새하얀 도화지와도 같았다. 일반인 중에는 좋은 몸이었지만 프로레슬러로서 결코 ‘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커리어 내내 그랬었지.’

그러므로 내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바로 몸부터 멋들어진 체격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적어도 100kg 전후의 근육질로.

* * *

GCW는 메인 오피스에서도 냉방시설 대신 선풍기를 사용했다.

그나마 공업용 거대 선풍기이기는 했지만 이처럼 후덥지근한 열대야에는 썩 도움이 되질 않았다.

그렇기에 자리에 모여 있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은 진이 빠졌다.

하루 일과를 끝내는 결산 시간이라 그런지 다들 힘들어 했다.

총 책임자는 올해 65세가 되는 할리 레이시였다. 1970년대를 풍미한 프로레슬러였던 그는 은퇴 후 이렇게 GCW에서 후배들을 양성하며 노년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희끗희끗한 머리를 연필로 긁적이며 실적표를 확인했다.

“쇼가 점점 개판이 되가는군.”

관객 동원, 547명.

이곳이 산하 수련생 단체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아주 좋지 않은 수치였다.

“작년까지만 해도 천 명은 들어왔지. 왜 이렇게 된 걸까?”

“윗선에서 다 빼가서죠, 뭐.”

선수 부킹을 맡고 있는 ‘부커’ 롤링 제이가 말했다. 본명은 제이콥 어쩌고……였지만 그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할리 레이시도 본명이 있다.

하지만 이곳은 프로레슬링 업계다. 본명보다도 자신의 ‘링네임’으로 불리는 게 보편적이었다.

“쟈니를 말하는 건가?”

“그 친구 보려고 옆에 하이스쿨 주니어들 단체로 몰려오던 거 기억 안 나세요? 그 친구 때문에 조지아 주에서 한동안 윙패드 슈즈가 유행을 타기도 했었죠.”

“크하하, 그건 그렇지.”

할리는 호탕하게 웃었다.

쟈니 에이스.

얼마 전 WWF의 ‘메인 쇼’에 불려가게 된 쟈니는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GCW의 간판 스타였다.

“날랜 놈이었지. 에이스라는 이름대로. 그 자식의 슈팅스타 프레스는 교과서에 남겨야 할 정도야.”

“근데 어쩌겠습니까. 쟈니는 가버렸고. 우리는 남겨졌고. 쟈니 중심으로 스테이블 하나 꾸려간다고 애들 다 데려가고. 난리 났죠.”

“몇 명 데려갔지?”

“조셉, 마이클, 킴벌리도.”

“그렇게 네 명을 데려가서 스테이블로 데뷔를 시킨다고?”

스테이블은 프로레슬링에서 여러 선수들이 협조해 구성된 일종의 ‘팀’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 수는 보통 세 명에서 네 명 정도. 팀이라는 모습을 극대화하기 위해 우르르 몰려다니며 다구리를 쳐서 보통은 악역을 맡았다.

그 말을 들은 왕년의 전설적인 프로레슬러 할리 레이시는 어안이 벙벙해 말을 잇지 못했다.

롤링 제이가 겨우 대답했다.

“예, 스테이블이요.”

“야, 쟈니 그 새끼 선역이잖아!”

“아, 아니 그런데 뭐 어쩌겠습니까. 윗선에서는 그렇게 악역으로 쓴다고 하는데요.”

“악역하면 기술 제한도 걸릴 거고. 그 새끼가 잘하는 하이플라잉 레슬링도 못할 텐데?”

“그게 ‘메인 쇼’죠.”

롤링 제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악역은 관중들의 야유를 받고 선역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일부러 재미없는 레슬링을 보인다.

반면, 쟈니 에이스는 GCW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공중 살법으로 인기를 얻은 레슬러였다.

“성모께서 샷건으로 윗대가리 놈들을 쏴야 하는데 말이야.”

자기들이 최선을 다해 키운 선수가 메인 쇼에 올라가 이상한 기믹과 부킹을 받고 몰락한다.

없잖아 자주 있는 일이었다. 할리와 회사의 간부들은 모두가 그런 상황에 허탈함을 느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는 ‘산하 단체’였으니까.

“일단 다음 주 부킹부터 짜서 가져와봐. 어이구, 머리야…….”

“알겠습니다.”

“할리.”

그 이야기가 끝나고, 반대편에 있던 바쿠가 말을 꺼냈다.

“오늘부터 신입들 테스트 보기 시작한 거 알고 있죠?”

“어, 그거? 알고 있지. ……아까 숙소에 짐 푼 게 걔들이냐?”

“예, 이번에 시작했습니다.”

“늙으니 기억력이 퇴화돼서. 뭐, 괜찮은 놈이라도 있나?”

“있으니까 말했죠.”

바쿠는 씨익 웃었다.

“당장 내일 쇼에 나가도 괜찮을 정도입니다. 기본기가 아주 제대로 갖춰졌던데요. 수십 년 넘게 프로레슬링을 한 놈 같다, 이겁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누군데?”

“어…… 중이라는 놈인데요.”

“중? 어디 출신이야? 체코?”

“체코 놈들 이름은 그렇게 안 쓰거든요. 일단 미국인입니다.”

“어디 계통인데.”

“아시아요.”

“아시아? 제기랄, 수학 잘하는 기믹으로 써먹으라는 거냐?”

“……할리, 내 친구 할리. 왜 이렇게 인종적으로 생각해요?”

바쿠가 손을 들었다.

“우리는 ‘프로’라고요. 우리 역할은, 그놈이 어떤 개자식이건 간에 새끈한 종마로 만드는 거죠.”

팔아먹기 위해서 말이다.

“내 말은 간단해요. 할리.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다는 거죠.”

“흐음…….”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할리가 손을 뻗었다.

“그 친구 자료 좀 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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