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프로레슬러들은 왜 팬티를 입는가.
그것은 동서고금을 망라하고 계속되어온 질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 답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전통이었고, 편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근육을 과시해 강한 남성미를 뽐내기에도 무척 좋았다.
먼 옛날 로마의 콜로세움에서도 검투사들은 옷을 헐벗었다.
그 외에 씨름, 스모, 복싱, 무에타이, 종합격투기 등, ‘프로 스포츠’화化된 수많은 무술은 대부분 상의를 탈의하고 근육을 뽐냈다.
물론, 시대가 지나고 프로레슬러들은 전통에서 벗어나 점차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롱 팬츠, 하프 팬츠…… 뭐, 이런 건 길이만 제각각일 뿐이고.’
화려하게 반짝이를 넣는다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을 상징하는 명대사나 로고를 넣는다거나.
예를 들자면, ‘락콜드 스티브 스틴’은 문양이 없는 검정색 삼각팬티 위에 조끼를 입고 나왔다.
자신의 문양인 ‘버닝 스컬’을 조끼의 등 부분에 새기고, 자신의 명대사 ‘2:15’와 ‘What?’을 박았다.
노동자인 블루컬러 계층을 대변하는, 자신의 개성을 확실히 드러내는 복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에 카리스마도 챙겼고.’
모든 미국인들이 사족을 못 쓰는 배드애스적인 맛을 뽐냈다.
하지만 나는 그와 같은 스타일로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가 비록 현재 내 롤 모델이기는 했지만, 무작정 그 모습을 따라했다가는 단순한 마이너 카피밖에 되지 못할 터였기 때문이었다.
‘그럴 수는 없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잠시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주변에는 스무 명 정도 되는 지망생들이 자신에게 맞는 레슬링 기어를 찾아 살펴보고 있었다.
‘죄다 쓰던 거군.’
선배 레슬러들과 직원들이 기믹 연구를 하면서 만든 옷 같았다.
‘할로윈 파티 때 이걸 보면 근처에 사는 꼬마들이 환장하겠는데?’
실험적인 시도를 한 흔적이 다수 보였다. 별 모양 가면에, 가짜인 게 뻔히 보이는 곰 가죽, 가랑이에 ‘Happy Thing’이라고 적혀져 있는 삼각팬티 등등…….
대부분이 그런 건 무시했다.
최대한 무난한 복장들을 골랐다. 몸에 페인팅을 해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녀석도 있었다.
잠시 서있던 나는, 이내 옆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걸 느꼈다.
시나였다.
“어때?”
그는 곰 가죽(가짜)을 뒤집어썼다. 실제로 쓰는 놈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시나는 포기하지 못했다.
“아니, 기믹도 설명해줄게. 그리스 신화의 영웅 허큘리스!”
“유치해.”
“……바꿔올게.”
그가 시무룩해 돌아섰다.
말 그대로 유치한 기믹이었다.
지금은 2000년대다. 저런 만화적인 기믹은 80년대에서 90년대 초 사이에 거의 사장됐다.
그때만 하더라도 치과의사 기믹이나 도둑 기믹, 회계사 기믹 같은 게 유행했지만, 그 대부분이 업계의 저편에 묻히게 되었다.
‘지금껏 살아남은 건 장의사 기믹이었던 캐스켓-테이커 정도지.’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프로레슬링이 진짜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즐기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는 안 먹혀.’
앞으로는 더 안 먹혔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각종 사고들이 이어지며 업계의 비밀이 공공연연하게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말 그대로 프로레슬링 자체를 순수하게 즐기는 대상도 있다.
바로 어린아이들이었다.
하지만 그쪽을 팬층으로 노리고 내 기믹을 만들기에는 넘어서기 힘든 큰 벽이 존재했다.
바로 눈앞에.
‘챔피언’ 숀 시나.
“이건 어때?!”
지금 내 앞에 태양의 형상을 한 가면과 달 표면 문양의 망토, 중앙에 큼지막한 별이 새겨진 팬티를 입고 나타난 미래의 슈퍼스타.
와.
어쩜 이렇게 거지같은 것만 모아서 가져올 수 있는지 모르겠다.
“…….”
“아, 알겠어.”
그가 돌아갔다.
‘대체 무슨 기믹이었던 거지.’
나는 의아해 그의 엉덩이에 새겨진 두 개의 별을 바라보았다.
‘뭘 생각한 걸까.’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내가 활동하던 마지막 시기쯤에 저런 옷을 입고 나갔다가는 저 복장 그대로 박제되어 영원히 유츄브 따위를 떠돌아다닐 게 분명했다.
그러자니 옆에서 레슬링 기어를 입은 러셀 하트가 다가왔다.
“기믹 안 생각해뒀어?”
“마지막으로 정리 중이었지.”
나는 그를 돌아보고는 복장을 통해 곧바로 그 기믹을 이해했다.
‘하트 가문의 프로레슬러’.
아마추어 레슬링에서 모티브를 따온 상하의가 연결된 복장.
니패드와 엘보우패드, 레슬링 부츠. 삼촌인 그렉 하트의 젊은 버전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명치 부분에 하트 패밀리의 상징인 ‘라이트닝 윙’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본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가져온 거야?”
“그래, 이게 내 복장이야.”
“멋진데.”
이게 내가 말하는 기믹이었다.
현실과 환상의 갭이 거의 없는 기믹. 그 레슬러의 인생 역정을 그대로 담아낸 듯한 캐릭터.
다소 과장될 수는 있다.
하지만 러셀이 하트 패밀리의 프로레슬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거라면 딱히 오버 떨지 않아도 가문의 역사를 등에 짊어지고 싸운다는 개성이 부가되었다.
‘역시 이걸로 나오시겠지.’
그리고 나는 거기에 대립하는 자로서 나를 어필할 생각이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준호 킴. 한국계 이민자 2세.
백야드 레슬링 출신의 양아치.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있는 비겁한 악당.
여기에서 인종적인 모습은 최대한 배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빼놓을 생각은 없었다.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입체적이지 않은 캐릭터는 결국 녹이 슬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쓸 아이디어는 아닌 것 같고…….’
러셀과의 ‘대립’에 이용하기 위한 기믹은 단순해도 괜찮겠지.
하트 가문에서 케어를 받으며 성장한 금수저와 러셀 하트의 정반대편에 위치한 흙수저.
‘복장도 적당히 입자.’
WWF에서나 따지지, 그 바깥의 소규모 인디단체들은 평소에 입는 옷을 그대로 입기도 했다.
청바지와 검은 러닝셔츠.
니패드나 엘보우패드도 필요 없다. 스포츠 테이프를 팔목에 둘둘 감아 대강 관절을 보강했다.
그래도 신발은 레슬링 부츠를 신었다. 이게 아니면 링 위에서 미끄러져 실수가 나오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킷이다.
검정색 가죽 재킷.
좀 컸지만 뭐, 쇼에서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가죽 재킷을 입는 캐릭터라는 걸 보여주면 괜찮았다.
그렇게 입고 돌아서자 모두가 날 의아해 바라보고 있었다.
“……?”
“영화 찍나.”
“저게 뭐야.”
‘……니들 꼴이 더 우스워.’
세상은 세련된 트렌드를 원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았다.
아, 러셀은 제외하자.
업계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그는 그 존재만으로도 명확히 빛나는 개성이 있었다.
하지만 시나는 여전했다.
‘아니, 저 자식은 또 웬 고양이 옷을 입고 있는 거야?’
근육질의 거한이 무슨 스트립쇼의 댄서 같은 모습을 하고 서있었다. 머리에 단 저 고양이 귀는 좀 떼어줬으면 좋겠는데.
그 외에도 죄다 이상했다.
‘……저런 놈들과는 어떻게 대립을 쳐야 할지 모르겠군.’
나는 유두에 별 모양 패치를 붙인 사내를 보며 생각했다.
왜 이 업계 놈들은 별을 이렇게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군.
어쨌든, 이런 놈들 사이에 있으니 평범한 바이커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이 더 튀었다.
돌아보자 바쿠 역시도 그런 생각인 듯 쓰게 웃어 보였다.
“매드 맥이냐? 아포카토 영화.”
“아포카토는 커핀데요.”
“아, 그런가? 뭐, 아무튼……. 다들 자기 기믹에 대해서 하나하나씩 설명 좀 해봐라.”
그는 의자를 들고 와 나란히 서있는 스무 명 앞에 앉았다.
그 뒤로 선 것은 GCW의 각본가들과 의상팀의 팀원들이었다.
‘얼굴만 봐도 알겠군.’
안경을 쓴 깡마른 체격의 사내들. 근육질의 트레이너들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너부터.”
바쿠가 지목하자 가장 앞으로 밀려난 시나가 앞으로 나섰다.
나는 얼룩덜룩한 고양이 귀를 달고 있는 숀 시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거대한 가슴을 쫙 펴고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어, 제 기믹은 타이거입니다.”
“……?”
“호랑이와 같은 근력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이죠.”
“그거 고양이 귀잖아.”
“예?”
“분명히 여자 선수들 용이었을 텐데 누가 넣어놓은 거야.”
“……예?”
“다음.”
바쿠는 잔혹했다.
시나가 시무룩해 뒤로 물러서고 그 뒤로 다른 사내가 나섰다.
아까 그 유두 패치 놈이다.
‘무슨 설정이지.’
정말 궁금했다.
“저는 흉근이 빛나기 때문에 장식으로 가려둔다는 기믹의…….”
“다음.”
바쿠와 내 의견이 일치했다.
다들 프로레슬링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70-80년대의 황금시대는커녕, 그보다 훨씬 전에도 안 쓰일 기믹이었다.
“동양에서 온 무술 고수…….”
“너 백인이잖아. 다음.”
“블랙 팬더입니다.”
“표절 시비 걸려. 다음.”
“뭐든지 완벽하게 해내는 ‘미스터 퍼펙트’ 기믹의…….”
“이미 있는 거야. 다음.”
줄줄이 탈락했다.
그리고 남은 건 나와 러셀뿐이었다. 우리 둘을 흥미롭다는 듯 보던 바쿠가 러셀을 지목했다.
“저는 하트 패밀리에서 태어나 아버지와 삼촌의 레슬링을 보면서 자란 청년 기믹입니다.”
그 자신이었다.
여기서 재차 명확히 해두자.
레슬링의 기믹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희미하게 하는 쪽으로 발달했다. 서커스 같은 쇼에서 하나의 장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쿠에서 ‘다음’이라는 사인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어깨를 곧게 펴고 당당하게 말하는 러셀을 바라보았다.
“캐나다 출신으로, 남들에게 제 레슬링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바쿠는 조금 미묘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 역시도 그랬다.
하지만 러셀은 그대로 자신의 기믹에 대한 소개를 끝마쳤다.
‘그렉 하트하고 판박이잖아?’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뒤로 물러서는 러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라는 듯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침묵했다.
그 뒤.
“다음.”
바쿠의 말에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앞으로 나섰다.
‘일단 집중하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다들 내 기믹에 대해서 꽤나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이 정도면 반은 먹힌 셈이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뭐, 저는 딱히 특이한 컨셉은 아닙니다. LA 출신이고, 학교 졸업하고 곧장 캠핑카 하나 끌고 전국을 다니며 세상 공부를 했죠.”
나는 있는 그대로 내 인생 격정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굳이 ‘인디에서 뛰었다’라는 사실을 말하진 않았다.
WWF에서 금기시 되는 사실 중 하나가 외부의 레슬링 단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었다. 자칫 홍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팔도 부러져봤고, 살도 꿰매어봤죠. 강도도 당해봤고. 총알도 피해봤고. 별 꼴 다 봤죠.”
나는 어느새 기믹과 반쯤 동화되어 연기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배운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겁니다. 누군가는 비겁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패배자들이 짖는 소리일 뿐이죠.”
바쿠가 휘파람을 불었다.
“저는 이 회사에서 거물이 될 겁니다. 돈, 여자, 명예. 그 모든 걸 손에 넣기 위해서.”
나는 내가 왜,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지를 말했다. 기믹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입을 다물었다.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들이었다. 마치 몇 년 뒤 나올 스마트폰을 처음 본 사람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 앞에 서 있는 심사위원들은 모두가 전문가들이다.
곧, 내가 제시한 캐릭터가 가져올 업계의 ‘혁신’에 대해 어렴풋이 느낀 얼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