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눈앞에 서있는 숀 시나는 아직도 바쿠가 했던 말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눈치였다.
“고양이라고……?”
왜 굳이 그쪽에 집착하는지는 모르겠다. 이미 충분히 차고 넘칠 정도로 ‘타이거’도 구렸는데.
왜 호랑이지?
호랑이 힘이 솟아나나?
아니면 아메리카 원주민의 종족인 호랑이 부족 출신인가?
그와 같은 내 물음에 시나는 좀 갑작스럽다는 듯 대답했다.
“……별생각 없었는데.”
“그럼 왜 타이거로 한 거야?”
“사, 사실 처음에 떠올렸던 허큘리스 기믹이 제일 좋았는데. 중, 네가 영 아니라고 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태양, 달, 별 기믹을 거쳐서 왜 점점 구려지는 건데?”
“아니, 태양과 달과 별의 힘을 받아서 싸우는 전사라는 건데.”
바로 그거로군.
엄청나게 구리다.
“요즘 프로레슬러들 중에 그런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기믹을 가진 사람이 있어?”
“캐, 캐스켓-테이커?”
“80년대에 데뷔했잖아.”
“그래도 지금까지 활동하잖아!”
“사람들은 이제 장의사라기보다 20년 동안 WWF에 헌신한 베테랑으로 그를 이해하고 있지.”
내 말에 시나는 입을 다물었다.
“현실적으로 네 삶을 기믹에 담아내란 말이야. 아주 똑같을 필요는 없어. 과장을 해도 되지. 아니면 그런 외양에서 따오거나.”
“음, 그러면…….”
고민하던 시나가 자신의 근육으로 만들어진 팔을 툭툭 두드렸다.
“내가 몸이 좋잖아? 굉장히.”
“그렇지.”
슬슬 답이 보이는 듯했다.
시나는 GCW 시절, ‘사이보그’라는 기믹으로 활동했었다.
터미네이터에서 따온 ‘감정이 없는 차가운 인조인간’ 기믹이었다.
사실, 그건 해석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재밌어질 가능성이 있다.
기믹에서 그 캐릭터의 목적만큼이나 중요한 건 확장성이었다.
예를 들자면 이건 어떨까?
‘사이보그’가 진짜 사이보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감정이 없는 기계처럼 자신을 단련하는 무뚝뚝하지만 가슴 속에는 따뜻함을 가지고 있는 사나이라면 어떨까?
그런 스토리는 먹힐까?
‘분명 먹힌다.’
나는 웃었다.
“근육을 사랑하는…… 머슬 러버라는 악역 컨셉은 어떨까?”
하지만 시나는 그런 내 기대를 훌륭하게 배신했다.
“제기랄.”
아직 갈 길이 먼 듯했다.
바쿠가 재심사를 보겠다고 말한 사람은 나를 제외한 모두였다.
그래, 러셀 하트까지도.
‘괜찮나?’
나는 벽 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러셀의 방은 우연찮게도…… 아니, 사실은 탈락자가 속출하며 옮긴 바람에 바로 내 옆방이었다.
그런데, 평소에는 자주 놀러오던 녀석이 오늘 기믹 테스트가 끝난 후로 통 소식이 없었다.
‘좀 신경 써서 봐야겠군.’
그 역시도 나름 생각이 있어서 그런 기믹을 제시한 것일 텐데.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좀 어설펐다. 바쿠나 다른 사람들도 그리 생각해서 재심을 내린 거겠지.
어쨌든.
“슬슬 잘까.”
나는 졸음이 밀려드는 것을 느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민에 빠져있던 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잠은 충분히 자둬야지. 아니면 근손실 오거든.”
몸 관리와 연관되어서는 철저한 모습을 보이는 시나의 면모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 덕분에 나도 몸 관리를 잘하고 있는 거긴 하지만.’
복근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팔도 원래보다 훨씬 두꺼워졌다. 어깨도 그렇고. 원래부터 체격 자체는 나쁘지 않았던 만큼 금방금방 근육이 붙고 자랐다.
‘젊은 영향도 있겠지.’
뭐, 좋은 일이었다.
내일 기상은 새벽 4시.
우리는 그때 운동을 시작했다.
* * *
고요한 새벽.
창문 너머로 숲이 보였다.
나는 트레드밀 위를 힘차게 내달리고 있었다. 계기판(?) 위에는 15.0이라는 숫자가 표시되었다.
고요한 체육관 안에는 내가 쌩쌩거리며 달리는 소리만이 울렸다.
잠은 진작 깼다.
몸이 내는 소리에 집중하며 운동하는 건 무척이나 상쾌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미래를 그릴 수 있기 때문에 더 그랬다.
나는 젊어졌다.
가능성이 있다.
‘할 수 있다.’
머릿속으로는 자기 암시에 가깝게 끝없이 긍정적인 말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회가 돌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기회가 있을 때는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그 벽을 넘을 방법을 찾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졌다.
그렇다고 그 벽을 넘을 방법을 찾았을 때는 너무 늦은 뒤였다. 실패의 흔적에 얼룩져 더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난 수많은 무기를 갖췄다.
‘여기서도 실패한다면, 원래 그런 그릇이었다는 거겠지.’
때문에 비참한 성적표를 피하기 위해 노력할 마음이 생겼다.
15.0으로 3분간 달리고.
1분간은 7.0으로 속도를 내려 빠른 걸음을 반복했다.
그렇게 1시간째, 나는 뒤쪽에서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음……. 으음.”
시나는 고민에 빠졌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뭔가를 계속 생각했다. 울퉁불퉁한 근육을 보며 고민을 거듭했다.
‘힌트를 좀 줄까?’
이쪽 역시도 빼지 않고 운동에 대한 모든 지식을 받고 있으니.
나는 트레드밀의 속도를 줄이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프로틴 셰이크를 마시며 다가가자 시나가 놀라 날 돌아보았다.
“크흠, 한 시간 다 채웠으면 다음 운동으로 넘어가자고.”
“하, 이거 정말로 힘든데.”
“원래 운동이라는 게 그렇지.”
“이런 운동을 매일 반복해서 몸을 만들다니. ‘차가운 기계’도 아니고 인간이 어떻게 그래?”
“하다보면 되는 거지.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게 제일 중요해.”
‘……이 녀석. 눈치가 없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말은…… 시나. 네 모습이 좀 그렇게 느껴진다는 거지. 콜드 머신.”
“응?”
‘됐나?’
“하하! 그래, 냉정하게 운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
또 실패했다.
뇌마저 근육으로 된 모양이었다.
나는 시나의 도움을 받아 프레스 머신을 한 세트씩 돌렸다.
비 오듯 땀이 흘렀고, 근육에 기분 좋은 통증이 몰려왔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몸을 자극했다.
나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아예 제대로 된 힌트를 주었다.
“콜드 머신. 그게 너야.”
“어, 그거 설마…….”
“그래, 네 기믹으로 하라고.”
“콜드 머신. 호오…… 아이스맨……. 차갑게 얼린 아이스…….”
“아니, 제기랄.”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네 몸 자체가 그렇다고. 시나. 그렇게까지 갈 필요는 없어.”
나는 시나의 단단한 어깨를 툭 두드렸다. 때린 팔이 튕겨져 나올 정도로 단단한 근육이었다.
“사이보그. 네 링네임이야.”
“사이보그…….”
시나는 마음에 든다는 눈치였다.
“팬츠는 파란색?”
“……그런 건 상관없다고.”
아직도 내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 * *
다소 어리바리한 구석이 있었지만, 시나는 그것을 모조리 상쇄할 정도로 엄청난 노력가였다.
“사이보그, 사이보그.”
내가 한 말을 끝없이 중얼거리며 자신의 기믹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그 과정을 조금 즐겁게 지켜보았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자문을 구할 때마다 성심성의껏 이끌어주었다.
하지만 반대로, 러셀은 무슨 이유에선지 고집을 부렸다.
지망생들은 그 뒤로 각종 기술들을 연마하며 개인적으로 바쿠에게 기믹을 검사 받기 시작했다.
개중에서 한 명씩 통과를 받는 놈들이 나왔지만, 러셀은 바쿠가 특혜를 부려 직접 기믹에 대해서 물어볼 때마다 무감정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는 이 기믹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트 가문 출신의 레슬러. 이게 저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바쿠도 좀 건드리기 곤란한 눈치였다. 섣불리 기믹에 뭔가를 추가하라고 할 수도 없으니까.
그것도 분명히 러셀의 인생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니만큼.
‘대체 왜 저러지?’
하지만 그 외에 그는 쿨했다.
시나에게도 평소와 같이 레슬링 스킬을 가르쳤으며, 딱히 우울해하는 면모를 보이지도 않고 우리들과 평소처럼 잘 어울렸다.
그냥 넘겨도 되겠지만 나는 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러셀 하트와의 대립을 통해 나 자신을 증명하고자 이 시험을 치르고 있는 것이니까.
그것은 분명 내 커리어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고, 사람들이 나에게 느끼는 신뢰를 더해줄 터였다.
‘내가 지금부터 할 일이 업계의 혁신을 가져오는 일인 만큼 그 신뢰는 무엇보다도 중요해.’
프로레슬링은 보수적인 업계다. 하지만 위기 앞에서는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 위기마다, 나는 나 자신이 알고 있는 혁신을 더해 차근차근 위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할 수 있어.’
그리고 문제는, 숀 시나가 자신의 기믹을 발표할 때 찾아왔다.
오후 훈련이 끝난 뒤 늦은 밤.
이제는 다들 열성적으로 훈련에 임하는 이들밖에 남지 않았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는데 모두가 훈련장에 모였다. 바쿠는 그게 기분이 좋았는지 조명도 켰다.
선수를 돋보이게 하도록 만들기 위한 프로레슬링의 조명.
문 사이에서 누군가 들어왔다.
그리고 음악이 시작되었다.
‘언제 저런 걸.’
쿠궁, 쿵쿠궁, 하는 터미네이터 메인 OST.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넓게 벌린 시나는…… 놀랍게도 정상적인 차림새였다.
장식은 없이, 넓은 사각 팬츠를 입었다. 넓은 턱을 굳게 다문 채 링으로 들어온 그가 섰다.
그리고 마이크를 쥐었다.
……나 때는 저런 거 없더니.
시나는 높낮이가 거의 없는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사이보그다.”
그 말을 들은 바쿠는 처음에는 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이 근육으로 된 몸을 봐라. 이게 나다. 나는 아무런 자비심도 없이 눈앞의 적을 박살 낼 수 있지. 그걸 위해서 이 몸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어진 시나의 ‘마이크워크’는 나도 순간 놀랄 정도였다.
‘저게…… 재능이군.’
그는 달변가였다.
Mic-Work. 마이크로 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주둥이를 털어 나를 알리고, 관객들의 혼을 빼놓고, 상대방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것.
시나는 그것에 천부적이었다.
……순간 사람이 어딘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나 싶을 정도로.
“거기 돼지. 탈락. 거기 말라깽이. 탈락. 모조리 쓰레기 같은 몸을 가지고 있군. 평생 콜라만 처먹다 그런 몸을 가진 건가?”
‘……와. 쩐다.’
레슬러로서 좋은 재능이기는 했다. 여기는 필요하다면 자기 부모라도 욕해야 하는 업계였으니까.
“이, 이상입니다.”
그러더니 부끄러워한다.
마침 콜라를 손에 쥐고 있던 바쿠는 머쓱한 듯한 시나를 보고는 표정이 좋지 못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쾌활하게 웃었다.
“합격이다. 사이보그. 이 기분 나쁜 괴물 자식. 요 며칠 사이에 제대로 된 기믹 하나 만들어왔군.”
“가, 감사합니다!”
“나머지는 뭐 없나? 이것들아. 기믹이란 건 이렇게 자신의 개성이 들어가 있어야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한 그는 훈련장의 구석에 서있던 러셀을 돌아보았다.
“넌 뭐 없냐?”
‘이걸 또 갈군다고?’
순간 좀 놀랐지만, 오히려 이게 바쿠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 상황을 넘지 못한다면 러셀은 아직 프로가 될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었다.
잠시 침묵하며 서있던 러셀은 이내 우리들을 향해 다가왔다.
“올라가도 될까요?”
“얼마든지.”
오히려 바쿠는 등을 떠밀었다.
시나에게서 마이크를 받은 러셀이 링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 표정은 줄곧 긴장한 채였다.
‘모르는 것 같군.’
나는 머릿속에 있는 러셀의 WWF 커리어를 잠시 생각했다.
말했듯, 러셀이 ‘거물’로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사내 정치 싸움에서 힘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근거는 분명…….’
삼촌의 그림자가 커리어 내내 항상 따라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를 폄하하던 WWF의 한 프로레슬러는 항상 ‘더 나은 삼촌이 있는데 굳이 저런 마이너 카피를 밀어줄 필요가 있어?’라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지금의 나에게는 무척 도움이 되었다.
‘여기서는 좀 도박을 걸어볼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어렵사리 입을 떼는 러셀을 바라보았다.
“어, 저는…….”
“마이너 카피지.”
그리고 녀석이 가장 싫어할 말을 입에 담으며 말을 끊었다.
좋아.
‘대립’을 시작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