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마이너 카피지.”
그 말을 들은 그 자리의 모두가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바쿠마저도 매너가 없는 행동에 눈썹을 찡그릴 정도였다.
이 업계는 서로에 대한 매너와 신뢰가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내 행동은 그 룰을 깬 것이었다.
지금 당장 엉덩이를 걷어차여 내쫓겨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보아온 러셀 하트를 믿자고 생각했다.
확실히 재능과 실력을 겸비한 그라면, 지금 내 행동이 철저한 ‘각본’임을 이해할 터였다.
“왜들 그렇게 쳐다봐? 틀린 말도 아니잖아. 저 자식은 지금 메인 쇼에서 활동 중인 삼촌, 그렉 하트의 마이너 카피에 불과하다고.”
“……뒷골목 출신이 말은 많군.”
일부러 WWF에서 금기시되는 ‘백야드’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말인즉슨 러셀 역시도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조금 당황한 눈치였지만 그렇게 대답한 러셀은 마이크를 든 채 내게 손가락을 까딱거려보았다.
“불만이 있으면 올라와라.”
“얼마든지.”
나는 고개를 까닥거리다 이내 일어서 링 위로 올라갔다.
페이스 투 페이스.
단순히 얼굴을 대면한다는 뜻이었지만 프로레슬링 업계에서는 좀 더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다.
‘대립’을 하는 두 선수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노려보며 긴장감을 연출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주먹질.
서로에 대한 모욕.
김빠지게 악역이 도망치거나.
누군가 난입하거나.
관객들은 대부분 그런 상황을 기대하며 마음을 졸이고 두 선수의 페이스 투 페이스를 지켜본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무대에 올라선 나는 러셀 하트의 앞에 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러셀은 185cm였다.
때문에 188cm인 나는 다리를 아주 미묘하게 벌려 그와 내 키를 엇비슷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가장 핫한 두 선수.
언더그라운드에서 올라온 준과 하트 패밀리의 아래에서 철저하게 훈련되며 자라온 러셀 하트.
과연 이 두 사람이 프로레슬링을 펼친다면 누가 이길까?
혹은 더 나아가, 회사나 팬, ‘나’는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
그것이 프로레슬링의 재미였다.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쇼.
그리고 이번 페이스 투 페이스는 ‘난입’으로 끝나려는 듯했다.
정말로 나와 러셀이 싸운다고 오해한 시나가 링 위로 올라왔다.
“자, 잠……!”
“숀 시나.”
하지만 팬이 그걸 제지했다.
바쿠였다.
“지금 당장 링 아래로 내려와라. 좋은 그림 방해하지 말고.”
그는 러셀이 나를 링 위로 불러낸 시점에서 지금의 상황이 연출된 각본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건방진 두 루키가 현실을 무너뜨리고 쇼를 세운 것이었다.
거기에 머뭇거리던 시나가 링 아래로 내려왔다. 나는 바쿠와 함께 온 프로듀서에게서 마이크를 받아 곧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왔는데. 뭐 할 말 있나?”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데. 내가 내 삼촌의 마이너 카피라고?”
“똥 싸는 자세로 샤프 슈터나 대충 싸갈기고 게이 같이 입는다는 점에서 비슷하긴 하지. 하지만 넌 그만큼의 카리스마가 없어.”
“뒷골목에서 술에 취해 자란 탓인지 명예나 유산에 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그런 것이 네가 마이너 카피에 불과하단 사실을 감춰주나?”
“아니지. 그건 내가 행동해야 할 이유와 의지를 만들어주는 거다.”
거기까지 말한 러셀은 스스로도 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기 자신도 알아채지 못하던 일면을 알게 된 모양이로군.’
그제야 왜 러셀이 자신의 기믹을 그렇게 말했는지가 이해됐다.
러셀은 스스로도 너무 뛰어난 삼촌의 그늘에 묻혀서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이너 카피? 그럴 수도 있지. 그렉은 위대한 아이콘이니까. 하지만 나는 언제나 내 심장에 한 단어를 새겨놓고는 하지.”
러셀은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그렉 하트를 뛰어넘는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뛰어넘었듯이. 그리고 그 유산을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 내 목표다.”
“그렇다면 나는 그 꿈을 부숴주마. 네게 뒷골목에서부터 절절히 배워온 현실을 가르쳐주겠어.”
“해볼 테면 해보시지.”
“언제?”
“마지막 주에 있잖아? 우리 결착은 그때 짓는 걸로 하자고.”
“가족들한테 남길 ‘유산’이나 정해두고 오는 게 좋을 거다.”
짝, 하고 박수가 쳐졌다.
바쿠였다.
“아주 멋진 세그먼트로군.”
링 세그먼트Ring Segment.
하나 이상의 선수가 스토리를 심화시키기 위해 링 위에서 하는 행위 전반을 뜻했다.
“그래, 그래. 내가 졌다. 이 건방진 애송이 놈들. 확실히 대립을 통해서 캐릭터가 발달하는 게 프로레슬링의 차밍 포인트지.”
낄낄거리며 웃은 바쿠가 링 아래로 다가와 손을 뻗었다.
“그래서, 누가 베이비 페이스(선역)고 누가 힐(악역)이냐?”
“그건 관객들이 정하겠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말이었다. 바쿠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관객들이 정한다고……?”
“예, 저희는 설득력 있게 기믹을 포장할 테지만, 그와는 별개로 받아들이는 건 관객의 몫이죠.”
나는 러셀을 돌아보았다.
그 캐릭터는 나와의 대립을 통해 발달해 개성을 갖게 되었다.
단순히 ‘하트 가문 출신의 프로레슬러’에서, ‘최고인 삼촌을 뛰어넘으려는 젊은 조카’가 더해졌다.
기본적으로는 선역 롤이다.
아마 가족 단위로 시청하는 층에서는 러셀을 좋아하겠지.
하지만 그런 녀석을 싫어하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주로 젊은 층에서 구닥다리에 재미가 없다고 폄하하겠지.’
그리고 그런 부작용을 생각하며 유동적으로 롤에 변화를 주는 것이 바로 ‘부킹’이란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아직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팬들의 반응이 아직 미지수였기에.
내 말을 이해한 바쿠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이내, 그는 뒤쪽에 서있던 지망생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봤냐? 이게 바로 ‘기믹’이라는 거다. 배울 점이 많았으니 절대 기억에서 지우지 말도록.”
‘옙!’ 하고 동시에 대답하는 소리가 훈련장을 가득 채웠다.
* * *
그 후로 며칠이 지났다.
훈련은 평소와 같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기믹이 확정된 사람들만이 추가적으로 발성과 연기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기믹을 정하지 못한 지망생들은 점차 도태되었고, 실적이 좋지 못한 자들은 탈락해 돌아갔다.
그렇게 열 사람까지 줄었다.
떠난 사람을 뒤로한 채 우리는 계속해서 훈련에 매진했다.
합격자 라인 안에 포함된 나와 시나, 러셀은 배는 더 노력했다.
남들이 쉴 때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더 단련했다.
나는 관객에게 보일 몸을.
러셀은 기믹의 심화를.
시나는 계속해서 기초를.
그런 와중 한 가지 특기할 만한 부분은, 나와 러셀이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나는 곧바로 그런 행동이 뜻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러셀은 오래전에 희미해져버린 업계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었다.
‘케이페이브’.
실제 생활에서조차 각본의 역할을 계속 수행하는 것을 뜻했다.
쇼의 흥미와 현실감을 더해주기 위한 장치였다. 지금에서야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게까지 빡빡하게 케이페이브를 지키진 않았지만.
효과가 없지는 않은 듯했다.
“……둘이 사이 괜찮지?”
새벽에 체육관에서 단둘이 있을 때면 시나는 그런 식으로 걱정스러운 듯 묻고는 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준, 요새 별일 없지?”
“표정 좀 풀고 웃고 다녀.”
“나중에 맥주나 한 잔 하자고.”
트레이너나 같은 지망생들. 식당에서 친해진 홉스 부인. 모두가 은근히 나와 러셀의 관계에 관해서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하지만 우리는 괜찮았다.
……정말 괜찮은데, 왜 나는 밴에 올라타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바로 옆에는 케이페이브를 지키고 있는 러셀과 함께.
“자, 다 같이 부르자고!”
그리고 왜 바쿠 영감은 아까부터 컨츄리 뮤직을 틀고 함께 노래를 부르자고 강요하는 걸까.
마치 이 ‘너희 둘이 서로 감정 상해있는 거 아니까 얼른 풀어!’라고 말하고 싶은 듯이 말이다.
게다가 바쿠는 노래를 정말 못 불렀다. 사람의 머리를 지끈거리며 달아오르게 만들 정도로…….
“컨트리 로드여~ 나를 집으로 데려가주시오~ 웨스트 버지니아의 마운틴 마마여~.”
‘……미치겠군.’
이 사람들 왜 이렇게 섬세해.
그리고 이쯤 되면 러셀도 케이페이브를 풀고 상황을 설명할 법도 한데 왜 가만히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힐끔거리며 러셀을 돌아보았다.
그는 노래가 마음에 들었는지 꼰 다리 위로 손가락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아니, 설마.’
진짜로 삐졌나?
프로레슬러가?
무대 위의 일로?
“그럴, 리가…….”
“뭐라고 말했냐! 준!”
“아, 아뇨! ……근데 저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바쿠?”
“윌~마트~ 테잌미 윌마트~!”
미치겠군. 바쿠가 컨츄리 뮤직에 맞춰서 말하기 시작했다.
잠시 이마를 짚고 신음하던 나는 운전석의 바쿠를 노려보았다.
“윌마트는 왜요.”
“이번 주에 너희 훈련 끝나면 먹일 사료 좀 사러 가는 거다.”
“그걸 바쿠 당신이……?”
“뭐 문제 있나?”
“저희는 왜 가는 거죠?”
“짐을 들어야 하니까.”
“그러니까 왜…….”
“싫으면 차 돌릴까?”
바쿠의 팔에 매달린 거대한 힘줄이 한순간 꿈틀거렸다.
“아뇨, 오랜만에 나와서 바람도 쐬고 아주 좋군요.”
창문을 드르륵 연 나는 그냥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확실히 좀 쉴 때긴 했지.’
요새 들어 훈련량이 더 늘어났다. 온몸의 근육이 쉴 새도 없이 계속해서 혹사를 당했다.
‘그래도 시나가 보조를 해줘서 부상 같은 건 조심하고 있는데.’
한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건 정신적으로 피로했다. 그 위에서 내려와 달아오른 몸을 식힐 필요도 있는 것이었다.
“콜라나 마실까.”
그렇게 중얼거린 직후, 나는 바로 옆에서 시선을 느꼈다.
돌아보자 창가에 턱을 괴고 있던 러셀이 웃고 있었다.
그 입술이 움직이며 ‘고카콜라?’라고 소리 없이 물어봤다.
‘……이 자식이.’
케이페이브도 정도가 있지.
무슨 비밀로 사내 연애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순간 어깨가 오싹해지는 걸 느끼며 대답했다.
‘펍시.’
하지만 이내 웃었다.
낡아빠진 밴은 국도를 내달려 근처의 마을로 향했다. 숲길이 이어지는 가운데 곰이 보였다. 평범한 미국의 해질녘 풍경이었다.
그렇게 달려 밤이 다 되어서야 우리는 윌마트에 도착했다.
“자자, 내리고.”
바쿠는 과도하게 신경 써주는 유치원 선생처럼 우리를 이끌었다.
차에서 내린 러셀은 또 입을 다물어, 나는 이 부담스러운 공기를 그냥 즐기자고 결심했다.
어둑한 마트 주차장.
미국은 그다지 치안이 좋은 편이 아니라 해가 딱 떨어지면 사람들이 바로 집에 틀어박혔다.
우리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바쿠가 권총을 하나 가져왔다.
‘그래도 설마 뭔 일 있겠어?’
범죄자들의 타깃이 되는 건 뭔가 가진 것처럼 보이는 약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가진 게 근육밖에 없었으므로 딱히…….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막을 내렸다.
‘이런 상황이 올 수도 있었군.’
범죄를 당하는 게 아니라, 그 상황의 목격자가 되는 것이었다.
저 멀리 주차된 SUV 앞.
남자 넷이 한 남자를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고 있었다.
그 옆에는 폭행당하는 남자의 부인과 자식들로 보이는 세 사람이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었다.
평소라면 슬쩍 빠져서 도망치는 게 일반적이겠지만…….
“……뭐야, 저 XX끼들?”
말했듯, 나와 함께 있는 바쿠는 절대 화나게 해서는 안 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