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창문에 쳐진 블라인드를 툭 눌러 바깥을 확인하자 건물 아래에 서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각 팀장들과 할리 레이시였다. 그들은 감사의 인사를 위해 찾아온 기자, 로빈 코너에게 반쯤 억지로 시설을 안내하고 있었다.
로빈은 갑작스레 상황이 이렇게 되자 좀 당황한 눈치였지만, 근육질의 사내들 앞인 터라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각 시설의 사진을 찍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다고 느낀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
그래서 상황이 이렇게 된 나는 어떻게 하고 있었냐면.
방으로 돌아왔다.
조금 전에 막 내 레슬링 기어가 배달 온 참이었다. 선풍기가 털털 돌아가는 가운데, 나는 그것을 어이가 없어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시합이라고?’
준비도 안 됐는데?
기회를 잡으려는 마음은 알지만 다소 당황스러웠다. 어디 촌구석의 흉내만 낸 프로레슬링도 아니고.
우리가 서로에 대해 잘 아는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분명히 이 시합은 실패로 끝날 게 뻔했다.
‘오후에 시작한다고 했지.’
두 시간 정도 남았다.
나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자 눈썹을 찡그린 바쿠가 막 러셀의 방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바쿠?”
“어, 너냐.”
“여기서 뭐해요. 저 기자 양반 안내 안 해줘도 됩니까?”
“거야 뭐, 나머지 녀석들이 알아서 하겠지. 하, 근데 야. 너 말 너무 심하게 한 거 아니냐?”
“왜요?”
“너희 둘이 곧 시합인데 러셀 저 자식. 뭐에 꽁했는지 알아서 하겠다면서 입을 다물고 있어서.”
“……사내끼리는 땀을 흘리며 풀어야 할 문제도 있는 법이죠.”
“네가 어련히 잘하겠지 싶지만. 하다가 진짜로 싸우지는 말고.”
“물론이죠.”
내가 싱긋 웃자 바쿠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날 지나쳤다. 아니, 그러다 이내 뭔가 떠올린 듯 말을 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예?”
“너 링네임이랑 피니시 무브는 뭘로 할 거냐.”
“링네임은 일단 그대로 준으로 가죠. 피니시 무브는…….”
나는 무릎을 때렸다.
“이걸로 가죠.”
“무릎?”
“니 킥이요.”
“왜? 노던 라이츠 밤으로 하지 않고. 아주 능숙하게 쓰던데.”
“그건 너무 위험하잖아요.”
나는 쓰게 웃었다.
아쉬운 듯 나를 바라보던 바쿠가 이내 돌아섰다. 그가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 기다린 나는 러셀의 방문을 쿵쿵 두드렸다.
“들었지? ‘무릎’이라고.”
“……들어와.”
문이 휙 열렸다.
그와 함께 튀어나온 러셀의 팔이 나를 안으로 휙 이끌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인가.’
나는 소년처럼 웃고 있는 러셀을 보고 쓰게 웃었다. 녀석은 의자를 빼다 내 앞에 휙 밀었다.
“빨리 정하자.”
경기의 내용이었다.
위쪽에서 얼마의 시간이 주면, 선수들은 크게 ‘스팟’이라고 불리는 지점을 정해 경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미리 정해두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경기 시간은 10분. 평균적인 시간이었다.
‘이것이 지망생들 간의 경기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좀 길지.’
하지만 러셀과 나는 그보다 더 긴 경기도 소화할 수 있었다.
의자를 받아 앉은 나는 침대 위의 녀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단, 누가 이기는 거야?”
“우리 보고 정하라던데.”
“……뭐?”
“자기도 기대하면서 지켜보고 있겠다고 하더라. 어떻게 할까?”
“글쎄…….”
“네가 이기는 편이 좋겠어.”
러셀은 진지하게 말했다. 뜻밖의 답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통 이렇게 스토리와 상관이 없는 종류의 경기에서는 선역이 이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내가? 왜? 네가 선역이잖아.”
“하지만 아직 루키지. 너는 뒷골목…… 인디에서 온 베테랑이고.”
“나보고 탑독 운영을 하라고?”
“그래, 내가 언더독으로 비춰지는 편이 좋겠어. 네가 좀 비겁하게 나와서 관객들이 날 동정하게.”
‘이 자식도 참 물건이군.’
마음에 드는 내용이었다.
서로의 캐릭터에도 맞았다. 거기다 향후 스토리도 기대가 됐다.
우리가 이걸로 GCW에 합격한다면, 바로 지역 방송국에 송출되는 TV쇼에 나가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의 시나리오였다.
스팟을 정하고.
주고받고.
끝내는 다수의 실전을 겪은 내가 아주 조금 더 뛰어나 승리한다.
괜찮은 이야기였다.
‘설득력도 있고.’
내 생각과도 거의 같았다.
나는 마지막에는 선역이 이기는 게 맞지 않나 싶었지만, 러셀은 자신의 캐릭터가 아직 더 발달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듯했다.
‘틀린 말은 아니군.’
거기에는 나도 동의를 했다.
* * *
GCW의 메인 경기장.
눈부신 조명 아래 링이 비춰졌다. 천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에는 GCW의 모든 임직원들이 모여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 모두가 나와 러셀의 경기를 보러 온 것이었다. 가장 좋은 자리에는 할리 레이시와 기자 양반이 앉아 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쿠가 어지간히도 우리의 대립에 대해 떠들고 다닌 모양이군.’
레슬링 팬들 사이에서도 팝콘을 튀기기에 좋은 이야기니 말이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남은 인디 출신의 베테랑.
위대한 삼촌을 뛰어넘고자 하는 명문가 출신의 신참.
그 두 사람의 대결.
‘전형적이지만, 이거야말로 레슬링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지.’
스포츠의 형태를 지닌 쇼.
때문에 바쿠는 우리에게 결과마저 맡긴 듯했다. 그 스스로도 팬의 입장에서 이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지켜보기 위해.
‘확실히 보여주지.’
입장로 뒤의 ‘고릴라 포지션’.
프로레슬링 쇼가 진두지휘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명 관리팀과 촬영팀밖에 없었다.
그들이 분주하게 경기의 외적인 부분을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나는 천천히 몸을 풀었다.
근육을 꾹꾹 늘리고, 혹시나 부상을 입지 않도록 신께 기도했다.
프로레슬러들은 아차 하는 실수로 링 위에서 죽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런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게 좋지만,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일어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했다.
‘이 경기를 잘 끝내서 모두가 오줌을 지릴 정도로 감탄하고 계약금이 두 배로 뛰게 해주십쇼.’
그게 내가 바라는 것이다.
아, 거기에.
‘제가 삶의 이번 기회를 잘 살려서 향후 드와이트 존슨처럼 회사보다 더 큰 스타가 될 겁니다.’
다짐도 했다.
“준!”
바로 그때, 조명 체크를 마친 직원이 날 불렀다.
“입장은 먼저?”
“아니, 제가 먼저 할게요.”
러셀이 앞으로 나섰다.
“그래, 음악 틀게.”
바로 옆에 있던 직원이 기기를 조작했다. 그러자 지이이잉, 하고 날카로운 기타 소리가 울렸다.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삼촌, 그렉 하트의 입장 음악이었다.
‘이 음악밖에 없지.’
러셀에게 잘 어울렸다.
가볍게 심호흡한 그는 곧바로 커튼을 걷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마지막으로 뭉쳐진 근육을 풀며 연주되는 음악을 즐겼다.
이제 녀석과 싸운다.
‘대등한 관계로.’
거기다 이긴다.
별거 아닌 것처럼 들릴 수 있어도 나에게는 무척 새로웠다.
이전의 나는 프로레슬러 중에서 최하위 계급인 자버(Jobber)였다.
기술도 몇 개 쓰지 못했고 멍청하게 당하다 끝나기만 했다.
그런 내가.
‘하트 가문의 아들을 이긴다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있다니. 그동안의 노력과 내 능력이 인정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지, 아니야.’
아직 거기까진 아니었다.
나는 기회를 받았을 뿐이다.
이제 내가 그럴 만한 그릇이라는 걸 사람들에게 증명할 시간이었다.
“준, 갈까요?”
“음악이 뭐에요?”
“……저희 쇼 메인 음악이요.”
“왜 저만 그거죠.”
“따, 딱히 쓸 게 없어서?”
“락콜드 걸로 해줘요. 그 양반이 악역 시절에 쓰던 테마로.”
내가 그렇게 말하자 어깨를 으쓱한 직원이 음악을 틀었다.
쨍그랑, 하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거기에 맞춰 커튼을 걷고 밖으로 나갔다.
입장로 위.
조명이 비추는 가운데, 불길하고 파괴적인 음악이 연주되었다.
나는 링 위에서 준비를 마친 러셀을 노려보며 그 위로 올라갔다.
시선을 줄곧 그에게 고정했다.
그로써 이 싸움이 서로 감정이 상한 채 벌어지는 것이라고, 각본과 현실 위에서 줄타기를 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러셀 역시도 지지 않고 나를 노려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재킷을 벗고 던지자 러셀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 역시도 지지 않고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런 우리가 부딪히지 못하도록 심판이 제지했다.
“아직 공 안 울렸어!”
“목은 씻고 왔냐? 마이너 카피.”
“걸어서 못 나갈 줄 알아라.”
우리는 미리 정해둔 캐릭터에 맞춰 즉석에서 연기를 했다.
심판이 서둘러 룰을 설명했다.
안면 펀치 금지, 고간 타격 금지 등. 그러는 중에도 나는 턱을 들고 거만하게 러셀을 노려보았다.
“각자 링 포스트로!”
그리고 각자 반대편으로 물러나자, 심판이 크게 팔을 휘둘렀다.
땡땡땡!
날카롭게 공이 울렸다.
어깨를 바닥에 댄 채 커버를 당해 쓰리 카운트, 혹은 10초 간 링 밖에 있거나, 서브미션, 반칙패.
룰은 전형적이었다.
일대일.
러셀은 전형적인 레슬링 자세를 취하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락 업.
두 선수가 서로의 목과 팔을 붙잡고 엉겨 붙으며 힘을 겨루는, 경기의 시작을 알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술이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그것을 무시하며 링을 한 바퀴 돌았다.
러셀은 계속 긴장했지만 나는 그에게서 비스듬히 돌아선 채로 일부러 여유를 부렸다.
참다못한 러셀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건 함정이었다.
서로가 미리 경기 전에 계획해둔, 다시 말해 이 경기의 ‘스팟’.
허리를 숙인 러셀을 노리고 날아오른 나는 그 목을 향해서 왼쪽 무릎을 세차게 내질렀다.
쩌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 몸이 돌아갔다. 나는 링 아래의 관객들이 놀라는 걸 똑똑히 보았다.
개중에서도 바쿠의 반응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그는 경기의 첫 타로 나온 내 피니시 무브에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상하지 못했겠지.’
하지만 러셀과 나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스팟이었다.
나는 로프 근처에 쓰러진 러셀의 다리를 들고 그 위에 엎드렸다. 다가온 심판이 카운트를 셌다.
“원……! 투……!”
하지만 러셀의 발이 타이밍 좋게 근처의 로프에 올라갔다.
로프 브레이크.
경기가 시작되기 전 미리 설명해두었기에 심판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내게 알렸다.
“투!”
“제기랄.”
김이 빠졌다는 듯 웃은 나는 러셀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그가 무의식중에 내 팔을 쳐냈다.
피니시 무브는 그 위상이 무척이나 중요했다. 한 방에 경기를 끝낼 정도로 강한 기술이라는 인식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커버를 자력으로 벗어나는 것보다 아슬아슬하게 로프 브레이크로 빠져나오는 이야기를 선택했다.
나는 러셀의 뒤통수를 퍽퍽 때리며 일부러 그를 조롱했다.
“뭐야, 이걸로 끝이야? 레슬링 가문 출신이라며?”
다시 커버를 했다.
이번에는 회복이 좀 된 러셀이 자력으로 커버를 빠져나왔다.
비웃듯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대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러셀이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그의 앞에서 나는 팔을 뻗어서 락 업을 제안했다.
“와봐. 러셀 하트.”
전형적인 악역 수행이었다.
그런 내 행동을 본 관객들은 러셀의 반응을 기대하며 돌아봤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러셀이 의지를 다잡듯이 팔을 들어올렸다.
이내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