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4화 (14/634)

14.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우리는 평소처럼 지냈다.

훈련을 거듭했으며, 그사이 지망생들은 계속해서 탈락했다.

그들은 나와 러셀의 시합을 보고 뒤늦게 조언을 구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그렇게 살아남은 건 네 명.

나와 러셀.

키가 2미터를 넘기는 뉴욕 출신의 엘리트 흑인, 에디 모리스.

마지막으로 숀 시나.

‘정말 아슬아슬하게 합격했지.’

나는 시나가 바쿠에 의해 쫓겨나기 직전 어떻게든 바디 슬램을 낙법 친 것을 기억해냈다.

만약 그때 실패했다면 우리는 동기생이 될 수 없었을 터였다.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시나가 아니라면 내 운동 루틴은 앞으로 갈 길을 잃은 포레스트 건프처럼 방황을 거듭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중, 나는 바쿠가 코앞에 바싹 다가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워, 워?! 뭡니까?”

“너 이 자식. 지금 내가 말하려는데 집중 안 할 거야?”

“……할게요. 할게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났다. 바쿠는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모든 시험이 끝난 뒤.

우리는 마지막으로 훈련장에 모여 앞으로의 다짐…… 비스무레한 것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합격자가 넷은 아니었다.

여덟이었다.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에 앞을 보자 조그마한 여자애들이 흥미로운 듯이 날 바라보았다.

그렇다. 여성 선수 쪽도 착실히 시험이 진행된 것이었다.

“어쨌든, 그래. 너희는 앞으로 이 GCW에서 정식으로 계약해서 수련을 하게 될 거다.”

바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게 무척이나 진지했다.

“이중에 누군가 미래의 WWF 월드 챔피언이 될 수도 있겠지. 그렇지 않은 자도 있을 테고.”

그 시선이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너희 모두를 전자의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하면서 키울 것이다. 알겠나?”

우리는 한마음 한목소리로 ‘예!’ 하고 크게 대답했다. 바쿠는 만족스러운 듯 껄껄 웃었다.

“좋아. 좋아. 그렇다면 이제부터 한 사람씩 사무실로 들어와라. 나머지는 자율적으로 연습하고.”

‘계약서를 보여줄 모양이군.’

정확히는 계약 조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자는 거겠지만.

‘내가 얼마나 받았더라.’

분명히 많이 받지는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의 나는 정말 어렵사리 합격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받긴 받았다.

‘5,000달러(600만 원)쯤?’

그나마도 바쿠가 저 녀석, 불쌍하니 좀 더 챙겨주자고 해서 20퍼센트 정도 더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메인으로 올라가서도 그다지 대우는 달라지지 않았다.

연봉 10만 달러(1억 원).

거기에 추가적인 로열티 없음. 티셔츠 발매 없음.

나는 철저하게 무시를 당했다.

얼핏 많아 보이지만 WWF는 세계적인 기업이다.

이 단체의 메인 이벤터는 추가 수당, 로열티를 빼고 1년에 천만 달러(110억) 정도는 가져갔다.

‘이번에는 얼마쯤 받으려나.’

고민에 빠져 있자니, 제일 처음 들어갔던 시나가 딱딱하게 굳어진 채 밖으로 나왔다. 그 손에는 계약서가 팔랑거리고 있었다.

‘좀 종이봉투에 넣어주지.’

아니, 시나라면 넣어주겠단 걸 모르고 그냥 나오지 않았을까.

쓰게 웃은 나는 이내 브릿지 자세를 취하고 각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걸 지켜보았다.

기뻐했고, 눈물을 흘렸고,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WWF는 그런 곳이었다.

“준, 네 차례야.”

마지막으로 나온 러셀이 굳게 닫힌 사무실 문을 가리켰다.

자세를 바꾸고 일어난 나는 생각을 비우며 안으로 들어갔다.

“오, 기다렸다.”

테이블 앞에 기다리고 있던 바쿠가 내 앞으로 종이를 내밀었다.

계약금이라고 적혀져 있는 부분이 텅 빈 채였다.

“거기에 원하는 금액을 적어라.”

“……?”

“아무래도 너는 원하는 만큼 주는 게 맞는 것 같아서. 내가 책임지기로 했으니 알아서 해라! 네 야망에 맞는 값을 적어! 카하하핫!”

“알겠습니다.”

“얼마 적으려고?”

“천억 달러요.”

“크하하! 마음대로 해라!”

그렇게 웃었던 바쿠는 가장 앞에 숫자 1이 적히자 근육에 파묻힌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말로 적게?”

“원하는 만큼 적으라면서요.”

“아, 아니.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제대로 이야기를 해보자.”

“처음부터 그러시지.”

나는 펜을 놓았다.

잠깐 고민 후, 이내 원하는 가격을 입에 담았다.

“2만 달러 주십시오.”

“2만……?”

“러셀이 1만쯤 가져갔을 테니 저는 그 정도 줘도 되지 않습니까? 회장님 눈에 들 염려도 없어서 오랫동안 쓸 수 있을 텐데.”

“아니, 네가 우리 회사의 사정을 어찌 그리 자세히…….”

“당분간 관객 동원 책임져드릴 테니까 2만으로 해주십쇼.”

나는 싱긋 웃었다.

바쿠는 고민에 빠졌다.

‘끄응, 끙…….’ 하고, 뭔가 생각하다가, 떠올렸다가, 그게 아니다 싶었는지 다시 고민을 반복했다. 나는 쓰게 웃었다.

“그럼, 역대 최고로 많이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음, 데뷔는 시켰지만 지금은 다른 단체로 넘어간 ‘사모아 고’가 1만 5천 달러를 받아갔지?”

“2만 주십시오.”

“……아니, 그걸 들으면 너도 똑같이 깎는 게 순서 아니냐?”

“사모아 고는 WWF에 적응 못해서 TMA로 넘어간 거 아닙니까. 전 그럴 염려 없으니까 주세요.”

TMA는 WWF의 100분의 1 정도 되는 규모를 가진 미국의 또 다른 프로레슬링 단체였다.

“아, 아니.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르는 거 아니냐.”

“같은 남자로서 제가 한 입 가지고 두말하는 거 보신 적 있으십니까, 바쿠?”

주도권이 넘어왔다.

나는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곤란해하는 바쿠를 바라보았다.

“후우, 그래……. 확실히 내가 가르친 놈들, 아니, 가르칠 것도 없었지. 지금껏 봐온 수련생들 중에 네가 최고이긴 하다.”

그는 펜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말이다. 준호 킴.”

‘내 풀 네임을 외우고 있네.’

그만큼 나에게 애정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일까.

눈빛을 보자 그런 듯했다.

“이 업계는 어려운 곳이야. 부커-리가 이번에 왜 월드 챔피언이 못 됐다고 생각하냐?”

“그가 WWF에 합병 당한 단체 출신이라 그런 건가요?”

“그건 부수적인 문제지.”

바쿠는 시선을 피했다.

사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잘 알고 있었다.

인종.

넘을 수 없는 벽의 앞에서 내가 고꾸라지는 걸 걱정하는 거겠지.

그럼에도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약속하죠.”

“뭐?”

“은퇴하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WWF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이 되겠습니다.”

“……WWF 역사상 동양인 챔피언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걸 알고 하는 소리겠지?”

“알고 있죠. 지금 활동하는 사람들도 다 일본에서 건너와서 자버나 태그 팀 벨트, 하드코어 벨트 몇 번 만진 게 전부 아닙니까?”

“그런데도 네가 그런 이들을 초월해 위대해질 수 있다고?”

“그렇게 할 겁니다.”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반드시요. 제가 돈이 되어준다면 거기에 환장한 바솔로뮤 맥센도 중요하게 쓰지 않을까요?”

“……그래, 내가 졌다.”

바쿠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보니 미안하군. 준호. 나는 널 미래의 월드 챔피언으로 생각하고 대하겠다고 했는데.”

“사람이 실수도 하는 법이죠.”

“그러므로 3만으로 적어라.”

“예?”

“넌 내가 봤을 때 사모아 고보다 적어도 두 배는 재능이 있어. 그러니까 거기 걸어보는 거다.”

“할리가 허락하겠어요?”

“안 할 수가 없을 거다.”

바쿠는 씨익 웃었다.

그러더니 바지 안으로 슥 손을 넣어 뒤적거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신문을 하나 꺼내들었다.

‘아니, 왜 저게 저기서 나와.’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고 있자 바쿠가 그걸 내밀었다.

“읽어봐라. 새개끼야.”

“아니, 왜 자꾸 그때부터 새개끼라는 말을…….”

“됐고.”

나는 신문을 받아들었다.

페이지를 몇 장 넘기자 바쿠의 퀴퀴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걸 애써 참으며 더 넘기자 문화부 섹션에 내가 나왔다.

“……?”

분명히 한국 동요 중에서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하는 노래가 있긴 했던 것 같은데.

텔레비전은 아니지만 신문이었다. 거기다 크기도 꽤 컸다.

내가 여기 지망생으로서 들어올 때 찍었던 볼품없는 사진.

하지만 그것을 기자인 로빈 코너는 완벽하게 포장해주었다.

[고전적 가치의 재발견.]

그런 헤드라인.

[이 글을 읽고 있는 미국의 여러분, 프로레슬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위층의 저렴한 문화, 폭력에 얼룩진, 위험천만한 언더독들의 프릭-쇼. 아마 막연히 그렇게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프릭-쇼라.”

쓰게 웃었다.

나는 내가 프릭-쇼에 출연하기에는 잘생겼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그건 여러분의 착각이다. 프로레슬링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전사로서의 혼을 일깨워준다. 실제로 필자의 다섯 살배기 아들은 프로레슬링 쇼를 관람하고 와 타이켄토(Tai-Ken-to)를 비롯한 무술에 눈을 뜨게 되었다.]

태권도를 말하는 듯했다.

[여러분의 아이가 매일 게임만 한다면 프로레슬링을 추천한다. 그들은 매일같이 땀을 흘리며 미국이 내건 가치를 빛내고 있다.]

내 말 몇 마디에 이렇게 멋진 기사를 써주다니 감격스러웠다.

“멋진 기사지?”

“예, 그러네요.”

“그 기자 양반. 지난 쇼에 애들 데리고 왔더라. 그리고 네가 왜 출연하지 않았는가 묻던데.”

“타이켄토라도 배우러 갔다고 하지 그러셨어요.”

“크하하. 차별적이잖냐. 어쨌든, 다들 네가 한 말에 감동했다.”

바쿠가 펜을 내밀었다.

“적어라. 3만 달러.”

그것을 받은 나는 그 제안대로 당당하게 3만 달러를 적었다.

GCW 역사상 최고의 계약금.

“좋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할리에게 이야기를 해두고 오마.”

미소를 지은 그는 어깨를 편 채 당당하게 바깥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약 5분 뒤.

바쿠는 그 큰 덩치가 무색하게 머쓱해하며 사무실로 돌아왔다.

“3, 3만은 안 된다는데…….”

“…….”

인간 병기로 유명했던 프로레슬러라도 은퇴한 이후에는 일개 회사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2만으로 타협했다.

* * *

그렇게 계약을 마친 우리는 곧바로 GCW의 훈련에 돌입했다.

훈련의 내용은 다양했다.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체력 훈련, 기술 훈련과는 별개로 경기를 하는 방법까지도 다시 배웠다.

거기다 우리는 링 위에서 연기를 할 때 필요한 발성법이나 연기 방법까지도 교육받았다.

프로레슬러는 엔터테이너다.

경기를 하는 능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연기력이었다. 다행히 나는 전생의 경험을 떠올리며 금세 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우리는 다른 레슬러들과는 마주치지 않았다.

숙소, 훈련장, 숙소, 훈련장.

주말에 가끔 시내.

그 과정을 계속 반복하며 나는 차근차근 경쟁력을 갖춰 나갔다.

일단은 몸.

20대 초반의 젊음은 눈부셨다. 먹고 운동을 할 때마다 족족 근육이 붙어나가는 게 느껴졌다.

물론 그전부터 나름대로 몸을 써왔던 것도 컸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몸을 최대한 신중하게 계산하면서 키워나갔다.

분명 터질 듯한 근육은 프로레슬러로서 큰 장점이다. 하지만 굳이 거기에 매달리진 않았다. 운동수행 능력이 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균형을 생각하며 근육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근육의 실전성을 기르기 위해 프로레슬링 이외에도 몇 가지 ‘무술’을 연마했다.

아마추어 레슬링.

복싱,

브라질리언 주짓수.

무에타이.

이렇게 네 가지였다.

다행히 GCW에는 이처럼 다양한 무술의 전문가들이 많았다.

그 모두가 인생의 실패를 겪고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 능력은 확실해, 트레이너로 일하며 선수들에게 자신의 기술을 알음알음 전수해주었다.

나처럼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다고 말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는지 다들 꽤나 놀란 눈초리였지만.

‘배우면 쓸 데가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한 나는 스스로를 몰아붙여가며 훈련을 시작했다.

나 역시 기초적인 지식은 가졌지만 확실히 전문가들은 달랐다.

필요한 장비까지 사비로 사서 가르침을 청하는 나를 선생들은 다들 열성을 다해서 가르쳤다.

그렇게 여름이 지났다.

“좋아, 준. 아주 잘했다.”

복싱을 가르쳐주는 건 옛날에 트레이너로 오래 일했던 마이키라는 이름의 노인이었다.

현재는 빚쟁이들로부터 도망쳐 GCW에서 일하고 있는 그는 복싱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래, 이런 걸 배워서 어디 쓰려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못난이 선수 정도는 되겠구나.”

처음에는 날 펀칭백이라고 부르더니 이제는 인정을 해주었다.

다른 선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처음에는 날 못미더워하더니 이제는 정반대가 되었다.

전생에 쌓은 격투기에 대한 이해도가 뒷받침이 되어 가능했다.

‘뭐, 아직 멀었지만.’

그렇게 생각한 나는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닦아내기 위해 샤워실 안으로 들어섰다.

뜨거운 물에 피로가 씻기는 동안 거울로 내 몸을 확인했다.

3개월의 훈련.

이제는 확실히, 프로레슬러다운 단단하고 멋진 몸을 갖추었다.

‘잘했어. 김준호.’

신이 났던 나는 이리저리 포즈를 취해가며 몸을 감상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준…….”

문이 벌컥 열리며 바쿠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포즈를 잡은 날 보고는 잠시 굳어졌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씨, 씻고 이야기 좀 하자.”

당황해 대답한 뒤 문을 닦고 조용히 밖으로 나가는 바쿠.

‘제기랄.’

부끄러운 광경을 들키게 된 나는 죽고 싶는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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